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직시 (3)
“야, 너 왜 이래!”
맥이 당황해서 도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도현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머리를 짚었다.
“아….”
어지러운 듯 미간을 꾹꾹 누른 도현이 한번 숨을 쉬더니 천천히 멀쩡한 낯으로 돌아왔다.
“머리 아파? 야, 내 말 들려?”
“…들려요. 괜찮아요.”
“괜찮긴 무슨! 개소리하고 있네!”
맥이 버럭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면서, 손은 어설프게 어깨를 도닥이고 있었다.
어지러움이 가시자, 사고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도현이 맥의 팔을 부드럽게 떼어내며 말했다.
“저 이제 정말 괜찮아요.”
“너 안 괜찮거든?”
맥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때, 상황의 이상함을 깨달은 리암과 로잔나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 도현! 꼬마야! 어디 아파?”
리암이 사색이 되어 도현의 안색을 살폈다.
도현은 괜찮다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리암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냐는 질문에, 아까부터 앵무새처럼 괜찮다고 대답하는 도현을 무시한 맥이 대신 답했다.
“연기할 때도 좀 이상했는데…. 애가 숨을 못 쉬는 것 같았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헐떡이고….”
맥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진정한 로잔나는 스태프들에게 부탁해 담요와 코코아를 가져왔다.
도현은 순식간에 지정석에 앉아 따뜻한 담요에 푹 감싸인 채 코코아를 쥐어야 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코코아를 가만히 손에 쥐고만 있자 맥이 얼굴을 찡그렸다.
“야, 왜 안 마셔?”
“음….”
딱히 무언갈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도현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맥이 초조한 낯으로 재촉했다.
“한 입만 마셔봐. 너 코코아 좋아하잖아.”
도현은 스태프들이 오렌지 주스나 아이스티를 줄 때는 무덤덤하면서, 코코아를 줄 때면 유독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모르고 싶어도 코코아를 마실 때면 유독 얼굴에서 빛이 나니 모르기도 힘들었다.
음료로 매번 코코아가 나오는 건 전적으로 도현의 탓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입에선 자주 초콜릿의 단내가 났다.
아무튼, 그렇게 좋아하는 걸 눈앞에 두고도 시큰둥하니 맥의 애가 닳았다.
“빨리 마셔 보라니까?”
재촉인지 강요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도현이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아릿한 단맛이 혀에 퍼졌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살짝 노곤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한 기색으로 도현을 살펴보던 리암과 로잔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리암의 질문에 도현이 침묵했다.
괜찮다고 말하기엔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맥이 걸렸다.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도현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리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로잔나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잖아요.”
세 사람의 시선이 로잔나에게 모였다.
로잔나가 조심스러운 눈치로 말했다.
“혹시… 과몰입으로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요?”
“!”
리암이 눈을 치떴다.
‘영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니야.’
메소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은 가끔 배역의 감정에 압도되어 실제로 그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거나, 심한 경우에는 성격에 변화가 생기는 케이스도 있었다.
리암의 얼굴이 점차 딱딱해졌다.
저번에도 연기 도중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땐 단순히 우울증이 심해진 건가 싶었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이니만큼, 유가 느끼는 마이너스적인 감정에 취약했을 수도 있어.’
그리 생각하니 전부 이해가 됐다.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한 인과였다.
명백한 그의 실책이었다.
한 번은 실수라지만, 두 번은….
리암이 착잡한 기분에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심지어 맥이 이상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죄책감과 자괴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일단….”
한 박자 쉰 리암이 이어 말했다.
“일단, 오늘 촬영은 여기서 마치기로 하고…. 로지, 혜나 씨한테 연락을 좀…. 이미 하고 있군. 그래, 그럼.”
자신 때문에 촬영을 접는 것 같아 도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녁 시간에는 미사가 있어서 어렵게 촬영 허가를 받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도현.”
“네.”
“미안하다.”
리암에게 사과를 받는 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도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의아할 따름이었다.
“내가 네 상태를 잘 살폈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야.”
우울증에 대해 서혜나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다는 걸 모르는 도현에게 있어서 리암의 태도는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저야말로 죄송해요. 저 때문에 오늘 촬영이 이렇게 끝나서….”
“촬영은 이만하면 충분히 했어. 애초에 네가 촬영 기간을 얼마나 앞당겼는지 알아? 그걸 알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거다.”
리암은 도현을 안심시키기 위해 부러 과장된 태도로 말했다.
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도현이 괜히 안타까워 손바닥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 우리가… 대화할 게 조금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리암이 고개를 들어 로잔나와 맥을 흘깃 쳐다보았다.
로잔나가 맥을 이끌고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두 사람이 소리가 들리지 않을 위치까지 멀어진 걸 확인한 리암이 입을 뗐다.
“혹시 연기하는 게 힘드냐?”
도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불과 얼마 전이라면 화들짝 놀라 아니라고 부정했겠지만-
지금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무의식중에 피로감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도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리암은 침통한 심정이 되었다.
혹여 그가 도현을 밀어붙여서, 도현이 연기에 흥미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어린 천재들이 종종 이러한 이유로 천재성을 잃는다던데….
리암의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불길한 상상에 얼굴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그에 당황한 도현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저, 리암. 괜찮아요?”
“…….”
지금 누가 누구보고 하는 소리지?
리암은 어이가 없는 걸 넘어 머리가 띵해졌다.
도현은 둔한 리암이 눈치챌 만큼, 스스로를 돌보는 데 미숙했다.
리암은 지금 내려야 할 판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아무래도 너한테 필요한 건 휴식 시간인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놀아도 좋고, 네가 하고 싶은 고민을 해도 좋아. 아무튼 넌 쉬어야 해.”
리암이 결론 내렸다.
“…내일 촬영은요?”
도현이 불안감에 묻자.
“촬영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리암이 단호히 대답했다.
도현이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가, 금방 표정을 정리하곤 침착하게 말했다.
“안 돼요.”
오늘 촬영이 미뤄진 것만 해도 충분히 민폐였는데, 여기서 더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내일은 괜찮을 거예요. 내일은 일정대로 촬영하게 해주세요.”
“야, 꼬마야.”
리암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목덜미를 주물렀다.
“너 지금 네 잘못으로 일이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그게 사실이지 않은가.
“허어! 처음엔 알 수 없는 꼬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 탄식 같은 말에 도현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리암이 말을 이었다.
“너 때문이 아니다. 나 때문이야. 배우의 관리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야. 온종일 카메라로 네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건 명백히 내 잘못이다. 여기서 네 잘못이라고 널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없게 만들어줄 의향도 있고.”
마지막 말은 농담인 줄 알았는데, 리암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일단 푹 쉬어라. 너는 너무 잘해 왔으니까. 아, 그래. 쉬는 김에 내일만이 아니라, 이번 주를 휴식 기간으로 잡자. 충전의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하고.”
리암은 자신이 나름대로 부드럽게 달랬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섬세한 어휘를 사용해 본 기억이 적어 낯간지럽기도 했-
“싫어요.”
빠직-
리암의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의 눈이 맞부딪히고.
리암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쉬라고 했다. 총감독은 나야!”
“저는 괜찮다고 했어요. 저는 주연 배우거든요?”
“배우보다 감독이 위야!”
“전 시나리오 공동 저자잖아요!”
“그것도 내 이름이 더 앞에 있다!”
“투자자 아들이고요!”
“그건… 그건!”
리암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도현이 굳었던 얼굴을 풀고 씩- 장난스럽게 웃었다.
연기할 때 분위기를 휙휙 바꾸는 재능이 어디 가진 않는지, 그 조금의 변화로도 짓궂은 남자아이 같은 느낌이 났다.
“리암의 걱정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중간에 흐름을 끊으면 지장이 생길지도 몰라요. 게다가 이번 주에 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도 없잖아요. 이런 리스크를 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리암은 도현이 약았다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차가운 낯으로 말하면 단호히 거절할 텐데, 누그러진 어투로 말하니 무작정 안 된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도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리암이 흔들리는 걸 알았는지, 도현이 못을 박았다.
“저 진짜 괜찮아요. 저를 배려하신 거라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도현의 말에 리암이 지친 기색으로 눈가를 문지르곤 아이 대하듯이 달래는 대신, 최대한 논리적으로 도현을 설득하려 애썼다.
“연기에 너무 몰입해서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성인 배우 중에서도 종종 있어. 그건 조금씩 통제하는 법을 익혀 나가야 하는 문제야.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리고 네가 감정을 통제하기 어려운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너는 놀라울 정도로 집중력과 몰입력이 좋은 반면에, 아직 나이는 어리니까.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가서 쉬어.”
리암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도현이 차분히 반박했다.
“하지만 이번 주를 쉰다고 해결되지 않으면요? 리암도 알잖아요. 언젠가 촬영은 해야 하고, 그럼 이 상황을 다시 전면으로 부딪쳐야 해요. 그저 그 시기가 좀 더 빠르냐, 느리냐의 차이예요.”
사실 이상이 생긴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걱정할 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연기도 촬영도 문제없이 했으니까.
그러니까, 방금까지는 말이다.
“후우… 넌 네 나이를 조금 자각해야 할 필요가 있어. 책임감이 넘쳐도 어느 정도지!”
“어리다고 해서 피해 가는 문제는 없어요.”
단호한 말투였다.
리암은 공원에서 따박따박 대들던 고집불통의 도현을 떠올렸다.
리암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 꼬마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끄응.
리암이 앓는 소리를 내는데 조용히 다가온 로잔나가 핸드폰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사야 단독 씬을 위해 섭외했던 장소 일정을 앞당겼어요.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가능해요.”
“……!”
한 박자 느리게 이해한 리암이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자, 이러면 해결된 거죠?”
로잔나가 여유롭게 웃었다.
* * *
그 후론 일사천리였다.
맥이 촬영할 때 가기로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는 도현의 항변은 모두에게 묵살되었다.
저번과 똑같이 강제 인수인계를 당한 도현은 난관에 봉착했다.
“…….”
“…….”
서혜나와 도현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도현은 문득 불안해졌다.
‘그만두라고 하시면 어떡하지.’
두 번이나 문제가 생겼으니,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서혜나가 꺼낸 얘기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엄마가 달달한 게 너무 먹고 싶어.”
“?”
뜬금없는 말에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래서 지금 마들렌 구울 생각인데, 도와주겠니?”
서혜나의 표정은 아주 태연했다.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닌데…’
곤란한 심정에 말을 고르던 도현은 긴장으로 꾹 쥐인 서혜나의 손을 발견했다.
도현의 시선이 그 손에 조금 길게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같이 만들어요.”
“! 그래! 엄마가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주방으로 내려와.”
긴장으로 말아 쥐었던 손이 이번엔 환호로 꽉 움켜쥐어졌다. 도현은 잠시 이게 그렇게 기뻐할 일인가, 의아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고 때 아닌 쿠킹 클래스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