제42화. 무너지는 세계 (6)
“아까 한 말 다시 말해봐.”
맥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이 상한 건가?’
도현이 당황하는데 맥이 대답을 닦달했다. 도현이 떨떠름히 말했다.
“…자신감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니 그 전에!”
“맥은 연기를 잘한다고요?”
“어! 그래, 그거!”
도현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단 표정을 했다.
“내가 연기를 잘해?”
“네.”
도현이 새삼스럽단 표정으로 맥을 보았다.
“아니면 맥이 오디션에 합격했을 리가 없잖아요.”
“너, 너도 그렇게 생각해?”
“맥을 추천한 게 저예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리허설 때 리암이 해준 얘기에 양심이 아팠더랬다.
“큼. 그, 그래?”
맥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가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던 대상이 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지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도현은 자신이 정답을 맞혔음을 깨달았다. 그가 서둘러 말을 더했다.
“연기는 좋은데 자신감이 부족하다 보니 조금씩 어색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하면 되나? 이게 맞나? 이러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물론 제 말을 다 믿을 필욘 없….”
“네가 한 말이니까 맞겠지.”
언제부터 그렇게 믿음이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자신감 때문이라는 거지. 자신감, 자신감….”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았다.
아니, 맞는 말이었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자신의 연기를 되돌아보았다.
맥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물론 부족한 게 자신감뿐인 건 아니겠지만,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건 확실했다. 첫 촬영이라서, 그리고 도현이 너무 잘해서 그동안 너무 움츠러들었다.
맥은 이제야 머릿속이 맑게 개는 느낌이었다.
“고맙다.”
맥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런 간지러운 말, 친구들한테도 한 적 없었는데 지금은 하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다.
도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맥이 확신이 서린 걸음걸이로 리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로봇처럼 뻣뻣하게 굳은 몸을 하고선 목소리 하나는 크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20분! 20분만 더 쉴 수 있을까요?!”
맥의 변한 눈빛을 보던 리암이 짓궂게 말했다.
“20분 더 주면 뭐가 달라지나?”
그는 돌아올 답을 꽤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맥은 리암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네! 달라지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내는 맥은 오디션 때 보았던 간절함을 그대로 담아 빛나고 있었다.
‘저런 얼굴로 부탁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뭐 거절할 생각도 없었지만.’
피식- 웃은 리암이 대답했다.
“그래. 20분이든 30분이든 좋으니까, 달라져서 돌아와라.”
“네!”
힘차게 대답을 한 맥이 시나리오를 들고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아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내심 흐뭇한 표정으로 보던 리암이 생각했다.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고.
어디 들풀이 화초가 될 수 있을지, 참으로 기대가 됐다.
20분 후.
촬영이 재개되었다.
“씬 40. 오후 세 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서 있는 두 사람.”
단단한 눈을 한 맥이 흡! 숨을 들이켰다. 리암이 그런 맥을 슬쩍 보곤 픽 웃었다.
“레디, 액션!”
탁!
슬레이트가 내려갔다.
* * *
두 사람은 불규칙적으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이사야의 팔을 잡은 채 천천히 걷던 유가 지나가는 중년 여성을 흘깃 보곤 말했다.
“저 사람은 안 돼. 가방이 작은 걸 보니 지갑보다 카드 지갑을 가지고 다닐 가능성이 높아.”
이번에 유의 시선이 닿은 곳은 정장을 잘 차려입은 남성이었다. 잠깐 남성을 살펴보던 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걸음을 보면 머리는 높게 들고 있고 등뼈는 곧게 뻗어 있지? 가슴이 앞으로 내밀어진 만큼 팔은 뒤쪽으로 쏠려 있고. 근육의 움직임이 뻣뻣해 보이네. 저 사람은 아마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을 거야. 잘못 걸리면 큰일 나는 타입.”
진열대에 놓인 상품을 설명해 주듯이 유는 자세하고 성실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태도에 거부감을 느낀 이사야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저 사람.”
이사야를 돌아본 유가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중년의 남성을 은밀하게 가리키며 입꼬리를 올렸다.
“저 사람이야. 과시적으로 꺼낸 명품 시계를 보니 현금도 많이 들고 다닐 거야. 도망치는 걸 붙잡기엔… 무릎이 별로 안 좋아 보이네. 금방 따돌릴 수 있겠다. 명품을 과시한 것과 달리 어깨가 굽어 있는 걸 보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아니야. 도둑맞은 지갑 따위 금방 포기해 버릴걸.”
“그거 정확한 거야?”
“글쎄. 내가 지금까지 유치장에 안 갇히고 여기 있는 걸 보면 나름?”
유가 의미 없이 짧게 웃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염세적인 빛을 띤 얼굴이었다. 평소의 날카롭고 예민한 모습이 아닌, 감정이 잿빛으로 탈색된 것 같은 표정은 낯설었다.
이사야의 시선이 조금 길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숨을 삼키며 떨림을 애써 내리눌렀다.
유를 위해서였다.
* * *
리암은 정신없이 자신의 영화의 두 주연 배우를 카메라에 담았다.
맥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연기 실력이 엄청 뛰어나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맥은 카메라 앞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또 하나.
도현의 연기에 잡아먹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면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리암이 보기에 맥은 지금 ‘그래서 뭐’라는 태도 같았다. 그게 또 웃기고 재밌었다.
도현은 조금 논외였지만, 맥의 모습은 놀라웠다.
겨우 삼 일이었다.
도현을 기준으로 삼은 맥은 모르겠지만, 처음 촬영하는 아역 배우가 이만한 속도로 카메라와 친해지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리암은 촬영이 끝나갈 때 즈음 많은 것이 달라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카메라 앵글 안에서 두 배우가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흐핫! 푸하하! 아까 그 남자 표정 봤어?”
“허억- 헉, 응, 봤어.”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도망쳐 온 둘이 가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이내 눈이 마주치고.
그늘 한 점 없이 시원하게 웃는 유를 본 이사야는 가슴을 꽉 누르던 죄책감과 두려움도 잊고 그 웃음에 전염되었다.
“하…!”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웃음보가 터지니 댐이 부서진 둑처럼 웃음이 쏟아져 내렸다.
달리기로 인한 열기.
모자란 공기로 인해 어지러운 머리.
엉망이 된 서로의 모습.
그 와중에 손에 들린 뻔쩍한 지갑.
그 모든 게 너무 웃기고 우스워서 두 사람은 배를 잡고 굴렀다.
“흐하, 하하하! 하학!”
“크흐흣! 으하하!”
너무 웃어서 당겨오는 배를 부여잡으며 이사야가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헐떡이며 찡그리는 게 잘못 보면 꼭 우는 것 같았다.
이사야는 그렇게 우는 것처럼 웃었다.
그 미세한 감정을 모두 카메라로 잡아낸 리암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좋아! 컷!”
도현과 맥의 시선이 리암에게 닿고.
리암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외쳤다.
“오케이!”
“우악!”
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던 맥이 눈에 들어온 도현을 보고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
깜짝 놀란 도현이 토끼 눈이 되고.
“정말 고마워! 다 네 덕분이야!”
기쁨에 젖은 맥은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 도현을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몸을 확 덮쳐오는 높은 온기에 도현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 어…. 맥이 한 일인걸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한 도현이 어색함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희성 형을 제외하고, 자신을 이렇게 덥썩 껴안은 건 맥이 처음이었다.
불편함에 꼼지락거리는 도현의 사정과 달리, 어린아이 둘이 껴안고 있는 모습에 촬영장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뒤늦게 흥분이 가라앉은 맥은,
“억! 미친!”
코앞에 있는 도현의 얼굴에 깜짝 놀라 뒤로 밀쳤다.
남자애를 끌어안은 것만 해도 소름 끼치는데 상대가 도현이었다.
맥의 뒷목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아무리 기쁘다고 해도 쟤를 끌어안다니!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러웠다.
“야, 그, 미, 미안하다.”
타오를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사과해 오는 맥의 모습에 당황했었던 도현도 결국 미소를 베어 물었다.
“아씨. 쪽팔리니까 웃지 마!”
맥이 괜히 소리쳤다.
* * *
“도현! 촬영은 잘했어?”
진이 삼 일만에 등교한 도현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응. 재밌었어.”
“그래? 난 네가 없으니까 허전한 거 있지. 촬영 안 하면 안 돼? 너도 우리 보고 싶었지! 응?”
진이 우는 소리를 냈다.
촬영하느라 진과 니콜라스를 잊고 지냈던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오늘은 왔네.”
“응. 좋은 아침이야.”
“뭐, 그래.”
니콜라스는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은근히 반기는 기색이었다. 진과 니콜라스가 도현의 책상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겼다.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은 니콜라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놀러 가는 건?”
“허락받았어. 언제 올지 알려달래.”
도현이 어제 리암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친구들이? 뭐, 네 친구들이라면 얌전하겠지. 마음대로 해라. 다만 촬영장에서 방해되는 행동만 안 하면 돼.
선뜻 허락해 주던 리암.
도현이 진과 니콜라스를 보았다.
‘얌전한가?’
도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얌전함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진이 니콜라스를 타박했다.
“니키, 놀러 간다니! 우린 견학하러 가는 거야, 견학!”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니콜라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차인데?”
“놀러 가는 건 결석 사유가 되지 않지만, 견학은 되거든!”
니콜라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깊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었다. 니콜라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수했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해.”
진이 새침하게 대답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현은 생각했다.
‘이 정도면 얌전한 거 아닌가?’
둘이 화단을 모조리 들쑤셔 놓았던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린 도현이었다.
세 아이들이 수다를 떠는데, 재키가 불쑥 나타났다.
“너 왜 그동안 등교 안 했어?”
재키의 물음에 도현이 진과 니콜라스를 보았다. 두 사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 안 했어?”
“응.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니콜라스가 태연히 대답했다. 도현이 어디 갔냐는 질문에 곧이곧대로 말하려던 니콜라스를 막아선 전적이 있던 진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친구들의 배려가 간지러워서 몽글몽글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서 왜 안 온 거야?”
“그게….”
도현이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어! 나도 궁금해!”
도현이 있는 쪽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아이 하나가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아이들이 도현의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둘러싸인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현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관심이 당황스러웠지만, 그동안 도현만 모르고 있었을 뿐 아이들은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진과 니콜라스하고만 붙어 다녔고 타인에게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성정상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전교에 몇 명 되지 않는 동양인이면서 백설 공주를 떠오르게 하는 외모, 어른스럽고 차분한 분위기와 소문이 자자한 그림 실력까지.
도현은 모르겠지만, 동양의 왕자라고 부르는 아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도현이 삼 일이나 학교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는데 진과 니콜라스는 물어도 대답을 안 해준다. 관심이 안 쏠릴 수가 없었다.
삼 일 동안 전학을 간 거다, 여행을 갔다, 아파서 못 나오는 거다, 심지어 동양의 의식을 하러 간 거다, 라는 말까지 나왔다.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아이들은 궁금한 걸 숨기지 않았다.
이쯤 되니 거짓말하기도 이상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숨기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촬영 때문에 바빴어.”
“촬영? 무슨 촬영?”
“영화….”
“영화?”
질문한 아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럼 티브이에 나와?”
“아니. 그건 아니야. 내가 찍는 건 독립 영화라서 독립 영화 극장에서만 상영될 거야.”
독립 영화가 뭔지 모르는 아이들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그럼 너 배우야?”
“어?”
도현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영화 찍는다며? 거짓말한 거야?”
“거짓말 아니야.”
“그럼 배우 맞네!”
참으로 단순명쾌한 결론이었다.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침묵했다.
아이들이 저마다 한두 마디를 얹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제 얘기를 코앞에서 듣고 있자니 조금 민망했다.
‘이러다 말겠지.’
도현은 곧 편하게 마음먹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