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직시 (6)
도현은 집중력과 몰입력이 뛰어났다. 천재의 영역에 가까운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가상의 인물을 만들기 때문에 더욱 몰입이 쉬운 탓도 있었다.
과호흡이 올 만큼 상태가 나빠진 건 여러모로 재능 넘치는 도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정도가 되기까지 감정에 몰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도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정신 차려야지, 정신 차려야지 하면서도 연기만 시작하면 속절없이 배역의 감정에 빨려 들어가고 마는 탓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끈질겼다.
정수리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덩어리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희성이 죽고 빌빌대며 우울해하는 모습만 봐왔던 터라 모르고 있었는데, 이 작은 인간은 꽤 단단한 영혼을 지닌 것 같았다.
‘불완전한 영혼으로 8년간 살면서 자아가 붕괴하지 않은 것도 웬만해선 어려운 일이었지.’
덩어리는 새삼 깨달았다.
28년을 버틴 인간이 있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쪽도 대단한 경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덩어리는, 도현이 꽤 오랫동안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호…?’
덩어리는 영혼이 보였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처음과 비교해서, 영혼을 이룬 기의 흐름이 눈에 띄게 안정적으로 변했다.
무슨 헛짓거리를 하나 싶었는데, 나름의 효과를 거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도현도 느끼고 있었다.
연기엔 집중할 땐 오로지 그것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었는데, 어느 기점부터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충돌하는 자아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아를 뚜렷하게 인식하려다 보니, 자아가 독립하는 기이한 현상이 생겨난 것이다.
아직은 아주 흐릿한 정도였지만, 연기에 몰입하면서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다른 자아에 휩쓸리려고 할 때 제동을 거는 게 느껴졌다.
마치 사고를 두 개로 나눈 것 같았다.
두 대의 컴퓨터가 동시에 일하는 것 같은, 병렬적으로 연결된 뇌가 머리에 두 개 있는 것 같은 신기하고도 기묘한 감각이었다.
도현이 굉장히 특수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기현상이었다.
“하, 하아.”
도현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완전히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정신이 흔들리기 전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멈출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계속 연기한 게 도움이 되었는지, 점차 배역에 빨려 들어가는 것 자체에 익숙해졌다.
익숙해졌음은 곧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괜찮은 성과였다.
숨을 돌린 도현이 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씻어야겠네.’
그리 생각하며 창가로 고개를 돌린 도현은 또다시 놀랐다.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언제 이렇게 어두워졌지?”
도현의 혼잣말에 거기에 있는 것도 어느새 까먹었던 덩어리가 둥둥 떠올라 창문 앞에 자리했다.
【아까 인간 하나도 여기 들어왔다 나갔는데, 그건 알고 있었냐?】
“엄마가요?”
도현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밖에서 계속 서성이고 있더라. 이건 알아서 해라. 이제 끝난 것 같으니까 나는 간다!】
기지개를 켜듯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덩어리가, 작은 빛 조각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도현은 곧장 문을 열었다.
복도에 기대어 서 있던 서혜나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방금 온 척했다.
“어, 도현아. 연습은 다 했어?”
“…언제부터 여기 서 계셨어요?”
“서 있다니? 도현이 아직도 연습실에 있나 해서 방금 올라온 거야.”
도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더 묻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저녁은 드셨어요?”
“아니, 엄마는 아직 안 먹었어. 도현이는? 많이 늦었는데 배 안 고파?”
도현은 문장 사이에 숨긴 말을 쉽게 알아챘다. 티를 내진 않았다.
“…저 지금 씻을 생각인데, 저 씻고 나오면… 혹시 같이 저녁 드실래요?”
주춤주춤 내뱉은 말에 서혜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래. 저녁 안 먹으면 배고파서 잠도 잘 안 와. 그럼 씻고 내려와. 엄마는 밑에 있을게!”
도현은 방으로 돌아가서 깨끗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주방으로 내려가니 서혜나가 얼른 와서 앉으라며 반겼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일부러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걸로 했어.”
도현은 감자 수프를 떠먹었다.
늦은 식사였지만, 속을 따뜻하게 덥히는 수프가 감칠맛 나게 혀에 달라붙었다.
“매번 이렇게 밥 차려주시는 거 힘드시지 않으세요?”
서혜나가 매끼를 챙겨줄 때마다 도현은 감사하면서도 불편했다.
서혜나가 하루 내내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도현을 학교에 데려다주면 바로 회사에 갔다가 도현이 하교하는 시간보다 늦게 돌아왔다.
물론, 최근엔 도현이 촬영하느라 서혜나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질 때가 많았지만….
그렇기에 얼마나 피곤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하면서 자신을 챙기기까지 하면 얼마나 힘들까?
한 번도 당연히 여겨본 적 없었지만, 최근 들어 유독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한테는 이게 휴식이고 힐링인데?”
도현이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며 서혜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서혜나는 거짓 한 점 없는 진실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난 8년간 챙겨주지 못했던, 아니, 챙겨주지 않았던 아들이었다. 이제라도 이렇게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하늘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손수 만든 음식을 편식 한번 안 하고 맛있게 먹는 아들을 보고 있자면, 이게 자식 키우는 재미구나 싶었다.
“네가 잘 먹는 게 얼마나 보기 좋은데.”
도현은 서혜나의 말에, 얼마 전 마들렌을 잘도 먹던 진과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아.
도현은 수긍했다.
도현이 느끼는 불편함과 별개로, 그게 엄마의 기쁨이라면 말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게 모자는 오순도순 저녁을 먹고, 시간이 늦었으니 소화해야 한다는 서혜나의 주장에 따라 잠자리에 들기 전 집 마당을 몇 바퀴 돌며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높게 뜬 달 아래 엄마와 하는 산책은 평화로웠고 잔잔했다.
엄마는 주로 도현에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도현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달빛 탓일까.
묻고 답하는 게 자연스러워지자, 도현은 무심코 얘기를 꺼냈다.
“문제를 조금 해결한 것 같아요.”
“그거 정말이니?”
두서없이 꺼낸 말에도 곧잘 이해한 서혜나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눈을 둥글게 접으며 웃는 얼굴에 도현은 홀린 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서혜나는 전처럼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고, 그저 도현이 하는 말에 맞장구치다가 되묻길 반복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상당히 행복해 보였다.
손뼉까지 치며 축하하는 모습에, 단순히 ‘연기에 방해되는 골칫거리를 해결했다’ 정도의 심정이 은근한 뿌듯함과 성취감으로 물들었다.
도현의 어깨가 좀 들썩이는 것을 본 서혜나는 귀여움에 웃음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두 모자 사이의 공기가 말랑하게 풀린 밤이었다.
* * *
진과 니콜라스가 이끄는 대로 놀러 가고, 남은 시간엔 컨트롤하는 연습을 하다 보니 토요일은 금방 찾아왔다.
오늘은 조금 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왜냐하면….
“도현아. 준비 다 했니?”
“네.”
서혜나와 도현은 나란히 차에 탑승했다. 오늘은 리암의 차가 아닌 엄마의 차를 타고 촬영지까지 가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설명하자면 산책을 하던 날 밤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날, 서혜나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타 은근슬쩍 물었다.
- 혹시 엄마도 촬영장에 같이 가도 될까?
전번에도 들은 적 있는 질문이었다. 당시 도현은, 엄마가 자신 때문에 괜히 촬영까지 신경 쓰게 될까 봐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 반응을 거리낌으로 이해한 서혜나가 풀이 죽은 채로 괜찮다며 화제를 돌렸었다.
그 후 처음으로 물은 질문이었다.
진과 니콜라스도 견학을 다녀간 마당에, 도현의 보호자인 그녀가 촬영장에 오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은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서혜나는 상당히 기뻐했다.
그리고 오늘.
리암에게 미리 엄마와 같이 간다는 말을 전한 도현은 전달받은 위치로 서혜나의 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근데 왜 성당이 아니지?’
도현은 의아했다.
촬영 장소에 도착한 도현은 위치를 전달받고 품었던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여럿이 등장하는 장면을 뒤로 미뤄뒀었지? 오늘은 그 장면들 찍을 거다.”
혹여나 도현의 상태가 회복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대비한 리암의 배려였다.
도현은 오늘따라 낯선 얼굴의 또래가 많은 이유를 깨달았다.
리암의 소개에 따라 도현은 또래 배우들과 인사를 나눴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애가 한 명, 뭔가 불편해 보이는 애가 한 명, 한없이 밝아 보이는 애가 한 명 있었다.
전부 도현이 아는 얼굴이었다. 이사야 오디션에서 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가워! 난 할리 하펜이야!”
할리가 해맑은 얼굴로 인사했다. 제이콥 역할을 맡은 탓에 조금 지저분하게 분장했는데, 그래서인가 꼬질꼬질해 보였다.
자신을 브라운이라 소개한 한 명은 도현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할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소곤거렸다.
“저어기! 무서워 보이는 사람이 이사야 역할이래!”
물론 도현은 알고 있었다.
도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 ‘무서운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흐익!”
할리가 깜짝 놀라 다른 애들 사이로 숨어들었고 도현은 태연히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맥.”
“잘 쉬다 왔냐?”
아이들이 모인 쪽을 흘깃 본 맥이 도현의 어깰 친근하게 툭- 쳤다.
“네. 맥은 촬영 어땠어요?”
“음….”
이번에 처음으로 도현 없이 연기를 해본 맥이었다.
맥의 부모님 역할을 맡았던 배우분들은 도현보다 능숙하고 여유로운 연기를 보여 주었지만….
“너랑 하는 게 더 재밌어.”
도현과 연기할 땐 마치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쪽으로 끌려갈 것 같은 긴장감이 있었다.
일주일 동안 얻은 배움과 별개로, 역시 도현과 하는 게 스릴이 남달랐다.
이상한 취향이 생겨버린 맥이었다.
“아. 오늘 엄마랑 같이 왔어요. 인사할래요?”
“어어…. 그으래.”
어른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평범한 13살 맥은 조금 떨떠름히 대답했다.
그리고 서혜나와 인사를 나눈 맥은 도현의 부티 나는 외모가 어디서 온 건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모전자전이군.’
유전자 단위부터 우월한 것 같았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함을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한쪽에선.
“쟤가 왜 주연이야?”
브라운이 투덜거렸다.
오디션에 떨어졌던 브라운은 실패의 속상함을 도현에 대한 질시로 돌렸다. 막상 떨어진 건 이사야 역할이었으나….
저 멀리서 시선을 눈치챈 맥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저 사람은 좀.
자연스럽게 분노의 화살은 도현에게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오디션 때 심사위원석에 있던 것도 기분 나빴다.
“왜?”
할리가 의아해하자 브라운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애 같이 생겼잖아. 저게 무슨 연기야.”
“여자애같이 생긴 게 연기랑 무슨 상관인데?”
정말로 궁금했던 할리가 해맑게 물었다. 브라운은 말문이 막혔다.
“비…리비리해서 제대로 대사나 치겠냐?”
“…그런가?”
할리가 고개를 갸웃했고 브라운이 아무튼 내 말이 맞다며 우겼다.
“자, 촬영 시작합시다!”
멀리서 리암이 외쳤다. 떠들던 두 아이와 아무래도 상관없던 한 아이가 조르르 로잔나가 알려주는 위치에 가서 섰다.
서혜나와 맥과 대화를 나누던 도현도 준비를 마치고.
“레디, 액션!”
며칠 만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유!”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아이들이 아는 척을 했다.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설렁설렁 걸어온 도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할리는 신기했다. 단순한 동작인데, 아까 인사할 때랑 성격이 전혀 달라 보였다.
그때 브라운이 할리를 거칠게 밀쳤다. 합의되지 않은 행동에 할리가 당황해 고개를 드는데, 브라운이 비웃는 얼굴로 낄낄댔다.
“야. 오늘 얘 짭새한테 걸렸어.”
“뭐?”
도현의 미간이 단박에 구겨졌다.
사납게 일그러진 눈으로 할리를 노려보았다.
“그럼 왜 여기 있는데?”
“놔… 놔줬어.”
“짭새가?”
“지갑 주인이….”
할리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날 선 눈으로 쳐다보는 도현은 마치 얼굴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한심하다’와 ‘짜증 난다’, 그리고 ‘한 대 칠까…’ 이런 감정이 얼굴에 어른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컷! 오케이!”
짧은 촬영은 금방 오케이를 받았다.
“우리 꼬마 배우들 멋진데?”
리암이 아이들을 추켜세웠다.
애드리브까지 지적을 받지 않고 성공시킨 브라운은 콧대가 높아졌다.
“내가 더 연기 잘하는 것 같은데?”
브라운이 잘난 척을 했다.
할리가 속으로 소심하게 딴지를 걸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