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52)화 (53/582)

제52화. 직시 (5)

진은 금방 사진을 인화해서 학교에 가져왔다.

다 같이 찍은 사진을 웃으며 보던 도현은, 홀로 있는 사진에서 깜짝 놀랐다.

따뜻한 것에 둘러싸인 것처럼, 달콤한 것을 한가득 먹은 것처럼 누그러진 눈매와 풀린 입가, 옅은 홍조가 올라온 뺨.

형과 함께 있을 때면 늘 짓던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다 같이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은 액자에, 나머진 앨범에 들어갔다.

사진을 본 서혜나가 다음 날 바로 구해 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도현을 놀라게 했던 사진도 액자에 들어갔다. 서혜나의 마음에 쏙 들었던 탓이었다.

줄줄이 세워진 액자들을 보던 도현은 복잡 미묘한 낯이 되었다.

그날, 도현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다.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어쩌면 내리기를 원하지 않는 문제에.

한동안 상념에 사로잡혀 고민하던 도현은 문제를 묻어두고 잠시 외면하기로 했다. 도피인지도 모른다. 아니, 도피가 맞았다.

도현은 대체로 끈질긴 편이었지만, 해결할 수 없는, 또는 제게 불리하게 작용할 문제에 대해선 허무할 정도로 빨리 포기하곤 했다.

그게 제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그것이 없다고 믿는 세 살배기 아이처럼, 그저 모래흙을 덮어놓곤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과 같다고 해도.

그럼에도 도현은 그렇게 했다.

모래흙 아래 묻힌 것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도현은 생각을 돌렸다.

토요일은 코앞이고, 시간은 없었다.

더구나 신이 난 진과 니콜라스가 자꾸 자신을 끌고 다니니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수영 학원에 가는 날이라, 간신히 진의 허락을 맡아 오랜만에 하교 후 집으로 곧장 돌아온 도현이 액자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액자 표면에 작은 온기가 남았다가 사라졌다.

도현은 찬기가 도는 연습실에 들어갔다. 정면의 거울에 선 소년이 도현을 마주 보았다.

도현은 다시 그때의 감정을 떠올렸다.

손에는 이미 굳어버린 핏물이 조금씩 바스라지고 심장은 터져 나갈 듯이 크게 뛴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죄악감과 더불어 나락의 구렁텅이로 기어코 빠지고 말았다는 절망감, 원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두려움….

애정, 기쁨, 믿음, 기대, 희망.

온갖 거짓 같은 단어로 키워냈던 초목과 꽃, 잔디 따위가 폭풍우에 휩쓸려 폐허만 남았다.

그 폐허 위에서 유는 간신히 숨을 붙이고 서 있었다.

잿가루가 폐를 찌를 때면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그것은 이사야를 만났을 때 극대화되었다.

초라하고 볼품없어진, 이제는 그 어떤 손길도 닿지 못할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이는 것이 겁이 났다. 더는 손 내밀어 주지 않을까 봐…. 기어코 경멸당하며 내쳐질까 봐.

그렇게 가장 아름다웠던 계절이 끝이 났음을 선고받을까 봐.

신경이 온통 소년에게 쏠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더욱 격렬히 가슴을 올렸다 내리며 호흡했다.

도현은 마치 유가 된 것처럼 괴로웠다.

눈앞에 붉은 색이 어른거리는 것이 유의 감정인지 자신의 감정인지 구분하기엔 경계선이 흐릿했다….

이런 적이, 이런 적이 분명 있었는데….

도현이 가물거리는 눈으로 과거를 더듬었다.

- 형이 힘든 건 싫어요.

아. 그때.

모든 게 모호하게 느껴지는 혼란스러운 감각이 그때가 시작이었음을 깨닫자 사태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와 형의 감정이 겹쳐진 순간부터였어. 감정 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게.’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은 근원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도현은 자주 불안했고, 또 자주 예민해졌다.

지금도 그랬다.

거울에 비친 소년이 자신인지, 유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 더 그리운 낯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홀린 듯이 거울에 가까워지는데 번쩍이며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뜨는데, 이내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잔뜩 기겁한 목소리였다.

【코코아! 마들렌! 샌드위치! 피크닉! 진! 니키!】

연관성을 알 수 없는 단어의 나열이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구나.

…근데 갑자기 왜?

도현이 의문을 품는데 덩어리가 몸을 부풀렸다가 줄이며 한숨을 쉬는 제스처를 취했다.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진다 싶더니만, 왜 갑자기 자살행위야!】

“자살행위요?”

도현이 당혹스러운 나머지 검은 눈동자를 일그러트렸다. 덩어리가 호되게 호통쳤다.

【네 영혼이 자아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데 그걸 넘기려고 하니까 자살행위지!】

놀란 도현의 눈썹이 크게 휙 휘었다.

그가 살짝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방금 아주 몽롱한 기분에 휩싸였다. 의식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고…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끝나고 안락한 어둠이 온몸을 감쌀 것만 같은….

“헉.”

도현이 헛숨을 쉬었다.

병원에서 발작이 심해지고 심해지다가 이내 정신이 혼몽해졌을 때 으레 느끼던 감각이었다.

“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정돈되지 않은 말이 떨리며 나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제가 연기할 때 과호흡이 와서… 상황을 재연하면 이유를 알까 싶어서….”

【알았다. 알았으니까 숨이나 골라!】

“…네.”

도현은 횡설수설하는 대신 덩어리의 말을 따랐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점차 생기를 찾았다.

숨소리만이 가득 찬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도현이 침착해진 낯으로 말했다.

“일단…. 감사합니다. 그리고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정말 애답지 않은 모습에 덩어리가 속으로 혀를 찼다.

‘처음 만났을 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마 정희성의 자아와 합쳐진 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무의식에 깔려 있다고 하나, 성인의 자아를 지녔으니 아이답지 않을 수밖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임을 알면서도 도현과 어울리는 작은 인간들–진과 니콜라스-을 보고 있자면 괜히 화가 나고 안쓰러웠다.

미성숙한 것이 천천히 커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음이다. 그런데 저 어린 것은 그 과정을 어정쩡하게 넘겨 버렸으니.

아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성인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미숙하다. 몸집만 늘린 어린 개체를 보는 것처럼 기이하게 느껴졌다.

거기다 저 작은 인간은 무엇을 잃었는지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작은 인간이 치러야 할 대가겠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작은 인간을 보다가 음성에 힘을 실었다.

【너도 알겠지만, 네 무의식에는 정희성의 자아가 가라앉아 있다. 네 무의식 전반에 영향을 미치지만, 가라앉아 있어서 네가 일부러 상기하거나 기억이 촉발될 계기를 만나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아. 드러난다고 해도 기억과 감정, 경험을 넘겨받는 정도지. 방금 네가 겪은 일은, 이를테면 부작용이다.】

덩어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빛이 산란하듯 퍼지며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영혼은 곧 ‘기’고 이 기가 성질을 가져서 이룬 게 영혼이야. 그런데 네 영혼은 지금 두 가지 성질이 섞여 있거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 시간을 네가 얌전히 못 넘기는구나. 두 성질이 존재하는 와중에 네 스스로 네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니 영혼을 이루는 기가 순간적으로 헷갈려 한 거야.】

“저인지… 형인지요?”

【그래.】

도현이 몇 번 입술을 달싹이며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살피던 덩어리가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의심에 덧붙여 설명했다.

【네가 주도권을 넘긴다고 해서 정희성이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야. 이미 산산조각이 나 네게 섞여 든 영혼이다. 남은 건 그 잔재와 사념에 불과해. 만약 네가 주도권을 넘긴다고 해도, 결국 네 육신은 네 영혼을 담기 위해 있는 그릇이다. 잘못된 영혼과 육신이 만나면 파멸밖에 없지. 그건 너도 잘 알 텐데?】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매가리 없는 표정에 덩어리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결국… 로잔나의 말이 맞았네요.”

과몰입 때문에 생긴 문제 같다던 로잔나.

과도한 몰입으로 형의 기억과 감정이 쏟아져 내렸고, 그로 인해 세 자아가 마구 뒤섞여 영향을 끼쳤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연기가 문제였다.

“제가 연기를 시작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요?”

【하? 네가?】

덩어리가 기가 차다는 듯이 쯧, 혀를 찼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가 어떻게 연기를 안 해?】

생각보다 더 단호하고 시큰둥한 말투였다. 그에 도현의 머리가 조금 기울자,

【네 영혼을 완전에 가깝게 만들었던 재능이다. 그건 네 영혼에도 육신에도 이미 스며들어 있어. 생각해 보니 더 어이가 없군. 왜 그 재능이 연기였을 것이라 생각해? 아니, 생각해 본 적이 있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문제였다.

표정만 봐도 알겠는지 빙글빙글 돌며 높이 둥둥 떠 있던 덩어리가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도현과 눈을 맞추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네 삶, 네 경험, 네 감정, 네 바람이 강력하게 이끌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게 아니야. 다른 누구도 아니라 네가 선택한 거야, 너의 재능은. 정희성도 마찬가지였지.】

내가 선택한 것….

【그런 너희들이 그걸 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아? 바라고 바란 끝에, 재능조차 순리로 만든 너희가? 턱도 없지. 정희성이 결국 바이올린을 든 것처럼.】

“하지만 형이 바이올린을 놓지 못한 건 저 때문이었어요.”

그것 때문에 형의 수명이 줄어들었다. 도현은 그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잊은 적도 없었다.

【그게 정희성의 순리였다.】

일종의 진리를 얘기해 주듯이 어딘가 아득하며 지극히 덤덤한 어투였다. 도현은 덩어리가 초월적인 존재임을 실감했다.

【결국 정희성을 바이올린으로 인도한 건, 그가 가진 순리였어. 굳이 네가 부추기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론 바이올린을 들었을 거야.】

덩어리의 말은 도현을 옥죄던 죄책감을 흩트렸다.

문득,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거대한 운명의 탓으로 돌리면 숨통이 트였다. 한없이 의지하고 싶어졌다. 도현도 결국 나약한 개인이었다.

순리. 도현이 덩어리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그러니 불가능한 일에 만약을 논하려고 들지 마. 그만큼 어리석은 시간 낭비도 없으니까.】

‘불가능한 거였구나.’

도현은 딱 한 가지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여전히 리암의 질문에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연기는 도현에게 있어서 늘 즐거움이고 새로움이었는데, 최근 연기는 그를 힘들게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단순히 힘든 일이라면 그만두고 싶을 텐데….

답은 간단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모든 일이 항상 기쁨만을 줄 수는 없으니까.

연기는 결국 도현의 일부분이었다. 영혼의, 육체의, 삶의 일부였기에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인정하고 나자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도현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함께할 수밖에 없다면, 함께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지금 상태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걱정하니까’라는 동기가 ‘연기 자체를 위해서’로 변한 순간이었다.

“덩어리 님.”

잠깐 시선을 내리깔았던 도현이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뭘 말이냐? 내가 이리 자주 나타나 만만하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본질이 조율자라서 순리에 어긋나는 도움은 주지 못해.】

“그냥 저를 지켜봐 주시다가… 방금처럼 위험한 상황이 오면 정신을 차리도록 도움을 주시는 정도도 어려울까요?”

【그 정도라면 문제는 없겠구나.】

도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너나 정희성이나…. 조율자 무서운 줄 모르고 이것저것 잘도 바라는구나.】

새침하게 말한 덩어리가 도현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빛나는 공이 안착했다.

거울로 후광이 나는 제 머리통을 보다가, 그게 허락의 의미임을 알아챈 도현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감사합니다, 머리 위에 있는 덩어리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도현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놀이’라고 칭하며 자주 했을 만큼 연기는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렇게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결 방법 따윈 몰랐다. 도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바로.

【정신줄 제대로 안 붙잡냐, 작은 인간아!】

“…허억, 네! 고맙습니다!”

될 때까지 시도하는 것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무식한 짓이냐고 덩어리가 혀를 끌끌 찼지만, 반복될수록 점점 효과가 눈에 보였다.

일 분도 채 안 돼서 정수리에서 짜릿한 전류를 느꼈던 게, 삼 분, 오 분, 십 분…. 조금씩이나마 텀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사이.

도현은 조금씩 감을 잡아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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