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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54)화 (55/582)

제54화. 직시 (7)

리암은 아역들의 사기를 저하시키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애늙은이 같은 도현이나, 딱 봐도 기 세 보이는 맥이 특이한 경우지, 아역은 감정 조절이 잘 되지 않아 촬영 도중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도 잦고 컨디션에 크게 구애받기 때문이었다.

“얘 손잡고 설교를 하더라니까? 하느님을 믿으라는 둥, 어쩌라는 둥. 쟨 도망도 못 치고 붙잡혀서 빌빌대더라. 한심한 새끼!”

퉷!

브라운이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컷! NG!”

브라운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리암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왜요? 괜찮았는데.”

“거기서 침을 뱉지 말고, 지문 그대로 가자.”

소매치기 굴의 아이들은 범죄 집단이었지만, 동네 건달은 아니었다.

오히려 먹고살 방법이 없어 여기저기서 모인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방금 브라운의 연기는 질 나쁜 문제아처럼 보였다.

“에이…. 내가 한 게 더 나은데.”

브라운이 작게 구시렁댔다.

다음 테이크에서 브라운이 리암의 말을 따라 연기하자, 리암은 오케이 사인과 함께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는 칭찬을 날려주었다.

브라운이 은근히 우월감에 찬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쟤는 칭찬도 별로 안 받는 것 같은데. 내가 주연 맡아야 했던 거 아냐?’

연기는 뭐,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특별할 것도 없어 보였다.

브라운이 이런저런 애드리브를 넣어서 연기하는 반면, 도현은 성실하게 지문 그대로 연기했다.

그게 브라운의 눈에는 심심한 연기로 보였다.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브라운의 착각에 불과했다.

아들의 연기를 처음 보는 서혜나의 경우.

그녀는 어째서 리암이 도현 때문에 시나리오를 새로 써야 했는지, 어째서 자신과 계약서를 쓰기 위해 만났을 때 그렇게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지 실시간으로 깨닫는 중이었다.

도현의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치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들 사이에 배역 그 자체인 인물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과몰입으로 문제가 생겼다고 했나.’

이걸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도현은 ‘유’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으니까.

브라운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촬영이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흐른 후였다.

그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쟤 한 번도 NG를 안 내지 않았나?’

자꾸만 칭찬이 이어져서 제대로 인지를 못 하고 있었지만, 브라운은 상당히 많은 NG를 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브라운은 계속 도현을 흘끔댔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사람이 있었다.

“쟤는 왜 자꾸 널 쳐다봐?”

맥이 브라운의 뒤통수를 보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음…. 글쎄요.”

의기양양했다가, 주춤했다가, 노려보다가, 의기소침했다가, 혼란스러워한다.

도현도 브라운이 대체 무슨 이유로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쟤가 뭐. 너한테 시비 거는 건 아니지?”

맥의 말에 도현이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맥이 눈썹을 휙 꺾으며 불만을 표했다.

“뭐, 뭐! 왜 날 보는데!”

“…아니에요.”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그런 적 없어요.”

“만약 시비 걸면 가만히 있으면 안 돼. 만만하게 보이면 더 귀찮게 군다?”

맥의 말에 도현이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을 보다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걸 어떻게 하지’ 정도의 표정인 것 같았다.

잔소리가 또 시작되기 전에 도현이 은근슬쩍 몸을 뺐다.

‘맥은 은근히 잔소리가 많으니까.’

맥은 도현이 사라진 자리를 어이없는 기색으로 노려보다가, 곧 시선을 브라운에게로 옮겼다.

쟤가 저 모양이니 자신이 신경을 써야 했다.

브라운은 거세진 눈길에 식은땀을 흘렸다.

‘왜, 왜 자꾸 노려보는 거야!’

딱히 눈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뺨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 연기 진짜 잘하더라!”

아까 자신과 같이 욕할 땐 언제고-그런 적 없다- 쪼르르 달려가서 알랑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찼다.

주연한테 잘 보일 심산으로 그런 것 같았는데, 그 칭찬을 진심인 줄 착각했는지 우쭐거리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속으로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브라운은 겉으로 조금도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찌릿!

도현에게 시선이 갈라치면 귀신같이 따라붙는 저 눈길 탓이었다.

그러다 보니 브라운의 촬영 분량이 전부 끝났다.

애초에 엑스트라여서 등장 장면도 많지 않았다.

브라운은 괜히 옆에 앉은 윌리에게 허세를 부렸다.

“야, 촬영도 별거 없지 않냐?”

“뭐… 그렇네.”

대사도 한두 마디가 전부였고, 오디션에 지원한 것도 호기심에 불과했던 윌리가 성의 없이 답했다.

잠시 후.

한차례 장소 이동이 있었다.

윌리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먼저 떠났고, 브라운은 괜한 오기에 오늘 촬영이 끝날 때까지 구경하기로 했다.

아무도 관심을 안 주니, 그대로 떠나면 뭔가 지는 것 같았다.

브라운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팔짱을 꼈다.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그리고.

“레디, 액션!”

브라운은 도현이 연기하는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지켜보았다.

* * *

끼익.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유가 눈을 날카롭게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어 안심하고 발을 들여놓던 찰나.

탁!

주방에서 불이 켜졌다.

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으며 긴장했음을 드러내는데-

“유?”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콥이었다.

유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몸에 힘을 풀었다.

“하아… 놀랐네.”

“너 요새 자꾸 어딜 다니는 거야?”

“여기 박혀 있어봤자 할 것도 없잖아.”

“그래도… 한동안은 너무 돌아다니지 마.”

“왜?”

“너 그거 몰라?”

“뭘?”

유가 답답하다는 듯이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제이콥이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보다가 유에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춰 빠르게 속삭였다.

“요즘 조안이 마약 유통까지 손을 뻗으려고 하잖아. 샌디가 그러는데, 조안이 약 구할 돈이 부족해서 아예 중간 자리를 차지해서 도중에 빼돌리려는 속셈이래. 눈에 거슬리면 널 포켓보이로 쓸지도 몰라.”

그 약쟁이 새끼가 기어코 일을 벌이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재수가 없으려니, 생각하고 몸을 사리면 될 일이지만….

유는 어쩐지 명치가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그러니까 조심해. 너 요즘 눈에 띄잖아. 그리고 수금도 좀 줄지 않았어?”

제이콥의 말이 맞았다.

정확히는 이사야에게 바이올린을 건네받은 이후부터.

분수를 모르고 주제넘은 것을 탐한 대가인지, 소년은 더는 예전처럼 아무 가책 없이 도둑질하기 어려웠다.

머뭇거리다 보니 실패할 때가 왕왕 생겼다.

성당에 있을 때면 모든 게 완벽하게 느껴졌는데, 벗어나는 순간 현실이 소년을 짓눌렀다.

소년은 벌레만큼 미약하기 그지없어, 그저 이리저리 휘둘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이콥이 대답을 종용하듯이 유를 쳐다보았다. 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목이 졸리는 듯, 억지로 쥐어 짜낸 소리는 뚝뚝 끊기다, 맥없이 흩어졌다.

* * *

“우와아…….”

컷 소리가 나고 정확히 세 번째로 흘러나온 감탄사였다.

도현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할리가 부담스러웠다.

“칫, 꽤 하네.”

부릅뜬 눈으로 노려본다 싶더니, 칭찬하는 브라운도 당황스러웠다.

브라운은 마치 ‘그다지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관대한 내가 특별히 인정해 준다’라는 것 같은 태도였다.

브라운이 갑자기 도현에게 가까이 가길래, 시비 털려는 건가 싶어서 허겁지겁 달려왔던 맥은 맥이 탁- 풀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쟤도 어린애였지.’

13살이나 먹은 맥이 9살인 브라운을 보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맥을 슬금, 보곤 고개를 돌려 작게 웃었다.

그 후론.

“있잖아, 넌 학교 어디 다녀?”

“야야, 너 이거 봤어?”

촬영장은 거의 도현 쟁탈전이었다.

제 나름의 인정을 끝낸 브라운은 솔직하게 도현에게 호기심을 드러냈고.

할리는 처음부터 강아지처럼 도현을 따라다녔는데, 눈이 초롱초롱 반짝거리는 게 이젠 거의 동경의 수준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에 맥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게 아닌데?’

물론 이들이 도현을 싫어하길 바란 건 아니었다.

브라운이 혹시라도 악의를 품을까 봐 계속 감시했던 맥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갑자기 태도를 바꿔 버리더니, 도현을 졸졸 쫓아다녔다.

정말 의외로, 도현은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데려온 애들도 그렇고….’

성격이 남달라 친구나 제대로 사귀나 내심 걱정했던 맥은 완전히 쓸모없는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건 그거였고.

“야! 도리! 나 초콜릿 가져왔어!”

적어도 촬영장 내에서, 도현과 가장 친한 건 맥, 자신이었다!

자신이 도현과 친해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사과한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밤에 이불을 찼다!

맥이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직은 13살인 맥이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사이가 좋네요.”

로잔나가 건넨 말에 서혜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도현에게서 떼지 못한 채였다.

엄마라는 콩깍지를 떼고도, ‘혹시 내 아들은 천재가 아닐까?’ 싶었던 연기도 놀라웠지만….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또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더욱 인상 깊었다.

도현의 학교생활을 줄리아에게 전해 듣고 있긴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현은 제 눈에만 예뻐 보이는 게 아닌지 아이들은 도현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촬영장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도현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도현이 저번에 보인 모습 탓일 수도 있었지만….

도현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따스한 온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정말, 도현은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대체 왜….

이어진 생각에 서혜나는 가슴이 지끈- 아파왔고.

이제야 자신의 권리를 누리는 듯한 도현의 모습에 깊이 안도했다.

“아! 혹시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이 순간을 남겨야만 했다!

조급해진 서혜나가 로잔나를 쳐다보자, 로잔나가 웃으며 흔쾌히 허락했다.

서혜나가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들었다.

찰칵!

사진은 도현이의 귀여움을 절반도 담아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볼을 깨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를 가져올걸…!’

서혜나는 깊이 후회하며 핸드폰으로 연신 촬영 버튼을 눌렀다.

서혜나의 갤러리에 가득 찬 사진은 그날 곧바로 메일을 타고 국경을 넘어갔다.

한국에서 메일을 받은 이장혁은 사진을 받고 한동안 심장을 쥐고 책상을 내리쳐야만 했다.

* * *

원래 촬영이 끝나는 시간엔 모두가 홀가분한 얼굴로 인사를 나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가기 싫어어!”

브라운의 엄마는 상당히 고된 눈치였다.

브라운이 집에 가기 싫다며 떼를 쓰는 탓이었다.

할리라고 상황이 좋진 않았다.

“우리 다음에도 볼 수 있어? 나 촬영장에 또 와도 되나? 안 되려나? 그럼 학교에 놀러 갈까? 아, 나도 학교 가지…. 우웅, 그럼 언제 만나지?”

다시 만나는 게 확정인 것처럼 말하는 할리에, 도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들과 이리 친해진 건가 의문이었다.

“내일 만나서 놀래? 나 집에 재밌는 게임기 있는데!”

“나는 내일 촬영이 있어서….”

“아, 맞다. 그랬지!”

할리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그럼 언제 만나야 하지?”

옆에서 푸근하게 웃으며 보고 있던 할리의 할아버지가 할리를 타일렀다.

“전화번호도 교환했으니 연락하면 되지 않니.”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주 온화하고 신사적이어서, 할리의 티 없이 맑은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으응…. 아쉬운데….”

할리가 미적거릴 때였다. 생떼를 부리며 엄마를 곤란하게 하던 브라운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너네 집에 있는 게임기 뭔데?”

“응? 스타펄 Z!”

“스타펄 Z? 나 그거 갖고 싶었는데!”

“그래? 그럼 내일 우리 집에 와서 같이 할래?”

“어! 갈래! 할래!”

곧 아이들은 신이 나 시시덕거렸다.

브라운의 엄마는 한숨 돌렸다는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할리의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내일은 맛있는 파이를 구워야겠다고 말했다.

“내일 같이 게임하면 재밌을 텐데…. 다음엔 꼭 같이 하자!”

“내가 게임 후기 남겨줄게!”

할리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인사를 남겼고, 브라운은 그저 게임할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원래 저렇게 빨리빨리 친해지는 걸까?’

도현은 조금 신기한 심정으로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옆에서 맥은 드디어 갔다, 하며 지친 숨을 뱉었다.

뭔가 많은 게 폭풍처럼 지나간 하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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