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4)화 (45/582)

제44화. 무너지는 세계 (8)

시간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도현은 촬영에 열심인 만큼 학교생활에도 성실히 임했다.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짓하지 않고 진지하게 듣는 도현은 선생님들의 애정을 듬뿍 받는 모범생이었다.

도현의 집중은 비단 학문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몸치란 걸 깨달은 도현은 체육 시간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너무 열정적으로 임한 나머지, 체육 선생님이 영화 촬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건가 오해를 할 정도였다.

“도현아… 혹시 감독이 다이어트를 시키니?”

“예?”

도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체육 선생님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아니다. 열심히 하렴.”

“네!”

도현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곤 다시 진지한 얼굴로 훌라후프를 돌렸다.

그리고 오랜만의 미술 시간.

교실이 아니라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었다.

도현은 자리에 쪼그려 앉아 화단에 핀 작은 꽃을 그리고 있었다.

유독 도현의 주변에 아이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고 줄리아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제 미술 시간만 되면 보이는 이 광경은 하모니 반에선 거의 일상이었다.

‘못 말린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줄리아의 발이 자연스레 도현의 곁으로 향했다.

아닌 척 고개를 살짝 내민 줄리아는 도현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꽃을 보고 감탄사를 뱉었다.

그사이에 실력이 더 늘었다.

아이용 색연필로 그리는데도 색 사용이 굉장히 다채롭고 자유로웠다.

이파리가 얼마나 가느다란지.

꽃잎이 얼마나 여린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줄리아는 평소에 눈길도 준 적 없었던 보잘것없는 꽃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연기도 좋지만… 미술도 진지하게 배워봤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차마 강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안타까운 속마음을 숨길 수밖에.

“하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이 도현을 향했다.

이렇게 오전 중엔 학교생활을 성실히 이행하고, 오후엔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그 탓에 같이 점심을 먹지 못하는 때가 많아 진과 니콜라스가 서운해한 것만 빼면 별다른 일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지루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 차려 보니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 많던 시간이 다 어디로 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도현은 날이 갈수록 연기의 즐거움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현의 모습에 맥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저 그 뒷목을 잡아채고 말겠다는 듯이 타오르는 눈으로 추격했다.

두 주연 배우의 레이스에 신이 난 건 리암이었다.

* * *

유가 그렇게 도망친 이후.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성당 앞이었다. 몰래 연주를 엿듣는 게 유의 일상이 되었다.

그 모든 걸 알고 용인했던 이사야가 먹을 것으로 유를 꾀고.

두 사람은 천천히, 혹은 느리게 가까워졌다.

이사야의 연주를 얌전히 듣기도 했고 학교 숙제를 하는 이사야를 구경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경을 가져와서 설명하면 가만히 듣거나 반박하기도 했다.

오후 세 시부터 네 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두 사람은 매일 함께했다.

변화는 늘 그렇듯 갑자기 찾아왔다.

- 미사에 참석해 보지 않을래?

이사야의 권유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유가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야, 지금이라도 난 돌아갈….”

“약속했잖아!”

그놈의 약속!

유는 과거의 자신을 비난했다.

결국 작게 숨을 내쉰 유가 바짝 굳은 채로 섰다. 이사야가 문고리를 잡아 여는 걸 누가 보면 화가 났다고 오해할 것 같은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내 문이 열리고.

“신부님!”

이사야가 누군갈 보고 환하게 웃었다.

“오, 이사야 형제님! …옆에 그분은?”

“제 친구예요. 제가 졸라서 미사에 데려왔어요.”

“아! 기억하고 있답니다. 전에 말씀하신 적 있던 그분이지요?”

“네!”

신부님이 기억했다는 게 기쁜지 이사야가 그늘 한 점 없이 웃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자 미사를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조금씩 관심을 보였다.

작은 동네에 있는 성당이라 미사 때마다 마주치는 면면들은 모두 익숙한데, 홀로 낯선 얼굴이 튀어나온 탓이었다.

“신부님! 이 형제님은…?”

“이사야 형제님께서 데려오셨습니다. 이사야 형제님께선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이리 몸소 행하시니.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지요.”

다들 찬탄의 시선을 담아 이사야를 보았다. 그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믿는 교리에 대한 믿음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이에서 유는 거북함을 느꼈다.

“형제자매님. 우리는 이사야 형제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 한들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 됩니다.”

늙은 신부가 다가와 유의 손을 감쌌다. 신도들에게는 엄숙하고 자비로워 보이는 그 광경이, 유에겐 광대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형제님. 지금은 주님의 시련에 고통스럽겠지만, 주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늘 이겨낼 수 있는 시련만을 주십니다. 그러니 혼자라고 느껴지시더라도, 늘 주님이 함께하심을 기억하십시오.”

신부의 말에 신자들은 유의 행색을 보았다. 지저분하게 헝클어진 머리, 볼에 난 생채기, 여러 번 빨았는지 헤진 옷감, 온갖 오물이 묻은 운동화까지.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동정이었다.

누군가는 불쌍해했고 누군가는 슬퍼했으며 누군가는 께름칙하게 느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들리지 않았지만, 유는 알 것 같았다.

유의 눈동자가 이사야를 찾았다.

“우리 모두 형제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사야.

유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그러나 작은 속삭임은 이사야에게 닿지 않았다. 이사야는 눈을 감고 시작된 주기도문을 따라 읊었다.

이사야, 이러려고 불렀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기도하는 이들의 얼굴 위로 낯선 남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묻어두었던, 아니, 결국은 묻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 딱한 것. 이제 우리가 네 가족이란다.

가엾은 것을 보듯이, 제가 구원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그렇게 유를 내려다보던 부부.

그 얄팍한 동정으로, 우스운 선민의식으로 바란 적 없던 희망을 쥐여 주고선 감히 제멋대로 빼앗아 갔다.

기어코 그를 나락에 빠트렸다.

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높은 천장이, 깨끗한 바닥이, 단정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제 손을 쥐고 있는 거죽이, 그리고 저곳에서 기도를 올리는 이사야가.

모든 게 그를 기만하고 있었다.

유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들끓었고,

이내 가라앉았다.

유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졌다.

비틀어졌던 눈썹이 펴지고 눈 주변 근육에서 힘이 빠졌다. 악물었던 턱도 이완되었다.

그 변화는 천천히 일어나서, 색이 빠지듯 표정이 사라지는 광경은 오싹한 기분이 들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눈을 감고 기도하는 이사야를 향했다.

기도가 끝날 때까지, 한참을.

* * *

“좋아! 아주 좋아!”

벌써 몇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는 리암을 도현이 조금 질린 눈으로 보았다.

“하하, 도현의 연기가 워낙 좋았잖아요. 좀 더 즐겨요.”

“우리 배우님이랑 내가 만난 건 운명이라니까, 운명?”

로잔나의 말에 도현은 이런 호들갑을 즐기는 건 영영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리암은 상당히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채광도 조명도 완벽했고

연기는 끝내줬다.

리암은 마지막 장면을 돌려 보았다.

[무표정하게 응시한다.]

이 간단한 지문을 가지고 도현은 예술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눈을 감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정 가운데 서서, 홀로 눈을 뜨고 악귀 같은 표정을 짓던 소년이 느릿하게 표정을 지웠다.

눈을 감은 신앙인들은 꼭 하느님의 눈을 피한 것 같다. 소년은 성전의 한가운데서, 주님의 눈을 속이고자 표정을 갈아 끼웠다.

그건 꼭 지옥에서 올라온 사탄이 인간들 몰래 인두겁을 뒤집어쓰는 것처럼 극적이었다.

이내 기도하던 소년이 눈을 뜨고.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크흐! 이거지, 이거!”

어떻게 편집하면 좋을지가 마구 떠올랐다. 주기도문과 어울리는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으로 시작해, 기도가 계속될수록 고조되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소리가 뚝 끊긴다.

관객이 집중해야 할 건 두 소년밖에 없다.

“크흐흑!”

리암이 괴상하게 웃었다.

그들은 리암을 내버려 두고 간식을 먹기로 했다.

부스럭-

봉지에서 종이로 포장된 음식을 들어 올렸다.

“아, 뭐야. 핫도그잖아.”

설탕이 잔뜩 묻은 핫도그를 보고 맥이 얼굴을 구겼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에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핫도그 싫어해요?”

“어. 완전. 세상에서 제일.”

그 말에서 절절한 진심이 묻어났다.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싫어하는 기색이라 도현도 더 묻지 않고 그저 맥의 앞에 있는 핫도그를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눈앞에 끔찍한 것이 사라지자 안정을 되찾은 맥이 다른 것은 없는지 봉지를 뒤적였다.

서로의 곁에 있는 게 익숙해진 둘은 자연스레 같이 시간을 보냈다.

지이잉- 지잉-

테이블 위에 엎어 놓은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렸다.

“아, 내 거예요.”

핸드폰 화면을 켠 도현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니콜라스 가비 : 야야.]

[니콜라스 가비 : 야 뭐 해.]

[잠깐 쉬는 중.]

잠시 고민하던 도현이 카메라 어플을 켰다.

찰칵!

명랑한 효과음에 맥이 의아한 듯이 쳐다보았다.

[(사진)]

[이거 먹고 있어.]

[니콜라스 가비 : OMG!]

[니콜라스 가비 : :O]

[니콜라스 가비 : >:-<]

[니콜라스 가비 : 왜 너만 먹어!]

지잉, 지잉, 징, 징-

이모티콘 테러가 이뤄졌다. 도현이 쉴 새 없이 우는 핸드폰을 붙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 레이시 : 니키.]

[진 레이시 : 수업 중에 뭐 하는 거야.]

[진 레이시 : 선생님한테 이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수업 중일 시간이었다. 수업에 유독 딴짓을 많이 하는 니콜라스가 이번엔 도현에게 문자를 보낸 것 같았다.

니콜라스에게 무어라 타박하던 진은 금세 그와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있었다. 교실에서 몰래 핸드폰을 숨기고 키득거리고 있을 둘의 모습이 상상됐다.

[니콜라스 가비 : 빨리 내일이 됐으면 좋겠다.]

[니콜라스 가비 : 수업 빠지게!]

내일은 니콜라스와 진이 구경 오기로 한 날이었다.

[나도.]

[니콜라스 가비 : 뭐야. 넌 항상 빠지잖아.]

수업을 빠지는 게 기대되는 게 아니라, 둘이 오는 게 기대되는 거였다.

[진 레이시 : 그 전에!]

[진 레이시 : 내일 음악 수행 평가 중간 점검 있는 거 알지?]

[오늘 밤에 연습하고 잘게.]

[니콜라스 가비 : 앗! 깜빡하고 있었다!]

[진 레이시 : :Q]

[진 레이시 : 진짜?]

[니콜라스 가비 : j/k :)]

[진 레이시 : :Q]

이후 이야기는 진이 오늘 지각했다거나, 니콜라스가 문학 시간에 졸다가 선생님한테 혼난 얘기로 이어졌다.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던 도현은 맞은편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엔 맥이 괴상한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어? 아니, 없어.”

아니라고 부정하던 맥이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핸드폰으로 뭘 하는 거야?”

“아. 친구들이랑 대화하고 있었어요.”

“어어… 그래.”

뭔가 이상한 맥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도현은 다시 친구들에게 답장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맥은 얼이 빠졌다.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애였나?’

또래 아이처럼 웃는 모습이 낯설었다. 촬영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평소에 워낙 차분하게 구니까 그게 본래 성격인 줄 알았다.

아니, 본래 성격이 맞긴 하겠지만….

‘뭐야. 나랑 있을 때랑 완전히 다르네.’

맥이 저도 모르게 섭섭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사실 알고 있긴 했다.

애초에 감독님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의 온도 차를 생각하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매일 얼굴을 마주 보고 연기하니까,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이게 무슨 멍청한 꼴이냐.’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리고 동시에 억울했다.

거의 매일 일정 시간을 함께 있고 자연스럽게 대화도 나누는데 친해졌다고 여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맥의 시선이 도현에게 닿았다.

…그래. 쟤는 아니었지.

자신만이 홀로 친밀감을 쌓아왔다는 걸 깨달은 맥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쪽팔렸고.

이상하게 속이 답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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