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직시 (8)
촬영이 끝난 귀갓길이었다.
- 앞으로 주말엔 이렇게 같이 와도 될까?
운전하던 서혜나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물었다. 어투는 담담했지만, 힐긋 곁눈질한 시선에는 은근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도현은 말없이 시선을 깔았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죄송해요.
담백한 거절이었다.
서혜나의 손이 운전대에서 살짝 미끄러졌다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도현이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뒷말을 이었다.
- 보고 계시니까 조금 의식하게 되더라고요. 잘하고 있나 신경 쓰이기도 하고요.
내가 싫은 건 아니구나 싶어서 조금 안심한 서혜나가 알았다고 말하며 연하게 웃었다.
‘우리 아들이 부끄럼을 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귀엽다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도현은 그녀의 반응을 살펴보다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의 시선이 창 너머로 향했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도로가 휙휙 지나갔다. 도현은 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다만 서혜나가 생각한 것처럼 부끄러워서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안일했어.’
도현은 자신의 무신경함을 탓했다.
촬영 사이에 있던 휴식 시간에, 도현은 엄마와 얼굴이 마주쳤다.
그리고 놀란 그녀의 얼굴에서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맥베스 부인을 연기하자 놀람을 넘어 불안까지 느꼈던 형.
도현은 자연스레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유’는 극단적이고 예민한 캐릭터였다. 거기다가 처해 있는 상황조차 부정적이었다.
만약, 오늘 예정대로 지난번 장면을 이어서 찍었다면?
어떤 반응이 되돌아올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반응이 썩 긍정적이진 않았을 것만은 분명했다.
엄마가 불안해하면 리암도 편히 촬영하지는 못할 테고 그건 촬영장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거절하는 게 맞았다.
맞는데….
조금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도현은 살짝 눈을 굴려 서혜나의 안색을 확인했다.
차가 도로를 달리고 달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도현은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현! 준비됐어?”
도현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생각에 빠져 구겨졌던 눈썹을 살살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상념을 몰아내려 부러 힘차게 대답했다.
그동안 몇 가지 일들로 인해 나중으로 미뤄두었던 촬영은 이미 모두 끝났다. 본격적인 클라이맥스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잘하자!’
도현이 속으로 기합을 넣었다.
리암이 염려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현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는 의미로 옅게 미소 지었지만, 리암의 미간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걱정하고 있음을 알지만, 도현은 빨리 연기하고 싶어서 간지러울 지경이었다.
걱정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도현을 주시했다.
부담감을 느낄 법한데도 도현은 차분하게 숨을 고르며 맥을 응시했다.
검은 눈과 푸른 눈이 교차하고.
슬레이트가 내려갔다.
* * *
유의 고해 직후.
이사야는 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의아스러웠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사, 살인을 저질렀다는 거야?”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며 간절히 응시했다.
푸른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연약하게 일렁이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칼로… 칼로 찔렀어. 내가 칼로 배를 찔렀는데… 피가 많이 났어. 나한테 욕을 하는데 입에서 피가 나서…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유는 숨을 뱉듯이 띄엄띄엄 말했다.
쉰 소리가 섞였고 문맥이 매끄럽지 않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유가 제5계명을 범했다.
유의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물기 없이 메마른 채였다. 유가 눈가를 벅벅 문지르자, 손에 남아 있던 피가 묻어났다.
눈과 볼을 따라 군데군데 묻은 피는 피눈물처럼 보였다.
유는 그의 말대로 지옥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어떻게 유를 탓하겠는가.
이사야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지금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이사야는 도망치지 않았다.
“왜… 그랬어?”
“나는… 모르겠어, 이사야. 조안이 바이올린을 뺏어가서… 아니, 조안이 제이콥을 데려가겠다고 해서… 아니야. 모르겠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유는 표현할 수 없는 혼란을 겪는 것 같았다. 도저히 해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혼란을.
“조안이 바이올린을 만지는 게 싫었어. 그 손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래서 그런 걸까? 그게 내 진심이었을까? 모르겠어. 내가 왜 그랬을까.”
유는 반복해서 중얼댔다.
이사야는 문득 이 상황이 너무나 낯설고 버겁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유를 처음 만났다.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는 오후에, 잔디가 형광등을 켠 듯이 반짝이던 시간에 만난 앳된 소년은 그가 붙잡기도 전에 휑하니 사라졌다.
그래서 더 오기가 생겼다.
소년은 야생 동물 같았다. 낯선 호의를 경계하고, 들어오라고 해도 굳이 몰래 훔쳐 듣는, 사나운 눈빛을 가진 야생 동물.
처음엔 호기심이었던 것이 기어코 일상에 비집고 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시간이면 은근히 창가로 시선이 흘러갔다.
혹시 또 와 있을까, 하는 기대가 이사야의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해져 있던 소년의 세계에서 유는 기꺼운 변수로 작용했다.
외벽에 기대어 서 있던 소년이 경계를 넘고 안으로 들어와 햇빛에 나른하게 졸 때면 소년 또한 충족감을 느꼈다.
그 충족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유가 방황함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상처가 늘어나서 오는 이유가 도둑질하던 횟수가 줄어들어서란 것을 알곤 더 묻지 않았다. 조안이 이상하다며, 불안을 말해왔을 때도 겉껍질 같은 위로로 상황을 모면했다.
이 시간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비겁한 욕심이었다.
그 욕심 끝에 무엇이 있었나.
태양을 두르고 있던 소년은 어둠에 감싸여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이사야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서러워져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유는 횡설수설 말했지만, 이사야는 금방 전후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째서 유가 벼랑 끝까지 몰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이사야가 더듬더듬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야.”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누가··· 누가 널 탓하겠어.”
적어도 난 못 해.
이사야가 뒷말을 삼켰다.
검은 눈동자에서 차오른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곧 눈물은 소낙비처럼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뺨에 묻은 피와 섞여 내리는 눈물이 잔디를 적셨다.
* * *
도현은 그간 참았던 걸 전부 풀어낼 것처럼 연기에 빠져들었다.
리암은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의문을 가졌다.
리암도 메소드 연기를 하면서 감정에 잡아먹힌 배우를 몇 들어본 적이 있었다.
수면 장애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실제로 수면 장애에 시달려 다크서클을 달고 다니기도 했고, 상대역과 싸우는 장면에서 감정이 격해져 진심으로 주먹을 날린 배우는 유명했다.
앞선 배우는 영화가 끝난 뒤로 수면치료센터에서 치료를 받았고, 후자는 그 후로도 감정이 격해지는 연기를 할 때면 문제를 일으켜 영화계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이 소린 즉, 몰입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성인 배우조차 쉽지 않다는 말이었다.
리암이 그러한 의문을 담아 묻자, 도현은 몹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덤덤히 답했다.
“계속하다 보니 괜찮아지더라고요.”
이거 귀찮아서 대충 대답한 거 아냐?
이러한 의미를 담아 눈을 가늘게 뜨자, 도현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빛을 역으로 보냈다.
“진짜로?”
“네.”
처음에는 꼬박꼬박 대답해 주던 도현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질문에 그냥 그의 말을 무시했다.
역시 은근히 성질 나쁜 꼬마!
리암은 잠깐 씩씩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정말로 연기를 계속해서 괜찮아졌다면 그 배우는 소송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냥 원래 성격이 개같은 건가?’
그는 조금 헷갈렸다.
저를 무시하는 도현을 앞에 두고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곰곰이 고민하던 리암은 결국 ‘도현이 도현했다’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리 생각하니 그렇게 단순 명쾌하고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안심할 순 없지.’
리암도 학습 능력이란 게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방심하지 않고 도현을 주시했고, 틈만 나면 휴식 시간을 가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그에 도현은.
‘내가 제동을 걸 일이 없네.’
대본을 넘겨 보며 태평하게 생각했다.
문제가 생기면 멈출 요량이었는데, 생기기도 전에 리암이 자꾸 휴식을 선언한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지만.
뭔가 미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무슨 배부른 생각이람.’
도현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짧게 웃곤 다시 대본을 보았다.
* * *
도현은 완벽하게 일상을 되찾았다.
낮에는 학교에서 진과 니콜라스와 놀고, 오후엔 촬영했다.
달라진 것이라곤 가끔씩 게임 리뷰를 보내는 브라운과 기습적으로 문자를 보내는 할리뿐이었다.
도현은 도시락을 찍어 보낸 할리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뒤를 돌아 발소리를 죽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도현의 뒤에 맥이 자리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소년들이 내린 선택은 다소 충동적이었으며, 어찌 보면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불안과 절망을 모두 토해내고 나자, 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단 한 가지 생각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유가 꺼낸 말은 단순했다.
치워야 해.
흐린 눈을 하고선 분명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기실 그것이 비현실적이거나 무모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슬럼가에서는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간다. 병으로, 매독으로, 자살로, 살인으로.
어차피 그들 대부분이 연고도 없이 밑바닥을 굴러다니는 인간이었다. 누군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이 일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발견되지만 않는다면, 혹은 분명한 타살의 흔적을 남기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잊힐 것이다.
죄를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소년은 또다시 죄를 짓기를 택했다.
끼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쥐의 비명처럼 가냘프게 울렸다.
도현은 눈만 데굴, 굴려 건물 안을 확인했다. 주방까지 꼼꼼히 살피고 나서야, 뒤를 돌아 맥을 향해 손짓했다.
맥이 도현을 놓칠세라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꽉 쥔 양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버린 지 오래였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음식 찌꺼기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도둑 쥐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그들은 지금 행동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정답을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바지 곳곳에 피가 묻은 소년과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숨소리를 낮췄다. 긴장으로 인해 목은 뻣뻣해진 채였다.
방의 문고리를 쥔 채로 도현이 작게 속삭이듯 말을 뱉었다.
“너는 여기 있어.”
어스름한 빛이 도현의 얼굴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맥의 눈에 어둠에 반쯤 먹힌 도현의 얼굴이 비쳤다.
가려진 얼굴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살인을 후회하고 있을지, 이사야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지, 혹은 그 외의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
그러나 채 알아채기도 전에 도현은 고개를 돌린다. 이젠 완전히 어둠에 먹혀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유의 감정에 대한 작은 의문과 의심이 피어올랐다가, 찝찝함을 남기고 사라진다.
장면이 넘어갔다.
도현의 눈에 온갖 감정이 타올랐다.
그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된 채였다.
카메라 앵글은 오로지 도현의 얼굴만을 확대하고 있어서, 도현이 무엇을 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맥이 도현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시선을 따라간다.
카메라의 앵글 또한 도현의 시선을 따라 바닥에 닿았다.
카메라에 비친 것은 침대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손이었다.
“살아 있었어.”
도현의 미약한 음성이 확신을 더한다.
“내가 나갈 때까지 살아 있었어.”
무언가 꾸역꾸역 눌러 담은 것을 가까스로 내뱉듯, 힘겨운 어조였다.
이사야는 그렇게 약해 보이는 유를 처음 보았다.
그 또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에 휩싸인 이가 눈앞에 있으니 찬물로 머리를 적신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맥이 도현의 어깨를 강한 힘으로 붙잡았다.
“괜찮아.”
유가 또 겁에 질린 얼굴로 이사야를 보았다.
이미 이사야는 유에게 여러 번 말했다.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너의 죄는 내가 함께할 거라고. 나는 아직도 네게 증명하고 있다고.
그러나 유는 이사야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여전히 유는 불안 속에서 떨고 있었다.
이사야는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주어 유를 어린아이 달래듯이 부드럽게 도닥였다.
주제넘는 짓이다.
과도한 책임감이고 감당 못 할 의무감이다.
그 모든 걸 알면서도 너의 고통을 나누고자 한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다.
“유, 기억해?”
잔떨림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 말이야. 그때 내가 카인은 죄를 지어 추방당하는 벌을 받았지만, 다른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표식을 받았다고 했잖아.”
유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하느님께선 왜 표식을 내려 주셨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하던 이사야가 있었다.
온화했던 기억이 퍼져 나가자 두려움이 조금 마비되었다.
“사실 재미있는 해석이 하나 있어. 내가 본 소설책에서는 카인의 표식이 강함의 증명이라고 했어. 카인은 저를 둘러싼 세계를 부수고 나와 운명을 개척한 인물이라고. 나는 그게 너무 이상했어.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
신부님이 들었다면 사탄의 해석이라 경을 칠지도 몰랐지만, 그러한 것은 유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이미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났다.
“유. 교리에 새겨진 선도, 악도 떠올리지 마. 나는 이제 네게 증명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는 내게 고해하지 마.”
이사야의 말에 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이사야도 유에게 시선을 맞췄다.
“너는 그저 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거야. 거기엔 아무런 증명도, 고해도 필요 없어.”
이사야는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질서를 망설임 없이 부숴버렸다.
검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가, 이내 누그러졌다.
격한 감정에 일그러진 것 같기도 하고 눈이 부셔서 찡그린 것 같기도 했다.
유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침묵으로 긍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