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직시 (11)
리암은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세 아이를 반겼다.
정말로 마지막이 다가오니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된 탓이었다.
리암의 심정을 모르는 아이들은 저마다 신이 나서 조잘재잘 떠들며 깔깔댔다.
그에 감상의 시간에서 빠르게 빠져나온 리암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차 문을 열어주었다.
자연스럽게 탑승한 진과 니콜라스를 뒤따라 도현도 차에 올라탔다.
뭔가 평소와 다른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도현은, 늘 반겨주던 인사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현의 시선이 자연히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맥에게 향했다.
“맥, 안녕하세요.”
도현이 먼저 인사하자, 진지한 표정으로 대본을 보며 고개를 주억이고 있던 맥이 눈을 힐끔 들어 올렸다.
“어, 안녕.”
“안녕하세요!”
“어, 안녕.”
시크하게 인사를 받아준 맥이 다시 시나리오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와 달리 꼰 다리, 고민하느라 턱을 살짝 가린 손등.
대본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두 눈이 더없이 진중했다.
그런 맥의 모습을 보고 니콜라스가 소리 없이 감탄했다. 몇 살 차이 안 나는데 꼭 어른 같았다.
니콜라스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이 났다.
도현의 뺨이 잠시 파르르 떨렸다.
오늘따라 도로 위를 미적지근하게 달리던 차가 멈추고.
촬영장에 도착한 네 사람이 자동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진과 니콜라스는.
“못 본 사이에 더 귀여워졌네!”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과자 많은데!”
스태프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그들 중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진은 자연스럽게 귀여운 척을 했고, 니콜라스는 맡겨 두기라도 한 것처럼 주전부리를 얻어먹었다.
‘저쪽은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네.’
도현은 픽 웃으며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전날, 삑사리가 나 도중에 그만두었던 촬영은 한 번에 오케이를 받고 끝냈다.
맥은 완전히 기가 질렸다.
웃긴 실수를 저질러서 쟤도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잔뜩 이를 갈았는지 평소보다 배로 무시무시해져서 돌아온 탓이었다.
한이 서린 듯 한층 처절해진 연기를 보며 맥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러나 맥도 이젠 경험이 꽤 쌓였다. 첫 촬영 때처럼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려 엉망인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맥이 영화를 찍으며 익힌 것 중 가장 특별한 것을 고르자면.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데? 눈에 아주 독기가 서렸어! 준비는 다 됐어?”
“네!”
바로 긴장과 두려움을 호승심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작업에서만큼은 자신 있었다.
맥은 발전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마지막 촬영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이로써 맥의 출연 분량은 모두 끝이 나고, 리암이 수고했다는 의미로 맥의 어깨를 두들겼다.
맥이 약간 울컥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감사하다고 작게 중얼거렸다.
성공적으로 촬영을 마친 것을 기뻐하기도 잠시.
아역 배우의 촬영이라 시간이 늦어지면 다음 날로 촬영을 넘겨야 했기 때문에 축하를 미뤄두기로 했다.
한껏 진지해진 분위기에 니콜라스와 진은 어리둥절했다.
스태프들은 아이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 것 같았다.
물음표가 가득 들어찬 얼굴에 맥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마지막 장면이라 그래.”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진이 몸을 틀었다. 맥이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찍는 게 마지막 장면이라고요?”
“응. 컷은 좀 나누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조용했구나….”
지난번 견학 때는 분명 시끌벅적 화기애애했기에 낯설어하던 아이들이 수긍했다.
맥이 말을 건 것을 계기로 세 아이는 물꼬를 텄다. 둘이 작게 속닥이면서 올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면, 맥은 저도 모르게 일일이 대꾸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점점 허물어지는 마음의 거리처럼 서 있는 거리도 가까워졌다.
어느새 세 아이는 옥상 구석에 쪼그려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맥은 문득 ‘이러려던 게 아닌데’ 라고 생각했다.
* * *
옥상에 있는 모두가 한 소년에게 집중했다.
텅 빈 어둠이 자리한 밤.
달빛조차 소년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뺨이 흰빛으로 미미하게 빛났다. 그 탓에 푸르게 질린 입술 색이 도드라져 보였다.
소년은 옥상 가장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뺨이 소년이 느끼고 있는 공포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초라한 동시에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때였다.
툭.
도현의 어깨에서 무언가 흘러내렸다. 어깨에 멘 것도 잊고 있었던 바이올린이었다.
흐리멍덩한 눈이 검은 물체로 향한다.
그리고.
공허하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소년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자면, ‘카인의 표식’과 ‘바이올린’이었다. 전자가 운명의 변화라면, 후자는 극 전반에 걸쳐 유와 이사야를 잇는 매개체였다.
성당 외벽에 기대어 연주를 훔쳐 듣던 순간부터, 귀를 간지럽히던 공기의 파동에 안정감을 느낀 순간부터, 바이올린 소리는 유에게 평화이자 평온의 상징이 되었다.
선율을 따라 걷다 보면 이사야가 속한 선의 세계에 도착한다. 그건 유에게 진리였다.
사방이 음표로 가득 채워진 순간이면, 유는 항상 따스한 빛, 하얀 벽, 달콤한 쿠키, 잔잔한 공기 따위가 존재하는 세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평화의 시간이 끝났을 때도 다시 한번 유를 건져 올린 건 바이올린이었다.
이사야가 건넨 화해의 표시였고, 증명의 약속이었다.
이사야에게 닿을 방법은 이미 소년의 손 위에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운명을 깨달았다.
낡은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숙명을 깨달은 소년이 바이올린을 든다.
거침없는 손길이 활을 내리긋다가.
“…흐으.”
멈추어 섰다.
* * *
“도리…!”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나 달려가려는 걸 진과 맥이 온몸으로 막았다.
“쉿, 쉬잇! 지금 집중하는 중이야.”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이자, 불퉁한 표정으로 몸을 늘어트렸다.
‘하지만 쟤 지금 뭔가 다른데.’
얌전히 서 있는 도현에게서 묘한 불안정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니콜라스를 막아선 두 사람은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니콜라스가 포기하고 자리에 도로 앉자, 맥이 숨을 내쉬었다.
진은 다시 도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옥상 한구석에서 숨을 고르는 도현에게 리암이 다가갔다.
“계속해도 괜찮겠어?”
얼굴 위로 내려앉는 시선에,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인 도현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해도 될까요?”
“어느 정도?”
“오 분만요.”
너무 적다고 느껴졌는지 리암이 작게 인상을 썼다. 그가 침음을 삼키곤 다시 물었다.
“그 정도로 되겠어?”
“네. 괜찮아요.”
그가 도현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수긍했다.
리암이 어깨를 두들기고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갔다.
도현이 촬영장에 복귀한 이후로 필수적으로 갖는 브레이크 다운 시간이었다.
도현은 집중을 깨지 않으면서 유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장면이자, 리암과 아무리 말씨름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이사야라는 캐릭터가 충분히 매력적임에도 자신을 위해 리암이 시나리오를 수정했다는 걸 알면서도 유를 고집한 이유이기도 했다.
긴장인지 설렘인지 모를 감정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덩어리가 한 것처럼 코코아, 마들렌, 피크닉, 진, 니키 따위를 머릿속으로 되뇌다 보면, 한결 맑은 정신 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코코아, 마들렌, 피크닉, 진, 니키를 되뇌지 않았다.
오로지 차분함을 유지하기 위해 흥분만을 가라앉혔다.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이대로 유의 고삐를 놓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었던 것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은 모호한 기분을 뒤로한 채 숨을 골랐다.
그리고.
약속했던 오 분이 지났다.
* * *
익숙한 슬레이트 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리자, 도현은 복잡한 생각을 모두 덜어냈다.
모든 걸 비우자 단순한 사실들만이 남았다.
적막이다.
도현의 귓가에 기이한 속삭임이 들린다.
성당의 신부와 신자, 양부모, 길거리의 신사, 제이콥, 조안….
한데 섞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지옥에서 마중 나온 악마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눈을 감는 거야.
눈을 감고 귀를 막자.
달이 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속삭임은 작고 무수한 벌레의 날갯짓이 되어 귓가에 웅웅거렸다.
정신이 갉아 먹힌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어도 떨쳐낼 수 없다.
어디로든 숨고 싶어져, 숨을 멈췄다.
소리가 뚝 끊겼다.
도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초조한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낮게 우는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다.
“하아.”
참았던 숨을 토해내던 도현은 불시에 찾아온 깨달음에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내, 내가….”
혐오감이 깃든 목소리가 짙게 번져 나갔다.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악마의 속삭임은, 그 누구도 아닌 제 것이었다.
“하, 하하.”
도현이 자조했다.
짧은 웃음소리는 기묘한 음색이 섞이다가, 곧 흐느낌으로 변했다.
이대로 숨어 있고 싶다.
이대로 들키지 않고 포기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아침이 되면 다른 도시로 건너가서….
“아냐, 아니야!”
새된 비명이 울렸다.
유는 진심으로 자신의 추악한 이기심이 혐오스러웠다.
동시에, 머리론 상황을 계산하고 있었다.
시선을 끌 만큼 연주를 하고 나면, 남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지?
옥상에서 일 층까지 내려가는 시간과 저들이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 중 무엇이 더 빠를까?
간신히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고 해서, 또다시 잡히지 않고 도망칠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범람했다.
공중에서 멈춘 팔은 양쪽에서 팽팽히 잡아당기는 것처럼 덜덜 떨렸다.
“이사야.”
마지막 희망의 줄을 잡듯이, 간절히 내뱉었다.
“이사야, 이사야. 샨.”
왜 나를 위해 희생을 선택했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다정함을,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선함을, 죄까지 함께하고자 하는 용기를. 그 죄를 강함이라고 칭하던 애정을….
- 내가 시작이었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아니라, 네가 날 만나면 안 됐어, 유.
결국엔 나의 죄악조차 가져가 짊어지려는 희생을.
하나하나 떠올리던 유의 얼굴은 점차 서러움으로 물들어 갔다.
골목길에서 이사야의 선택을 사고의 오작동이라고 비하하던 오만한 소년은 온데간데없었다.
우습게도, 결국 그 모든 다정함, 선함, 용기, 애정, 희생은 이미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소년의 근원까지 적시고 있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처음으로 겪은 온전한 애정이었다.
가끔은 이유 없이 미워지고, 슬퍼졌지만, 결국엔 소년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걸 네게 배웠으니 그저 돌려주는 것뿐이다.
소년은 자신이 무엇을 알았는지, 전부 들려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소년은, 이 세계가 완벽해지는 조건을 이미 알고 있었다.
첫 시작은 부드러운 선율이었다.
옥상에 달빛이 내려앉자, 소년의 세계는 부족함 없이 채워졌다.
이제 소년은 확신했다.
연주가 격렬해진다.
도현을 속이고, 생의 마지막 연주를 끝내고, 눈을 감고….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는 만족한다고 말했는데.
거짓 한 점 없는 진심이었다. 항상 어린아이를 공포로 밀어 넣고 말던 죽음조차 형과의 이별 앞에선 의미를 잃었다.
생애 처음으로 맛본 애정은 폭풍처럼 밀려와 소년의 전부를 집어삼켰다.
그랬기에 소년은 진심으로 그것만이 제 전부라 여겼다.
형은 죽음 앞에서 의연했지만, 그 모든 과정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흔들리고, 헤매고, 어지럽게 떠도는. 끔찍하게 혼란스러운 감정 또한 그의 것이다.
그러나 형은 끝내.
도현이 눈을 비스듬히 내렸다. 눈동자에 비친 감정을 가리기 위함이다.
거칠게 현을 긁었다.
알면 무너질 것 같아서 외면했고, 견디기 힘들 걸 알기에 회피했으며 더 원망하고 싶어서 모른 척했다.
그러나 나는 끝내.
이제 소년은 인정했다.
원망했다.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고 거짓으로 감추며 미움을 키웠다. 그러지 않으면 참을 수 없어서, 그조차 없다면 숨 쉴 수 없어서 그랬다.
우리는 많은 부분이 달랐지만, 놀라우리만치 닮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물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러니 더는 원망할 수 없다.
소년은 작고 하얀 병실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미성숙한 것이 서툴게나마 나아가는 모습은, 으레 그렇듯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바깥에 나온 소년의 머리 위로 붉은 달이 쏟아져 내렸다.
* * *
“…컷. 오케이.”
리암의 나지막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촬영 때는 연주 흉내만을 내기로 한 도현이, 갑작스럽게 진짜로 연주를 시작했을 땐 당황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그 순간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연주는 거칠고 격렬했다.
잔잔했던 첫 시작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드뷔시의 달빛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응어리진 감정을 폭력적으로 토해내는 선율은 거칠지만 우아했다.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폐가 저며지고 살갗이 긁히는 듯한 거친 음색과 그럼에도 느껴지던 아릿한 애정, 한없이 상대를 올려다보는 사랑.
원망도 미움도 가식도 거짓도 없는 오롯한 감정.
그 모든 게 섞이고 섞여 단 한 가지 선율을 그려내고 있었다.
도현은 울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쥐기 전 소낙비처럼 내리던 눈물은, 연주하면서 차갑게 말라갔다.
그 순간은 모든 사람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알을 깨고 나아가는 여린 새를 보는 것처럼 일종의 경이로운 감정으로 가득 차, 그것을 숨죽이고 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만 있었던 새는 알 밖에 무엇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 채 밖으로 나왔다.
단단한 알을 직접 부수고 나온 새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도리!”
진이 달려와 도현을 껴안았다. 니콜라스도 등을 두들기며 멋졌다고, 잘했다고 칭찬했다.
맥은 대체 따라잡을 순 있는 거냐며 투덜거리다가, 어깨를 툭 치며 “네가 최고다. 네가 다 해먹어라.”라고 했다.
새는 알 밖에 무엇이 있을까 두려워했지만.
또렷이 바라보게 된 세상은 생각보다 포근했고, 그렇기에 버틸 만했다.
그래.
꽤 괜찮은 결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