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3)화 (44/582)

제43화. 무너지는 세계 (7)

도현은 신기한 눈으로 성당을 둘러보았다.

온통 하얀 성당은 위압감을 느낄 정도로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작지도 않았다.

낯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3층으로 이루어진 성당은 입구에 지상과 천상의 시공간 경계를 상징하는 마당이 있었는데, 성모상이 굽어보듯 그들을 반겼다.

도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자, 신부님이 웃으며 나와 그들을 반겼다.

이미 답사를 마쳤는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도현은 느긋하게 성당 내부를 구경했다.

그런 도현의 모습에 신부가 호의 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성당에 처음 오셨습니까?”

“아… 네. 맞아요.”

“그럼 제가 조금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신부의 온화한 미소에 도현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도현 본인은 종교에 그다지 유감이 없었으나, 형은 꽤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의 기억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감정은 부정적이었고 냉소적이었다.

도현은 생각을 털어냈다.

“제가 번거롭게 해드리는 게 아닐지….”

“어린 형제님을 돕는 게 제 기쁨이지요.”

그에 도현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안내를 부탁드렸다. 신부님은 기꺼운 마음으로 앞장섰다.

신부님을 따라 성당 내부로 들어가자 건물의 겉면과 마찬가지로 하얀 문들이 보였다. 도현은 작은 사무실과 만남의 방, 성물방 등을 구경하곤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교리실에서 교리 수업을 받고 있던 신도들이 그들을 반겨주어 잠깐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하의 소성전까지 구경하고 나와 이 층으로 올라갔는데, 곧바로 보이는 광경에 도현은 입을 살짝 벌렸다.

이 층에는 대성전이 있었는데 천장이 아주 높아서 절로 마음이 탁 트였다. 성체 성사가 거행되는 제대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앉아 기도를 올리는 의자들이 정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길쭉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엄숙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신부가 도현을 뒤편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고해 성사 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신도들은 성찰과 통회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보속하여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죠.”

고해실은 문이 두 개가 나란히 달려 있었는데, 신부님이 통하는 문과 신도들이 통하는 문을 구분해 놓은 것 같았다.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신부가 가볍게 물었다.

“어린 형제님께서도 혹시 고해하고 싶은 것이 있으십니까?”

도현은 대답 대신 질문했다.

“고해하면 무슨 죄든 용서받나요?”

“하느님께선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이시니까요.”

“용서받지 못할 죄라면요?”

툭, 튀어 나간 도현의 말에도 신부님은 한 치의 동요 없이 답했다.

“너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양털처럼 희게 하리라.”

믿음으로 가득 찬 목소리였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죄를 지었든, 형제님께서 진정으로 아파 깊이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믿음 또한 순리인지도 몰랐다.

덩어리 님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를 겪은 도현은 내심 신부님이 말하는 절대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존재의 유무와 말의 진실성은 도현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종교와 믿음은 구원을 바라는 이에게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세상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없을지 모르더라도, 용서받아선 안 되는 죄가 있었다.

도현이 고해실 문 앞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곧 촬영해야 해서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두고 있었군요. 그럼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안내에 대한 감사를 표한 도현은 오늘 촬영할 장소로 돌아가 스태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적당한 곳에 떨어져 서 있었다.

한쪽에 서서 무어라 말하는 왈트와 고개를 주억이는 맥이 보였다. 오늘부터 맥이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이 등장하는 만큼, 왈트가 그를 지도하기 위해 촬영장에 온 것이었다.

촬영의 주 무대가 1층의 만남의 방이라 그곳에서 리암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쁘게 준비하고 있었다.

6시부터는 미사가 있어서 촬영은 5시까지만 가능했다.

1시부터 5시까지, 일 층에 있는 만남의 방을 신부님과 신도분들이 흔쾌히 내어주신 덕분이었다.

만남의 방은 답답하지 않도록 창문이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밝았다. 그뿐 아니라 채광을 신경 썼는지 햇빛이 방의 정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안에서 창을 내다보면 바람에 산들거리는 푸른 잔디밭이 펼쳐졌다. 여러모로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촬영을 준비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쪽에서 맥을 지도하던 왈트와 눈이 마주쳤다.

왈트는 눈을 깜빡하며 간단한 눈인사를 했다.

곧이어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고, 촬영 팀은 성당 뒷마당과 만남의 방, 반반으로 나누어졌다.

만남의 방을 나서는데 바이올린을 쥐고 손동작을 연습하고 있던 맥이 고개를 들었다.

“잘해라.”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말투였지만, 응원과 격려의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오해하지 않고 뜻을 받아들인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이사야와 유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유의 인생에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자 관객들에게 스토리의 진행을 알리는 장면인 만큼 좋은 연기를 해야만 했다.

“오늘 촬영도 잘해봐요.”

“네, 잘 부탁드려요.”

로잔나와 대화를 마친 후 사인을 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경쾌하게 슬레이트가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도현은 유가 되었다.

* * *

멍청한 제이콥이 실수를 저질러서 평소 활동하던 구역에 짭새들이 기웃거렸다.

그 탓에 수금 활동을 하지 못하고 하루 동안 백수가 된 유가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어제 나눈 대화가 떠올랐고 그 결과로 괜히 성당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성당 입구에 선 유가 고개를 빼 들었다.

궁금하긴 한데, 들어가긴 꺼려졌다.

하얀 외벽을 한 번, 지저분한 신발을 한 번 번갈아 보던 유가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팍- 걷어찼다.

“됐어. 그냥 가자.”

그리 말하며 뒤돌던 순간이었다.

유가 멈칫했다.

어디선가, 아주 희미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촬영하고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찾아 귀를 쫑긋 세웠다.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없었지만, 도현이 진짜 들리는 듯이 군 탓에 저도 모르게 반응해 버린 것이었다.

음악을 감상하는 것처럼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가 떠졌다. 그 위로는 호기심이 차올라 있었다.

담벼락 위를 걷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외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로잔나는 가볍고 사뿐한 걸음걸이와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옅게 풀린 눈매, 숨을 죽인 채 딱 다물린 입 따위를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는 소리의 근원지에 가까워졌다.

벽 너머로 유쾌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는 벽에 등을 기대어 서서 음악 소리를 감상했다. 제목을 알 수 없는 곡은, 화사한 봄날을 닮아 있었다.

햇빛에 조는 고양이처럼 유의 눈매가 느른해졌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속도가 미세하게 느려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소리가 갑자기 끊겼다.

유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던 유가 조금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천천한 움직임으로, 조심스럽게 창문 안을 들여다보려던 때였다.

드르륵!

창문을 활짝 연 소년과 유의 눈이 딱 마주쳤다. 생선을 훔치다 들킨 고양이처럼, 유가 일시 정지 했다. 크게 뜨인 동공이 흔들렸다.

“어? 누구….”

당황한 소년이 말을 끝까지 잇기 전이었다.

“어? 어! 야! 어디 가!”

정신을 차린 유가 말릴 새도 없이 몸을 홱 돌려 뛰쳐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 소년에 남은 소년의 손이 의미 없이 허공에 맴돌았다.

* * *

유와 이사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번 촬영했다. 롱 테이크로 찍은 촬영 이후, 좀 더 작은 단위로 잘라 촬영하길 여러 번.

오늘 자신의 촬영분을 모두 끝낸 도현이 한쪽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며칠이나 됐다고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촬영이 조금 익숙해졌다.

“도현. 이것 좀 마시고 있어.”

어디선가 나타난 소품 담당 스태프, 브리아나가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내밀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던 브리아나는 어린아이를 좋아했고 촬영 첫날부터 도현에게 호감을 비쳤다.

도현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다는 듯 이것저것 챙겨주는 그녀에 도현은 미안하면서도 고마움을 느꼈다. 도현이 촬영장 분위기에 적응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일 게 분명했다.

“고마워요, 브리아나.”

도현의 감사 인사에 브리아나가 싱긋- 웃으며 ‘천만에’라고 말했다.

코코아를 홀짝인 도현이 브리아나가 어린아이를 정말 예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품위를 지키고 돌아선 브리아나가 주먹을 꽉 쥐었다.

브리아나가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건 맞았다. 그러나 이토록 도현을 챙겨주는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날에 능수능란한 소매치기 솜씨로 혼을 쏙 빼놓고, 다음 날 소름 끼치는 연기로 모두를 압도해 버린 도현의 재능에 경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브리아나는 도현의 1호 팬이었다.

‘저번엔 무서웠는데 오늘은 귀여웠지!’

털을 바짝 세운 길고양이 같던 오늘의 도현을 떠올린 브리아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같이 일하는 친구 한 명이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시선만은 은근히 도현에게 향해 있었다.

사실 정도만 다를 뿐 다른 사람들도 브리아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촬영 팀은 도현에게 점점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홀짝. 홀짝.

도현이 야무지게 코코아를 마시고 있는데 껄렁한 걸음걸이를 한 맥이 도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맛있냐?”

“네. 맥도 마실래요?”

“아니. 너 많이 마셔.”

잠깐의 쉬는 시간을 얻은 맥이 끙, 소리를 내며 도현의 옆에 털썩 앉았다.

“촬영만 끝나면 바이올린은 쳐다도 안 볼 거야.”

“그렇게 힘들어요?”

“그냥… 그냥 그래.”

불만을 쏟아낼 것 같아 말을 삼켰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이는 전적으로 맥의 일방적인 노력이었다.

도현에게 도움을 받은 이후.

맥은 미안함과 고마움에 도현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고 싶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별로 한 일이 없다고 했지만, 맥의 입장에선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도현이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연기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소심하게 눈치만 보고 있었을 게 뻔했다.

“너 초콜릿 좋아해?”

“단걸 자주 먹긴 해요.”

좋아한다는 소리네.

‘그럼 다음 촬영 땐 초콜릿 과자라도 사 올까.’

여기, 도현에게 제대로 스며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맥이 달달한 디저트 종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곧 촬영 시작할 텐데, 한 번만 더 맞춰보죠.”

맥의 앞에 선 왈트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도현이 고개를 들자 왈트가 작게 눈인사를 했다.

강렬했던 첫인상과 달리 다시 만났을 때 왈트는 간단한 인사를 제외하곤 도현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은근히 불편할까 봐 걱정했던 도현은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넵!”

힘든 기색인 것과 별개로 맥이 기합을 잔뜩 넣은 채로 일어섰다. 그러고선 왈트의 지시에 따라 손동작을 시연하기 시작했다.

도현이 입 안에 남은 단맛을 느끼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맥이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걸 거부하지 않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도현이 심적 소모를 해가며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미워하는 성격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러나저러나,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연기가 즐겁다는 티를 내는 맥은 미워하기 어려웠다.

홀짝-

도현은 코코아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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