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6)화 (47/582)

제46화. 무너지는 세계 (10)

리암의 오케이 사인 이후로 촬영장은 조용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 보면 하나같이 도현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미친 연기를 보여줬던 도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혹시 나도 속이고 있어?”

“내가 널 왜 속여?”

도현이 해괴한 소릴 들었다는 듯이 니콜라스를 보았다.

“진짜 아니지?”

“? 당연히 아니지.”

니콜라스는 몇 번의 의심 끝에야 받아들였다. 갑자기 해명의 시간을 가져야 했던 도현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나 진짜 완전 무서웠어!”

진이 엄살을 떨었다.

“뭔가 긴장감이-! 으으! 되게 이상했어. 이사야한테 그 자리에서 벗어나라고 외치고 싶으면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유가 빌런인 건 아는데…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어. 으음. 불쌍하다고 해야 하나? 외면하기 어렵다고 해야 하나?”

풉!

멀리서 듣고 있던 리암이 뿜었다.

‘유가 빌런이라니!’

아니, 물론…. 그렇게 보이긴 했다.

…정말 유가 빌런이었나?

리암이 진지한 고찰에 들어가는 사이,

“맥, 맥! 앞에서 봤을 땐 어땠어요?”

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맥에게 말을 걸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맥이 인상을 팍 찌푸리던 찰나.

“앞에서 연기했잖아요! 안 무서웠어요? 저는 떨려서 말 씹었을 것 같은데, 완전 자연스럽게 연기하던데!”

“…그래?”

“네!”

“뭐,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지기는 해.”

맥이 쿨하게 답했다.

그에 니콜라스가 눈을 빛내며 맥을 보았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지나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 곳에 얌전히 앉아 있는 니콜라스는 도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쿵, 쿵.

살면서 이렇게 심장 소리가 크게 들린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도현이 보여주는 연기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수업시간에 앉아 있는 것도 엉덩이가 배겨서 자꾸 움찔거리는 니콜라스가 몇 시간 내내 집중할 정도였다.

도현의 집중력은 엄청났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도 모자라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놓지 않았고, 촬영이 끝날 때마다 프린트를 돌려 보며 계속해서 보완할 부분을 찾았다.

그에 초반에는 컷이 끝날 때마다 도현에게 쪼르르 달려갔던 진과 니콜라스는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얌전히 있는 중이었다.

활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니콜라스가 답답해할 법도 한데도 너무 조용해서 진이 이상한 눈초리로 볼 정도였다.

니콜라스는 신세계를 접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무언갈 하는 걸 본 적이 있던가?

니콜라스가 기억하기론 없었다.

슬레이트가 내려갈 때마다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몰입하는 도현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몇 번이고 다시 부탁드리며 연기하는 맥. 유쾌하게 그 부탁을 들어주는 리암. 리암의 지시에 맞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여러 사람이 열정적으로 불사르는 모습은 굉장히 중독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들끓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나도 저렇게 몰입하고 싶다.

나도 저렇게 온몸을 던져보고 싶다.

니콜라스의 속에 잠들어 있던 열망이 고개를 들었다.

열정은 전염이 된다.

이 뜨거운 현장에서, 니콜라스는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진이 빠질 정도로 헤엄치고, 헤엄치고….

도저히 팔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물을 가르고 싶었다.

그저 ‘수영이 좋다’에 불과했던 생각이 점차 구체화돼 갔다.

그건 니콜라스의 마음속에 이미 잠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단순히 계기를 만나 발화한 것에 불과했다.

바다를 닮은 초록 눈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내 촬영이 끝나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는 도현을 보던 니콜라스가 단단한 눈빛을 띠었다.

“야.”

니콜라스의 부름에 도현이 의아한 얼굴을 하는데, 니콜라스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수영 선수가 될 거야.”

갑작스러운 선전 포고.

예상치 못했던 내용에 조금 당황스러워하던 도현은 니콜라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안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니콜라스가 시원스럽게 웃었다.

해변에서의 기억이 떠오를 만큼 청량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된 일 같네.’

하루가 멀다 하고 수영장에 가는 니콜라스이니, 충분히 잘해낼 것이다.

아니, 그가 수영을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잘 어울린다.”

“그렇지?”

“그런데 언제부터 그런 걸 생각한 거야?”

“음. 그건 비밀인데?”

쑥스러워진 니콜라스가 괜히 깐족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럽게 니콜라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도현은 문득 진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을 진이었는데, 간간이 맞장구를 치는 게 전부였다.

“진?”

“으, 응?”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던 진이 도현의 부름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피곤해?”

“어? 아니? 나 완전 멀쩡해!”

진이 과장되게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도 의심의 기색이 서리자 눈을 데구르르 굴리던 진이 말을 돌렸다.

“아! 근데 왜 도현은 니키를 니콜라스라고 불러?”

“야. 내 이름 니콜라스거든?”

“니키는 니키야. 다른 건 없어.”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니콜라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을 보고 있었지만, 눈길은 슬깃- 도현을 향해 있었다.

“혹시 니키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진의 짓궂은 질문에 도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아니야!”

“그런데 왜 니키라고 안 불러?”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처음에는 애칭을 부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이름으로 불렀다.

친해지고 나선 갑자기 호칭을 바꿔 부르자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어물쩍 넘기다 보니 지금까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도현이 입을 합 다물고 있자 니콜라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억울했다!

니콜라스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애칭으로 부르면서 왜 나는 이름이야?”

“애칭이라니?”

“진은 지니의 애칭이잖아.”

어리둥절한 도현의 표정을 보던 니콜라스가 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진이 자기 이름을 진이라고 소개했어? 얘 본명 지니 레이시야.”

만난 지 4개월에 접어들어서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도현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진을 보았다.

말을 돌리려다가 돌려받은 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으음, 일부러 속인 건 아니야!”

도현의 안색이 돌아올 기미가 없자 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이름 별로 안 좋아하거든! 그래서 보통 진이라고 소개하고 다녀.”

“왜? 지니라는 이름 예쁜데.”

갑자기 진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런 진을 보던 니콜라스가 대신 설명했다.

“쟤 옆집에 사는 여자애 이름도 지니거든. 그때도 서로 옆집이었는데, 진이랑 지니가 태어난 시기도 비슷해서 자매처럼 자라라고 같은 이름을 지어줬대. 그리고, 뭐. 보다시피.”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자매처럼 자라버렸지.”

“걘 진짜 재수 없는 애야! 진짜, 완전, 짜증 나 죽겠어!”

진이 볼을 부풀리며 씩씩거렸다. 진이 이만큼 화가 난 모습을 처음 본 도현이 조금 놀라운 기분으로 진을 쳐다보았다.

“걔는 세상 사람이 다 자기 발밑에 있는 줄 알아! 자기가 공주인 줄 아나 봐! 아니, 황제 정도 되나 봐!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 침대맡에 인형 하나 놓고 말하면 되잖아? 아니면 사람이 말을 하면 듣든가!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면 짜증만 내고! 그러고선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한테 찡얼거린다고!”

진은 한참이나 말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도현은 본의 아니게 진의 이웃집 지니가 세인트 마리 여학교에 다닌다는 것, 뛰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 머리카락은 절대 묶지 않는다는 것 등등 모르는 사이에 알기에는 과한 정보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소란이 진정되고.

“그래서, 아무튼! 도현도 니키를 니키라고 부르는 게 어때?”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진이 본래의 목적을 되찾았다.

니콜라스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앞으로 그렇게 부를게.”

도현의 대답에 니콜라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닌 척 내심 자신만 정 없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니콜라스였다.

혹시 옛날에 툴툴거렸던 일로 앙금이 쌓여서 그런 건가 고민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기분이 좋아진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럼 너도 애칭으로 불러줄게!”

“나는 그런 거 없는데….”

도현의 대답에 진과 니콜라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칭이 없어?”

“응.”

형은 자신을 꼬맹이라고 불렀으니, 그것이 애칭이라면 애칭이겠지만….

친구들이 부르기에 적당한 애칭은 아닌 것 같았다.

“없긴 왜 없어! 줄리엣 있잖아!”

니콜라스가 비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도현. 너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줄리엣 말고도 더 있어! 스노우화이트, 프린스….”

“그만!”

도현이 기겁해서 진의 입을 막았다.

“우붑, 우부븝?”

“알았으니까, 그만해줘. 알고 싶지 않아.”

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까지 모두 확인한 후 손을 풀어주었다. 애초에 약하게 쥐었지만, 진이 과장해서 푸흐! 숨을 내뱉었다.

“흠. 그럼 내가 지어줄까?”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이 관심을 보였다. 진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합세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은 발음이 너무 어려우니까 빼고… 도… 도… 도오….”

“도도? 두잉? 두잇? 두리안? 도미노? 도미노 피자 맛있는데! 피자 먹고 싶다!”

“도오… 레미파~ 솔라시도~”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둘의 모습에 도현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사이, 니콜라스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어제 니콜라스가 침대 위에서 먹다가 엄마한테 잔소리를 듣게 만든 그것!

“도리토스!”

“……?”

잘못 들었나?

도현이 의문 섞인 표정을 짓는데, 진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도리토스? 와, 좋다! 맛있어 보여!”

니콜라스와 진이 손을 맞잡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도현이 황망한 표정으로 둘을 보다가.

‘이럴 거면 줄리엣이 낫지 않았나? 적어도 사람인데.’

짧게 후회했다.

* * *

“도리토스, 무슨 생각 해?”

운전석 앞좌석 백미러로 보이는 리암의 깐족거리는 얼굴에 도현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나이는 생각하지도 않는지, 도현의 새로운 애칭을 듣고 나서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푸흡, 도리토스, 무슨 생각 하냐니까?”

도현이 한심한 눈으로 리암을 쳐다보았다.

“응? 도리토스 맘에 안 들어?”

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현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 아니야. 마음에 들어.”

어떤 것이든 간에, 친구들이 처음으로 지어준 애칭이었다.

그게 싫을 리가 없었다.

싫어도 좋아야 했다.

“도리토스, 큽, 풉!”

리암은 좀 짜증 났지만 말이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저조해 보였던 맥조차 도현을 보면서 실실 웃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저 차갑고 매정해 보이는 애늙은이의 애칭이 도리토스라니!

엄청난 언밸런스였다.

자신과 차별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친구들한테 꼼짝도 못 하는 모습도 신선했다.

게다가 놀릴 때마다 표정이 슬쩍 슬쩍 굳는데 반응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도현만 괴로운 시간이 지나고.

“자, 도착했다. 도리토스!”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도현이 차에서 내리자 진이 창문을 내렸다.

“오늘 재밌었어! 잘 가!”

“응 너도 잘 들어가. 니키도. 맥도 잘 들어가요.”

“도리토스. 나는?”

“…리암도요.”

리암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리암은 멀어지는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과 니콜라스는 좀 많이 활동적이긴 했지만, 도현의 말처럼 촬영을 방해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과 니콜라스 덕에 오늘 하루 종일 촬영장 내 분위기가 훈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나이 같아 보였지.’

어른스럽거나 발랑 까진 모습만 봤던 리암에게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도현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리암은 제게 이것저것 묻는 진과 니콜라스에 유쾌하게 대답했다.

즐거운 하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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