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56)화 (57/582)

제56화. 직시 (9)

리암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과거의 기억을 꺼냈다.

한적하고 황량한 공원이었다.

계절은 겨울이었지만, 쌀쌀한 날씨와 초라한 풍경에 유독 낙엽이 진 가을이 떠올랐다.

덩그러니 놓인 벤치가 전부인 그곳에서 치열한 불꽃이 튀었다. 휑한 공원은 그들의 격한 음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유가 살인을 저지르고 난 다음 장면을 얘기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다가, 도현이 툭 말을 뱉었다.

- 결국엔 자신의 운명을 직접 선택한다는 거잖아요.

리암이 긍정했다. 작중에서 유와 이사야는 여러 차례, 운명을 뒤바꿀 선택 앞에 서게 된다.

모든 이야기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전부, 철저히 그들이 선택한 결과였다. 기실 그들은 몇 번이고 최악까지 치닫지 않을 기회가 있었다.

- 모든 게 자신의 선택이라면, 그걸 책임지는 것도 자신이겠죠. 둘의 삶은 오롯이 본인의 것인데, 그 부분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요.

- 흠, 그러면?

- 혹시 <데미안>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본 적 있어요?

도현은 시나리오를 보고 생각이 났다며, 신이 나 눈을 반짝이며 설명했다.

도현이 꺼낸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리암은.

- 너는… 너는 천재가 틀림없다!

크게 경탄하며 곧장 그에 대해 이야길 떠들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틀이 잡혀갔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장면이었다.

동시에 영화를 관통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방금 찍은 장면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리암은 흐흐흐 하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헤벌쭉해진 얼굴에 로잔나가 ‘또 저런다’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로잔나가 보기에도 퍽 괜찮은 장면이 나온 탓이었다.

“자, 자. 기뻐하는 건 좀 미루고 마저 촬영해야죠.”

“큼, 크음. 그렇지.”

오늘은 할 수 있는 장면까지 최대한 돌려보는 게 목표였다.

리암은 히죽거리는 입매를 진정시키며 다시 카메라 앞에 섰다.

맥과 도현은 시체를 이불보로 감싸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시늉만 하는 이유는, 카메라가 오로지 그들의 발만 찍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껏 죽인 발소리와 이불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엇박자로 갈리는 숨소리만이 적막을 갈랐다.

“컷!”

리암이 손을 휘저었다.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이불 안에 사람 크기의 마네킹을 놓고 헐렁하게 묶었다.

아무리 마네킹이라고 하나, 아이들에게 이런 걸 시키는 게 꺼림칙했던 로잔나가 제안한 부분이었다.

덕분에 맥과 도현은 시늉만 하고 실제론 스태프들이 도와주었다.

도현과 맥은 그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준비 사인을 보내는 리암에 호기심을 거두고 다시 배역에 집중했다.

* * *

직. 지익.

천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유는 슬쩍 시선을 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의미 없는 행위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일어나길 바라는 걸까?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걸까?

복잡한 감정이 교차한다.

계단을 내려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두 아이는 묵묵히 짐을 옮겼다.

한 층의 계단만을 남겨둔 순간이었다.

탕, 탕!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조안! 조안!”

탕! 탕!

발로 차며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지저분한 욕설과 침 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자락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그거 데려온다며! 이 병신 새끼 또 약 처먹고 정신 못 차리고 있냐?”

쾅!

발로 문을 찼는지, 낡은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동요를 숨기지 못하던 이사야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헉!”

천이 손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갔다.

유가 다급히 손아귀에 힘을 주고 이사야가 헐레벌떡 팔을 뻗었지만.

텅! 터덩!

결국, 큰 소리를 내며 굴러떨어졌다.

무언가 해볼 시간도 없이 문이 활짝 열렸고, 그 앞에 서 있는 어스름한 인형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남성은 계단 위에 멍청히 서 있는 두 아이를 보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뭐야, 시발” 욕설을 내뱉다가, 굴러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두 눈이 경악으로 벌어졌다.

“컷! 잠깐!”

리암이 한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에 손을 분장한 애버리가 바람처럼 나타나, 주섬주섬 마네킹을 치우고선 그 자리에 누웠다.

굴러떨어지며 팔 한 짝이 튀어나온 마네킹처럼, 정확히 같은 각도로 팔을 뻗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현이 손을 들어 입가를 내리눌렀다.

‘위험했어.’

심각한 상황인데 애버리의 등장이 너무 뜬금없어서 웃음이 삐져나올 뻔했다.

몰입이 깨질 수도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맥과 갱 단원 역할을 맡은 배우들도 큼, 헛기침 소리를 내며 저마다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Fuck! 이게 뭐야!”

남자의 격양된 어조가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이에 위층에서도 작은 말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한다.

방황하던 푸른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가 맞닿은 찰나였다.

유가 즉시 이사야의 손목을 쥐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갑작스레 달려드는 두 아이에 당황한 남자들이 어정쩡하게 길을 비켜섰다.

뒤이어 남자의 황망한 시선이 따라온다.

그러나 저 당황이 살기등등하게 변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새끼들 잡아!”

그들을 뒤쫓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진 건 추격전이었다.

남자들이 뒤에서 저마다 욕설과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저, 저 사람들 누구야?”

“우즈!”

이사야는 못 알아들은 기색이었다. 유는 이를 갈며 말했다.

“이 동네에서 제일 더러운 갱단! 조안이 최근에 어울리던 무리야!”

흡, 이사야가 숨을 삼켰다.

유는 미칠 지경이었다. 유는 우즈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소매치기로 살면서 모를 수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심기를 거스른 고아를 봐주지 않을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봐주긴커녕, 곧바로 총구멍을 내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부모가 있는 유복한 집 자식은 건들기 부담스러워하겠지만, 저들 중 이사야가 고아가 아니란 걸 누가 알 것인가?

고급스러운 옷의 질감을 발견하기엔 사위가 너무 어두웠다.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손목을 붙잡힌 이사야가 휘청이는 게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을 잘못 디딘 것이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두 아이의 손이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로 간 거 다 알아!”

뒤따라오는 소리에 다시 붙잡을 새도 없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

.

.

한참 달리던 그들은 골목길에 딱 붙어 서서 숨을 죽였다. 골목길 앞에 남자들이 어슬렁거렸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긴장감이 폐를 조였다.

유와 이사야가 더욱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이사야는 두려워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그들 위로 일렁이던 성인 남성들의 그림자가 천천히 멀어졌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확인한 유가 입을 뗐다.

“미안해.”

잘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너는 나 같은 거랑 엮이면 안 됐어, 이사야.”

담백한 문장이었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복잡했다.

자기혐오, 죄책감, 죄악감, 후회, 한탄…. 그 저변에 두려움과 나약함이 깔려 있었다.

유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침묵했다.

얇은 얼음장 같던 고요는 이사야의 목소리에 깨져 나갔다.

“내 탓이야, 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유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이사야가 어둠을 등지고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가 창백하게 굳은 낯으로 물었다.

이사야는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 단단한 얼굴을 하고선 눌러 담았던 속내를 드러냈다.

“내가 널 성당에 불러들였으니까.”

유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 되었고, 이사야는 심장에 납덩이를 단 듯이 버거워졌다.

이사야는 알고 있었다.

경계심 많던 소년은 그저 성당 외벽에 기대어 서서 새어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를 끌어들여 무저갱 같은 혼란 속에 던져 넣은 건 자신이었다.

그가 하느님의 품을 바라게 된 것도, 그리하여 번뇌하게 된 것도, 끝끝내 지옥 같은 현실이 그를 절망에 밀어 넣은 것도.

전부….

“내가 시작이었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아니라, 네가 날 만나면 안 됐어, 유.”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면 유를 변화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이사야는 그것을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 유의 죄는 소년의 죄였다.

이사야가 진심으로 서러워 아파했다. 소년의 얼굴에 애정으로 인한 설움이 묻어났다.

그리고 유는.

불가해한 것을 맞닥뜨린 것처럼 어설프고 낯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난….”

입술을 달싹이다가 멈춘다.

선한 본성과 강박적으로 규율을 지키는 성격 탓에 극도로 자기희생적인 성향을 띤 것일 테다. 때론 자신만큼이나 이사야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릴 때가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사야에게 증명을 강요한 순간부터 소년의 사고 체계는 오작동을 일으켰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은, 그걸 깨달아 이사야가 자신을 떠나가길 원치 않은 탓이었다.

* * *

“컷! 오케이!”

“하아….”

오케이 소리가 나자마자, 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이 몰아치는 장면인데다가, 열심히 달렸더니 체력과 정신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은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고 있었다.

“진짜… 추격 장면 힘들었다. 후우!”

“애버리가 이불속에 들어갈 때 웃음 참는 게 더 힘들지 않았어요?”

“아… 그거, 크큭!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하, 진짜 눈물 나올 뻔했어.”

“이 자식들이! 나는 진지하게 연기했는데 웃겼단 말이야?”

애버리가 짐짓 화난 척을 했다.

하지만 도현과 맥은 불가항력이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마네킹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들어가 곱게 눕는데, 꼭 블랙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하루 동안 원 테이크 촬영도 하고, 뛰어다니기까지 하며 온갖 고생을 한 배우들이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리암은 맥에게 뜨뜻한 시선을 보냈다.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도현이나, 손 하나 나오는 게 전부인데도 정말 시체처럼 미동 없이 가만히 있었던 애버리의 연기도 좋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을 꼽자면 맥이었다.

맥의 성장은 원 테이크와 마지막 장면에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맥의 연기가 많이 늘었네요.”

같은 것을 느꼈는지, 로잔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첫날 대사 치는 거 보고 내가 잘못 생각했나 싶었는데.”

리암이 유쾌하게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맥은 그의 모험이고 욕심이었다.

그러나 맥은 보란 듯이 성장했고, 그건 어딘가 사람을 감동받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거란 건 알죠?”

“…알지.”

로잔나는 맥에게 이사야 역을 맡기는 것을 반대했었다.

우격다짐과 고집과 설득 끝에 리암이 밀어붙였지만….

운이 좋아 최선의 상황이 나왔지만, 최악의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을 불러 놓고는 온통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일을 벌이니….

로잔나가 잠깐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가, 고개를 털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맥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얼마나 골치가 아팠든 잘 끝났으니, 결국 해피 엔딩이었다.

* * *

촬영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이 끝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더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하나 더.

요즘 도현에게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야! 도리! 쟤 오늘도 상태 별로야.”

“그런 것 같아.”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콜라스와 도현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향한 곳은, 생각에 잠긴 듯한 진이었다.

둘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왜 그렇게 날 열렬히 쳐다봐? 그렇게 예뻐?”

“웩. 더러워.”

“…싸우자고?”

이게 문제였다.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진은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러면 니콜라스는 그것을 덥썩 물고 마는 것이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니콜라스와 잡히면 이등분을 해버리겠다고 외치며 달리는 진의 모습을 보던 도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모습은 또 평소랑 같은데.’

도현이 책상에 팔을 괴곤 두 사람의 레이스를 관전했다.

우뚝.

진이 갑자기 멈춰 섰다.

격렬한 움직임에 휘날리던 금발이 얌전히 가라앉았다.

니콜라스와 도현이 의아해하던 순간이었다.

“니키! 선생님이 교실에서 뛰지 말라고 했잖니!”

니콜라스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뒤늦게 눈치챈 죄로 줄리아 선생님께 붙잡혀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니키도 참. 교실에서 뛰면 안 되지.”

여유롭게 의자에 앉은 진이 새침한 표정과 달리 다분히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니콜라스가 억울하단 눈빛을 잔뜩 쏴댔다. 간절한 눈망울이 도현을 향했지만, 도현은 웃음을 꾹 삼키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줄리아에게 혼나고 있는 니콜라스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진은,

“불쌍한 니키.”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퍽 진정성 없는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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