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9)화 (50/582)

제49화. 직시 (2)

“여기서는 이렇게 할 거야.”

애버리가 팔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도현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런 애버리의 동작을 보았다.

오늘 찍을 장면은 저번과 비슷한, 일종의 액션 씬이었다.

자칫하면 부상이 있을 수 있는 장면인 만큼 사전 연습이 중요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오는 건 어때요?”

“어? 그러면 진짜로 맞을 수 있어서 안 돼. 위험해.”

“저는 괜찮아요.”

“내가 안 돼.”

애버리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은 장면이 찍히는 것도 중요한데, 안전이 더 중요해. 특히 어린아이는 더더욱!”

애버리의 단호한 표정에 도현은 더 말을 끌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쉽긴 하지만….’

애버리의 말도 맞다는 걸 알기 때문에 별다른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도현은 욕심을 접어두었다. 애버리와 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촬영 위치로 가서 섰다.

리암은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카메라 안에 잡힌 두 배우를 응시했다.

오늘 있을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다.

이사야에게 이끌려 선의 세계에 발을 디디던 유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며 약으로 망가져 가는 조안은 대비되었고, 그런 둘의 미묘한 접점과 갈등은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조안과 유가 마주칠 때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불안한 기류에 전염될 것이고.

유가 이사야를 만날 때마다 마치 그 둘이 얇은 얼음판으로 된 평화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오늘 찍을 장면은 감정이 가장 극에 달하는,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촬영장 내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두 배우를 주시했다.

애버리는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밀릴 순 없지.’

리암이 왜 그리 극찬했는지, 그동안 촬영을 통해 충분히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도현에게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 있다면, 자신에게는 그동안 쌓아온 경험이 있었다.

애버리가 마음을 강하게 먹은 순간.

리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씬 81. 늦은 오후. 이사야를 만나고 돌아오는 유. 자신의 방에 서 있는 조안을 마주친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레디.”

도현의 눈빛이 돌변했다.

“액션!”

* * *

유는 이사야에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사야가 속한 세계는 완벽했다. 온갖 부드럽고 따뜻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는 때론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유는 지쳐가고 있었다.

자신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현실이 무거웠다. 아무렇지 않게 하던 도둑질이 꺼림칙해졌고, 수입이 줄어들었다고 소리치는 조안은 끔찍했다.

제이콥이 한 경고-조안이 마약 범죄에 가담하려고 한다는-에 불안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한때, 갈 곳 없는 유를 거둔 사람이었지만, 이젠 조안과 멀어지고 싶었다.

방문 앞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 유가 긴장으로 바짝 굳은 어깨를 조금 풀었다.

끼릭.

문고리가 돌아가고.

“후우….”

한숨을 내뱉던 순간이었다.

“안녕?”

“!”

탕!

유가 본능적으로 바이올린 가방을 등 뒤로 가져가며 벽에 붙어 섰다. 가방과 벽이 부딪히며 굉음이 났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신의 침대 위에 앉아 있는 한 인영을 발견한 유의 눈이 홉떠졌다.

“조안!”

조안이 태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다녀?”

“그냥 답답해서 산책 좀 했어.”

“그래? 요즘 항상 그러던데.”

그가 히죽- 웃었다.

가방끈을 쥔 손에 식은땀이 고였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 울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이야? 신경 꺼.”

“버릇없는 새끼. 그동안 벌이가 괜찮아서 가만 놔뒀는데… 갈수록 거슬린단 말야!”

조안이 킬킬 웃어댄다. 어조는 순식간에 격양된다.

“거슬려, 거슬린다고! 시발, 요즘 네가 날 무슨 눈으로 보는 줄 알아? 버러지 보듯이 봐! 똥오줌이라도 보는 것처럼 혐오스럽게 쳐다본다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키킥, 우, 웃기는 새애끼! 너는 나랑 다, 다른 줄 알고?”

이미 한차례 약을 한 것 같았는데, 아직 그 기운이 전부 가시지 않았는지 흥분하기 시작하자 말을 조금 더듬었다.

묘하게 흐릿한 눈으로 웃는 조안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아! 그래. 내가 요새 나랑 동업할 애들을 구하는데 말이야! 거기에 너를 넣어도 좋겠다! 꽤 짭짤한 일이 될 거야! 맛있는 것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고 말이야! 배, 배 터지게!”

하학! 조안이 뭐가 그렇게 웃긴지 침대를 내리치며 웃었다.

“네가 배를 터트려서 그 안에 처넣는 거겠지.”

유의 말에 조안이 웃음을 멈추곤 유를 보았다. 얼굴은 금세 짜증으로 물들었다.

“오, 이런. 알고 있었어? 어디서 새어 나간 건지…. 너만 알아? 아니면 또 누가 알아? 아씨, 이러면 구하기 힘들어지는데.”

조안이 투덜거렸다.

화를 내듯이 발을 구른 그가 유를 쳐다보며 질 나쁜 웃음을 지었다.

“친구,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도착할 때까지 살아남으면 넌 부자가 되는 거야! 그렇게 돈을 왕창 벌 기회가 또 있을 것 같아?”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다면, 네가 죽이거나, 죽게 버려두거나, 재활용하거나 셋 중 하나겠지.

유가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꺼져, 약쟁이 새끼야.”

그리고 곧바로 얼굴을 처맞았다.

“너, 넌 자꾸 기어올라서 문제란 말이야!”

유가 얼얼한 볼을 쥐곤 조안을 노려볼 때였다.

“근데 아까부터 뒤에 숨긴 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가 뻣뻣하게 굳었다. 볼에 손을 올린 자세 그대로, 눈만 굴려서 조안을 보았다.

“어? 내가 약을 먹었다고 해서 그것도 안 보일 줄 알았어? 내가 얼마나 잘 보는데! 봐! 네 얼굴에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헛소리를 지껄인 조안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팔을 뻗었다.

탁!

“내 거니까 건들지 마!”

“아니, 아니. 그냥 확인만 한다니까?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더 궁금해지게.”

조안이 비죽- 웃었다.

조안이 가방을 빼앗으려 손을 휘저었고, 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퍼억!

“…이, 개새끼가!”

유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은 조안이 핏발 선 눈으로 유에게 달려들었다.

아차 싶은 표정이 된 유가 바이올린 가방을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대로 폭력이 쏟아져 내렸다.

“흐읍!”

성인 남성의 구타를 받으면서도, 유는 몸을 더욱 옹송그려 바이올린 가방에 충격이 가지 않게 조심했다.

한참을 씩씩대며 발길질을 하던 조안이 거칠게 어깨를 잡아끌었다.

“대체 뭐길래 그렇게 애지중지 아끼는지 좀 보자.”

인정사정없는 구타에 힘이 빠진 유는 속수무책으로 가방을 빼앗겼다. 손아귀에서 가방이 빠져나가려는 찰나.

까득-

상대적으로 멀쩡한 왼팔로 가방끈을 쥔 유가 손에 힘을 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

고통을 견디느라 굳게 다물어진 입술, 식은땀이 흐르는 목덜미, 그러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검은 눈동자.

그 모든 게 유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지 드러내고 있었으나.

퍽!

조안의 발길질 한 번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게 뭐…. 바이올린?”

조안의 두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안 돼.

유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디서 이런 걸 구했어? 돈 꽤 되겠는데? 역시 넌 최고야. 네 배를 가르겠다고 한 건 내 실수였어!”

조안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이올린을 훑어보며 말했다.

바이올린은 안 된다. 조안 따위가 침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유가 분노와 증오로 타오르는 눈으로 조안을 노려보았다.

“그래, 그래. 너 같은 황금 거위를 일회용으로 쓸 수는 없지…. 네가 개같이 구니까 실수할 뻔했잖아!”

흠, 그럼 누구로 채워야 하지. 조안이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너랑 붙어 다니는 새끼 중에 걔 있지? 누구더라… 제, 제… 제이콥! 그래, 그 새끼!”

“제이콥은 건들지 마!”

유는 단 한 번도 이곳에서 만난 이들에게 정을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버려진 몰골로 이곳에 도착했던 제게 경고를 하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짓던 제이콥의 배를 가르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네가 이해해. 세상은 원래 능력이 없으면 도, 도태되는 거야! 가장 쓸모없는 게 버려지는 건 당연한 거지! 왜, 아니면 네가 대신 하려고? 오, 눈물겨워라.”

조안이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유는 조안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숨 막히도록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무 대답 없는 유를 킬킬대며 보던 조안이 바이올린을 황홀하다는 눈빛으로 보며 몇 번 쓰다듬었다.

그러고선 조롱기 어린 눈으로 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깜짝 선물도 받았으니, 난 이만 갈게. …아! 제, 제, 제… 제이콥! 제이콥한테는 비밀이야! 말해서 도망가면 그 자리는 네가 채우는 거야. 알았지?”

가벼운 어투로 협박을 한 조안이 바이올린을 들고 한 걸음 걸어갔다.

그리고 유는.

부릅뜬 눈으로 미동 없이 조안을 보다가.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익숙한 쇠의 촉감이 느껴지고.

싸구려 백열등에 은빛 날이 번쩍이며 선을 그렸다.

“어….”

조안과 유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시이팔, 너, 이….”

물기가 섞여 그륵그륵 끓는 음성.

그러나 조안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새빨간 색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조안은 배를 부여잡고 무너졌고, 유는 그 모습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이내 바닥에 엎어진 조안의 움직임이 멎고.

까맣게 바랜 운동화에 닿는 축축한 물기에 유가 정신을 차렸다.

숨을 멈추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또옥.

똑.

가방 밑에 스며들었던 핏물이 바닥에 점점이 찍혔다.

유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조안의 발을 잡아당겨 침대 밑으로 처넣었다. 그가 끌려간 궤적마다 민달팽이 같은 불쾌한 궤적이 남았다.

‘그것’을 침대 밑에 집어넣은 유가 차분한 손길로 옷장에 들어 있는 옷을 꺼내어 바닥에 던졌다.

천들이 붉은 피를 흡수해서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유가 문고리를 열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방문을 꼼꼼하게 닫았다. 손이 떨려서 몇 번 헛손질해야 했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인 소년은 가여울 정도로 공포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어디로?

* * *

“…컷!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도현이 눈가를 찌푸렸다.

연기가 진행될수록 점차 빨라졌던 심장 박동이 진정되질 않았다.

눈앞에 붉은색이 선명했다.

찌꺼기처럼 남아 달라붙은 유의 감정이 갉작갉작 신경을 긁었다.

‘왜지?’

도현은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안이, 애버리가, 아니, 조안이 죽음을 맞는 순간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보였다.

도현이 다급히 조안, 아니, 애버리를 찾았다.

수건으로 흘린 피를 닦으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래. 살아 있잖아.’

도현은 무의식적으로 안심했다.

“이건 연기야. 연기일 뿐이야.”

과민하게 반응할 일이 아니었다. 도현은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너 뭐야? 너 어디 안 좋아?”

“아, 연기가 조금 마음에 안 들어서요.”

도현이 태연히 거짓말하자, 맥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까 그 연기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대체 눈이 어디에 달려 있는 거야.”

충격적인 순간에 감정을 과장하기보다 오히려 정적으로 표현한 도현의 연기는 놀라웠다.

정신이 나가 영상을 계속 돌려 보고 있는 리암만 봐도 답이 나왔다.

그런데도 도현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재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맥의 오해가 깊어지고.

도현은 자꾸만 보이는 붉은 잔상을 털어냈다. 손을 씻고 와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불쾌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도현은 무심코 손을 문질렀다.

잠에 취해 손을 씻던 맥베스 부인처럼 의미 없이, 강박적으로.

촬영은 금방 재개되었다.

깨끗해져서 돌아온 조안은 몇 번이고 피를 쏟는 연기를 했다.

도현은 카메라를 코앞에 두고, 카메라 앵글 밖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시 연기해야 했다.

연기가 거듭 반복될수록 리암은 유의 불안함이 점점 더 극대화되어 느껴진다며 칭찬했다.

도현은 대답 대신 웃었다.

* * *

“도리토스. 요즘 왜 이리 오래된 도리토스같이 눅눅해?”

니콜라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내가 눅눅해…?”

“응, 공기에 반나절 노출된 도리토스 같아.”

도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냥….”

“그냥, 뭐?”

“아무 일도 없어.”

“흐음.”

니콜라스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을 보았다.

“촬영장에서 누가 괴롭히냐?”

“괴롭히다니. 절대 아니야.”

“그래? 그럼 왜 이러지.”

니콜라스가 수심에 찬 표정을 했다. 그 반응에 도현은 제가 그리 심각했나 되돌아보았다.

“너도 그렇고 진도 그렇고. 요즘 이상해, 진짜!”

“진은 확실히… 고민이 있는 것 같지?”

도현이 걱정스러운 낯을 하자 니콜라스가 볼을 잡아당겼다.

“으우?”

“너는 네 걱정이나 해! 누가 누굴 걱정하고 난리야!”

“으우우?”

“알겠다고? 반성한다고? 그래, 한 번만 봐준다.”

도현은 얼얼한 뺨을 매만졌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코끝을 찡그리는 니콜라스에 속이 간질거렸다.

그래.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져 너무 과하게 불안해하고 있던 건지도 몰랐다.

도현은 오랜만에 맑게 웃었다.

* * *

“오랜만에 나랑 연기하네!”

맥이 은근히 신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도현이 부드럽게 응수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도망쳐 나온 유가 이사야를 만나는 부분이었다.

이사야를 찾기 전에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가, 미사에 참석 중인 이사야를 성당 뒤편에서 기다리는 것까지 촬영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나 잘할 수 있겠지?”

오랜만의 연기라 그런가.

맥이 약한 소리를 했다.

“맥은 잘할 거예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럴 때면 유독 도현에 대한 믿음이 수직 상승하는 맥이었다.

“자, 자. 촬영 시작합시다!”

맥은 심호흡하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은 맥을 처음 만났던 그 장소.

뒷마당에서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좋아. 그럼, 레디… 액션!”

탁!

슬레이트가 내려갔다.

* * *

항상 만나던 시간도 아니면서 이사야를 찾아왔다. 성당에 발을 들이지 않고, 첫날, 바이올린 소리를 따라왔던 그때처럼 뒤편에서 이사야를 기다렸다.

여기에 올 거란 장담도 없으면서.

유가 피 묻은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창문 너머로 어스름한 형체가 보였다.

이윽고 창문이 열리고.

“…유?”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왔다.

이사야가 왔다.

유가 고개를 들었다.

“너 왜 여기… 너 왜 그래?!”

유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은 채였다.

“…샨.”

목을 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쥐어짠 목소리였다.

“샨, 내가, 나는. 아니, 나….”

유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푸르게 질린 뺨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만, 거기 있어! 내가 갈게!”

“아니야!”

새된 비명 같은 외침이었다.

“거기 있어. 거기 있어, 이사야!”

최근에는 항상 샨이라고 부르던 유였다. 이사야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유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제발, 거기 있어….”

파르스름한 입술을 달싹여 애원했다. 이사야와 유가 열린 창 사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사야. 내가 죄를 지었다면, 그러면 나를 포기할 거야?”

“함께한다고 했잖아.”

“함께할 수 없는 죄라면?”

이사야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유가 말을 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듣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런데….

몹시 고통스러운 듯 숨을 몰아쉬면서 덜덜 떠는 모습에 못이 박힌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사야… 이사야. 내가.”

목소리가 형편없이 요동쳤다.

“내가… 죄를 지었어. 이사야, 내가 죄를 지었어.”

그날과 같았다.

유가 이사야를 기만하고자 뱀 같은 혀를 놀렸던 날.

그러나 그날과 달랐다.

“이사야. 내가….”

꿀꺽.

이사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내가…. 제5계명을 어겼어.”

이사야의 숨이 멈췄다. 그제야 이사야의 눈이 유의 바짓단에 닿았다.

점점이 튄 붉은 핏방울.

“내가… 내가…. 제5계명을 어겼어. 나, 난 악마야. 이사야. 난 악마야. 여긴 지옥이야.”

숨이 받쳐 헐떡였다.

메마른 낯이 축축해졌다. 눈물은 식은땀과 구분되지 않았다. 절망에 가득 젖어, 재차 토해냈다.

“지옥 같아.”

* * *

당연하게도 컷은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맥은 더 놀랄 일도 없는데 매번 놀랍게 하는 것도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4살이나 어리면서, 어떻게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 연기를 깊이 있게 해내는 걸까?

늘 그랬지만, 오늘은 진짜로 도현이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연기 도중에 멈춰야 하나 겁이 났을 정도였다.

‘아무튼 대단한 애야.’

그리 생각하며 도현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맥의 눈이 좁혀졌다.

‘…쟤 왜 저래?’

도현은 멈춰 선 자세 그대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까 유처럼….

마치, 진짜로 도현이 숨이 막혀 하는 것 같은….

“야!”

맥이 황급히 도현의 어깨를 잡았다.

“야! 이도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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