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직시 (1)
오랜만에 성당이 아닌 곳에서 촬영하게 되었다.
한동안 필요한 장면을 찍을 거라고 들었는데, 성당이 익숙해졌던 도현은 겉보기에도 음침해 보이는 낡은 건물이 낯설었다.
잘도 이런 건물을 구했다 싶었다.
도현이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는데, 한 젊은 남성이 도현에게 다가왔다.
“네가 유 역할을 맡은 애지? 난 조안 역할의 애버리 러시야. 촬영 전에 오늘 맞출 장면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반가워요, 러시 씨.”
애버리가 내민 손을 맞잡은 도현이 물었다.
“무슨 장면 말인가요?”
“씬 27. 조안이 유를 때리는 장면.”
유가 이사야의 손에 이끌려 미사에 참석한 날, 성당에 가기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사 때 유가 겪은 배신감과 관계의 비틀림이 더욱 극대화된다. 또한, 관객이 유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장면이기도 했다.
말을 한 남자가 멋쩍게 귓가를 긁었다.
“아무리 때리는 척만 할 거라지만, 합을 맞춰놓지 않으면 놀라거나 충격받을 수가 있잖아. 그래서 어떻게 움직일 건지 미리 말해주려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애버리는 아무리 때리는 척이라지만, 어린애를 험하게 다룬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유 역할을 맡게 된 배우가 너무 하얗고 말랑거리게 생겨서 더욱 그랬다.
혹시 너무 놀라거나 충격받아서 울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애버리의 표정에 담긴 걱정의 기색을 읽은 도현이 생각했다.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구나.’
도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야 환영이죠. 감사합니다, 러시 씨.”
“딱딱하게 러시 씨는 무슨. 애버리라고 불러! 자 그럼 잠깐 옆으로 가서 장면 연습해 보자.”
애버리는 극 중 조안과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연습하면서 도현은 한 차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착하고 선량해 보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난폭한 마약쟁이가 되어버린 탓이었다.
‘미리 맞춰보길 잘했네.’
도현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알고 보니 애버리 러시는 독립 영화에서 꽤 유명한 배우라고 했다. 리암과 인연이 있어서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이라는 설명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친해 보인다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 준비는 됐어?”
애버리와 도현이 타이밍 맞춰 때리고 맞는 연기를 연습하는데, 불쑥 나타난 리암이 물었다.
“하하, 네. 이 친구가 엄청 능숙하게 연기하네요.”
“그렇지? 내 보물이라니까.”
“그렇게 자랑하실 만도 해요.”
리암의 애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부끄럽긴 했다. 도현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다들 준비 끝났으면 촬영 시작합시다!”
도현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기분 좋게 가슴을 울리는 긴장감에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 * *
“어디….”
오늘도 어김없이 지갑을 터는 데 성공한 소년이 익숙한 손길로 지갑을 열어보았다.
기본적으로 불퉁한 표정이었지만,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기대감은 숨길 수 없었다.
“오.”
도현이 감탄사를 뱉었다.
100달러 지폐 다섯 장.
완전히 횡재였다!
게다가 지갑도 고급스러워 보이니 나중에 가져다 팔면 꽤 짭짤할 것 같았다.
뿌듯한 미소를 짓던 도현의 시선이 신분증이 놓인 곳에 같이 끼워진 가족사진에 닿았다.
순간.
심기가 불편한 듯 도현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유’는 해외 입양아로, 아주 어릴 적 생부모에게 버려지고 고국에서 반강제로 쫓겨나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된 아이였다.
그러나 부부는, ‘유’를 입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가졌고, 동양인인 데다가 입양아인 유는 완전히 그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귀찮은 짐덩어리를 보는 시선과 동생을 볼 때마다 느끼는 비참함을 이기지 못한 유는 가출을 해 제 발로 소매치기 굴로 들어왔고-.
그 부부는 그걸 바라기라도 했다는 듯 ‘유’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가족’이라는 개념에 ‘유’가 가지는 증오심, 모멸감, 비참함, 초탈함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리고 도현은 그 복잡한 감정을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굳은 입꼬리 하나로 표현해 내고 있었다.
“…재수 없게.”
찌이익- 찌익-
가족사진을 꺼내 망설임 없이 찢어버린 도현이 손을 쫙 폈다. 그러자 도현의 손 사이로 찢긴 종잇조각들이 바닥으로 살랑이며 떨어져 내렸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그 모습이 꼭 하얀 깃털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도현이 태연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까매진 하얀 운동화 아래로,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짓밟혔다.
“좋아! 그대로 이어서 다음 씬까지 찍읍시다!”
곧바로 오케이를 받아낸 후 다음 장면이 이어졌다.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도현은 허름한 건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유의 보금자리이자 소매치기들의 쉼터.
끼이익-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이 소름 끼치는 소음을 내고.
도현이 익숙하게 발을 들여놓는데.
“여어- 유.”
느긋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도현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긴장을 담은 도현의 눈이 앞을 향하고.
“오늘 수확은 좀 있었어?”
도현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하필이면…!’
탐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매끈한 지갑을 보는 남자에 도현이 표정을 굳혔다.
“그냥 그렇지, 뭐.”
“그래? 그럼 그거 좀 줘봐. 얼마나 들었나 보게.”
“뭐야, 조안. 나 이번 주 건 다 줬…!”
그때였다.
퍼억-!
애버리의 발길질이 유의 배에 적중하고.
“컥!”
도현이 그 충격으로 배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명치를 잘못 맞았는지 꺽, 꺽 대며 숨을 삼키는 도현.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나, 식은땀이 흐르는 목덜미가 너무 진짜 같아서 애버리는 팔등에 소름이 끼쳤다.
‘발이 허공을 가로지르는 걸 똑똑히 느꼈는데….’
도현이 진짜로 발에 맞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순간 겁에 질렸을 정도였다.
놀란 애버리가 대사를 칠 타이밍을 지나쳐 버렸다.
애버리의 얼굴이 굳으려던 찰나.
몸을 둥글게 웅크렸던 도현이 거칠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번 주는 이미 줬다고….”
배를 부여잡은 와중에도, 독하게 눈을 치켜뜨는 도현의 모습에 애버리가 인상을 와그작- 찌푸렸다.
“이게, 아직도!”
애버리의 발이 다시 한번 유의 배를 걷어차고.
“흐읍!”
도현의 눈가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탁-
힘이 풀린 상처투성이 손에서 검은 지갑이 흘러내렸다.
지갑을 주워든 애버리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유를 툭툭 쳤다.
“처음부터 순순히 주면 맞을 일도 없었잖아?”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지갑을 던졌다 잡으며, 휘파람을 한번 분 애버리가 도현을 지나쳐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 모습이 퍽 산뜻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벌레처럼 지저분한 바닥에 널브러져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던 도현이 서서히 눈을 떴다.
리암이 흡족한 표정으로 컷을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흐!”
갑작스러운 도현의 웃음소리.
가까이서 촬영을 하고 있던 리암이 눈을 크게 떴다.
‘웃는다고…?’
여기서 유는 지갑을 빼앗겨 분해할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웃는다니.
리암이 NG를 내려는 찰나.
“하핫! 큭, 병신.”
도현이 꽉 쥐었던 손바닥을 폈다.
리암의 두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손바닥 안에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100달러짜리 지폐 다섯 장이 쥐어져 있었다.
* * *
컷 소리가 나오지 않자 도현은 조금 걱정이 됐다.
‘애드리브가 마음에 안 들었나?’
원래는 유가 지갑을 전부 빼앗긴다.
그러나 연기를 하다 보니 유라면 이 상황에서 이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곧바로 실천했고….
“…커, 컷!”
리암의 컷 사인이 떨어졌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도현이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아,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리암에게로 몰렸다. 도현도 긴장된 기색을 숨기며 리암을 주시했다.
그리고.
“오케이!”
“하아….”
리암의 오케이 사인에 도현이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경직되어 있었던 어깨도 힘이 빠졌다.
리암의 옆에서 녹음 장치를 들고 있던 로잔나가 물었다.
“왜 그렇게 했어요?”
“네?”
“마지막 부분이요. 왜 그렇게 했는지 알려줄래요?”
로잔나의 질문에 조금 생각을 하던 도현이 대답했다.
“제가 생각한 유는 당하고 살 인물은 아니거든요. 유는 자존심이 강해요. 입양된 집에서도 버티면서 살기보단 박차고 나오길 선택했을 정도로요. 그런 유라면 어떻게든 조안을 엿 먹이려 들지 않았을까요?”
중간에 들어간 과격한 말에 애버리가 헛기침을 하고.
로잔나가 감탄 서린 표정을 지었다.
메소드 연기.
지금까지 로잔나가 봐온 바로는, 도현의 연기는 메소드 연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작중 인물과 싱크로를 최대한 올려서 그 인물이 된 것처럼 연기하는 것.
그렇기에 기술적인 훈련이 덜 된 아마추어 연기자들에게 효과적인 연기법이고 또 선호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메소드 연기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꽤 많았는데, 기술적인 연습이 행해지지 않다 보니 표현이 일관화되기도 하고 과장된 감정 표현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메소드 연기법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연기자 같았다.
방금 그 연기도 분명 계산해서 나온 연기가 아닌, ‘유’와 내면이 연결되어 그것이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난 연기였다.
저 작은 아이가 메소드 연기법을 알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해도, 모르고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도현의 연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은 분명히 있어. …그런데 그런 미숙함마저 압도적인 재능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아니,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져.’
풋풋하기에 설레게 하는 것이 있고 미숙하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로잔나는 도현의 연기를 접하며, 리암이 도현에게 빠진 이유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불안했는데 말이지.’
로잔나가 속으로 웃었다.
리암의 부탁과 설득에 하던 일도 그만두고 영화 제작을 도왔지만··· 마음속엔 늘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아닌지, 그러한 걱정들.
‘쓸데없는 생각이었지.’
로잔나가 도현을 흐뭇하게 보았다.
* * *
한편.
“도현, 배는 괜찮아?”
애버리는 물어보면서도 조금 멋쩍은 기색이었다.
도현이 맞지 않았다는 건 발길질을 한 당사자인 애버리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근데 방금까지 보인 연기가 너무 사실적이어서 괜히 걱정됐다.
“물론이죠. 하나도 안 아픈걸요.”
“하아…. 그러게. 그게 당연한데 내가 중간에 놀라서…. 정말 초보 같은 실수를 했네. 어후, 창피해라. 미안하다. 그리고 도와줘서 고마워.”
“음···.”
도현이 어물거리자 애버리가 웃으며 도현의 어깨를 살짝 툭- 쳤다.
“감사 인사는 받아두는 거야.”
그 장난스러운 말에 도현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애버리와 도현이 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구석에 있던 맥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 촬영할 분량이 없었던 맥은 공부차 참관하러 나왔다. 그 김에 겸사겸사 도현과 작품 얘기도 하고 연기도 맞춰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현은 하루 내내 저 남자랑 연습한답시고 붙어 있었다.
맥이 오늘 도현과 한 대화는 인사가 전부였다!
맥은 사나운 눈초리로 그들을 노려보았고, 도현은 집으로 가는 길에 영문도 모르고 맥의 까칠한 반응을 받아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