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59)화 (60/582)

제59화. 표류 (1)

도현의 연주 실력을 알고 있었던 이들을 제외하고는, 촬영 때 늘 흉내만 보였던 도현이었기에 촬영장은 잠시 뒤집어졌다.

리암이 머리를 부여잡고, 스태프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비밀로 부쳐달라고 부탁하고 돌아다녀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은 충동적으로 연주한 것에 대해 약간의 미안함을 느꼈다.

잠깐 촬영분을 모두 확인한 리암의 지시에 따라 추가적인 촬영을 모두 마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너무 늦기 전에 모든 촬영을 끝낼 수 있었다.

“내일이 주말이네요. 촬영이 모두 끝나고 맞는 주말이라니, 완벽한데요?”

정리하고 있던 로잔나가 도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요일에 끝났으면 다음 날 피곤했을 텐데, 하루 전에 끝나서 다행이에요.”

리암이 잡은 촬영 마감 일정은 토요일이었고, 그에 따라 리암과 서혜나가 상의하여 잡은 뒤풀이 날짜는 바로 다음 날인 일요일이었다.

평일에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브리아나나, 여타 다른 이들의 사정 탓에 모두가 모이기 힘들었고 그렇다고 다음 주 주말로 미루자니 아쉬움이 있었다.

촬영분을 모두 정리하고 장비도 정리하고… 할 게 매우 많았지만, 이는 리암과 로잔나가 몸을 가는 것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두 아쉬움을 뒤로하고 해산했다.

* * *

흔들리는 차 안에서 진은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 진,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까이서, 오래 관찰하기 전까진 알 수 없어. 결국에 물건이 어떤 가치를 지니느냐는, 네가 그 물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와 같은 문제인 거야. 그건 단순히 돈으로 치환되지 않는 가치야.

엄마는 천으로 닦고 있던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 이 유리병은 내게 아주 특별하고 귀한 유리병이야. 그런데 진, 너한테도 그렇게 느껴지니?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던 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엄마가 웃으며 유리병을 내려놓았다.

- 난 오랜 시간 동안 이 유리병에 관심을 쏟고 관찰하면서 내 나름의 가치를 부여했어. 그랬기 때문에 유리병은 진정으로 내게 가치 있는 물건이 될 수 있었지. 만약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만 달러의 유리병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소녀는 다시 유리병을 보았다.

햇빛에 반사되어 오색 빛깔을 품은 유리병이 아까보다 조금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러니, 진. 네가 정말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너는 그걸 꾸준하고 끈질기게 관찰해야 한단다. 그러면 그것은 그저 물건이라는 것을 넘어서, 네게 어떠한 의미가 되어줄 거야.

엄마의 말을 모두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다.

소녀는 그저 엄마의 품에 안기며, 한 가지만을 이해했다.

그 후로 소녀는 무엇이든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면 관찰하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건 비단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진은, 차 시트에 기대어 운전 중인 리암과 대화를 나누는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진이 그동안 봐왔던 아이들과 달랐다. 아니, 그 어떤 사람들과도 달랐다.

가만히 있어도 눈길을 끄는 존재감이나,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성격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진은 가끔, 도현이 넘어지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순간이 있었다.

도현은 잘 걷고 있는데도 괜한 불안감에 발밑을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드러나는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일 때가 많아서, 진이 관찰력이 좋고, 도현에게 관심이 많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진은 짐작했다.

가끔가다 도현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적극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그건 손끝에 난 거스러미처럼 자꾸만 신경 한구석을 툭, 툭, 자극하는 불안함과 우울함을 읽어낸 탓이 아닐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진이 부러 과장되게 도현에게 다가가고 친해지고자 한 것은.

물론 도현의 외양이 심미안에 들어맞은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건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었다.

진은 도현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그래서 꾸준하고 끈질기게 관찰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진은 깊이 여운이 남은 도현의 연주를 떠올렸다.

<달빛>은 온화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았다. 달빛은 칼날처럼 매섭게 피부를 파고들었고, 그에 진은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애틋하게 느껴진 건.

아마 그 속에 담긴 감정 탓임이 분명했다.

어딘가 손끝을 저리게 만드는 그런….

진은 이러한 느낌을 과거에 느껴본 적 있었다.

도현이 처음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에서 전해져 오던 심상과 분명히 닮아 있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연주한 걸까.’

대체 누구길래.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자신이 건들기에 너무 무거운 감정이란 생각이 든 탓이었다.

비밀이 많은 친구에 섭섭할 법도 했지만, 진은 개의치 않았다.

어색하고 서투르면서도, 착실하게 다가오는 도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다.

진은 끈질겼으니까.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진이 도현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모르겠어!’

지금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우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흐릿한 분위기 없이, 그동안 진이 봐왔던 도현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생기로 가득 차 있다.

‘으음….’

진은 한참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나 오늘 도리 집에서 자고 간다!”

당당한 선언.

너무 자연스러워서 니콜라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언제 그러기로 한 거야?”

“지금!”

“오오, 그럼 나도! 나도 지금 결정했어!”

‘우리가 이렇게 결정했으니, 너는 따라라.’라는 시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쳐다보는 둘에 도현은 당혹스러워졌다.

“그…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간신히 꺼낸 말에 진이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 어. 우리 딸! 집에 오고 있어?

처음, 지친 기색이었던 목소리는 곧바로 활기를 되찾았다.

“응! 근데 나 집 안 갈 거야!”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진?

당황했는지 더듬는 말,

“나 도리 집에서 자고 가려고! 괜찮지? 괜찮다고? 응. 나도 사랑해! 잘 자, 내일 봐. 안녕!”

속사포로 말을 이은 진이 상쾌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선 ‘이젠 됐지?’ 하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전혀 된 것 같지 않았다.

도현의 얼굴에 근심 걱정이 서렸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핸드폰을 들고 띡띡대더니, 화면을 도현에게 보여주었다.

[괴물 : 그래. 대신 너무 폐 끼치지 말고 심한 장난은 치지 말고 가자마자 도리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손이랑 발도 꼭 씻고 자기 전에는 이도 닦고…]

문자는 끝없이 이어졌다.

길고 장황하긴 했지만, 문자의 요지는 허락인 것 같았다.

“이제 네 차례야!”

니콜라스가 뭐 하냐는 듯이 턱짓을 했다.

갑작스럽게 일에 휘말린 도현은 떠밀리듯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 당연하지! 애들한테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보렴!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듣고 있던 리암이 한마디를 얹었다.

“일요일에 도리토스 집에서 파티 하는데, 그때까지 있다가 파티까지 즐기고 가면 되겠는데?”

웃음기 서린 목소리.

그에 진은 손을 탁! 치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이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게 2박 3일 파자마 파티가 결성되는 것 같았으나….

“어, 파티면…. 맥도 오지?”

니콜라스가 도현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도현이 긍정의 뜻을 표하자,

“맥도 같이 가!”

니콜라스는 곧바로 직진했다.

“뭐…?”

맥은 도현의 촬영을 구경하며 대기할 때 진과 니콜라스와 조금 대화를 나누며 나름 친해졌다.

그러나 파자마 파티에 초대될 정도의 친근함은 아니라고 여겼던 맥이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뒤로 물리는 법이 없었다.

“괜히 집에 갔다가 오기 귀찮잖아! 도리 집에서 자고 같이 놀고 다음 날에 파티도 참여하면 편한데!”

맥은 거절하고자 했으나, 진이 합세하자 의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보던 도현은 깨달음을 얻었다.

항상 둘에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리하여 갑작스러운 파자마 파티 멤버가 모두 결성되었다.

* * *

진과 니콜라스, 맥이 도현의 뒤에 옹기종기 모여 서 있었다.

서혜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던 리암이 차를 몰고 사라지고.

서혜나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얘가 진이고 얘가 니키구나!’

도현의 입으로만 듣던 아이들을 실제로 만났다!

가만히 있어도 아이 특유의 앳됨과 활기참이 흘러나오는 아이들이었다.

서혜나는 조금 감격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간단한 환영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아이들을 안내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던 진이 도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도현의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진이 작게 속삭였다.

“너희 엄마 진짜 멋지시다.”

정말 ‘멋지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느껴지는 우아함과, 편한 홈 웨어임에도 느껴지는 고급스러움, 곧게 선 자세까지.

또한, 이마에서 턱으로 떨어지는 우아한 선은 도현의 미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곧바로 알 수 있게끔 했다.

“도리 너 엄마 닮았구나.”

도현이 잠시 고개를 끄덕이곤 답했다.

“응. 그런데 아빠도 닮았어.”

“그래? 아빠도 집에 계셔?”

진이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러나 도현이 고개를 저으며, 아빠는 한국에 있다고 말하자 아쉬워했다.

그리고 맥은.

‘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심정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도현의 집은 리암의 차 안에서 봤을 때보다 더욱 커다랗고 부유해 보였다.

괜히 오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아 은근히 주눅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정원에 발을 디딘 세 사람에게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맥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도현이 기민하게 눈치채고 뒤를 돌아보았다.

“맥?”

도현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맥, 어디 안 좋아요? 혹시 피곤해요?”

“…아냐.”

추잡하게 질투심을 느낄 뻔했다.

맥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정원을 지나쳐 집 내부로 들어온 맥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테리어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디자인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집은 꼭 모델 하우스 같았다.

그들은 곧장 도현의 방으로 올라갔다.

이미 촬영장에서 저녁을 먹었고, 무언가 더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의 침대는 네 아이가 자기에 조금 비좁긴 했지만, 아래로 떨어질까 걱정될 정도는 아니었다.

차 안에서 나른히 늘어졌던 네 아이들은 침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고선 조금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보드게임을 하자, 술래잡기하자, 얘기하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진과 니콜라스의 친화력은 엄청나서, 맥은 정신 차려 보니 편안히 누운 자세로 그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맥은 좀 얼떨떨했지만, 곧 뭐 어때, 하는 심정이 되어 “여기서 술래잡기하면 시간 내로 못 찾을 것 같다”라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쿠울….”

“프…. 피유….”

너 나 할 것 없이 말소리가 느려지더니, 곧 잠에 빠져들었다.

10시까지 촬영을 하니, 다들 피곤했던 것이다. 마지막 촬영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서혜나가 아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나 궁금하여 살짝 문을 열었을 땐.

불조차 끄지 않고 네 천사들이 꿈나라를 여행하고 있었다.

서혜나는 그 모습을 조금 길게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깨지 않게 조용히 불을 끄고 나왔다.

파자마 파티 첫날 밤이 저물었다.

* * *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눈을 뜬 도현은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답답하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위인가?’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본 적 없는 도현이지만, 가위에 눌리면 이러한 감각이 느껴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도현이 낑낑대며 눈을 뜨자.

“…아.”

진의 팔이 배 위에, 맥의 다리가 왼 다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맞다…. 어제 그대로 잠들었지.’

도현은 일단 진의 팔을 조심스럽게 내리고 맥의 다리도 천천히 밀어냈다.

오전 여섯 시.

기상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지라 아이들은 여전히 꿈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도현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출렁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간신히 아무도 깨우지 않고 침대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를 마친 도현이 일 층으로 내려갔다.

평소에 일찍 일어나 도현을 깨우던 서혜나는 주말에는 조금 늦게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집 안에 깨어 있는 건 도현밖에 없었다.

도현은 기지개를 쭉 켜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 놓인 흔들의자에 앉은 도현이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아직은 살짝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현은 아침에 이렇게 정원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즐겼다.

살결을 스쳐 지나가는 신선하고 서늘한 공기가 기분이 좋았고.

이른 아침에만 느낄 수 있는 평화로운 고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턱을 살짝 들고, 눈을 내리감았다.

유독 긴 속눈썹이 바람결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망망대해에 둥둥 떠다니는 닻 끊긴 부표가 된 기분이었다.

머릿속이 텅 빈 채로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간간이 흘러가는 구름과 하늘의 색만이 시간의 흐름을 짐작케 할 뿐이었다.

도현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동안 도현을 이룬 것 중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것은 원망이었음을, 그것이 빠져나가고서야 깨달았다.

꽉 차 있던 것이 빠져나가자 도현은 공허한 감각에 시달렸다.

세 번의 계절 동안.

도현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풍랑을 만나 이리저리 부딪히고 헤매며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그것들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와 도현을 혼탁과 무질서라는 깊은 구덩이로 떨어트렸다.

거대한 파도에 한차례 휩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낯설 정도로 광활하며 고요한 바다 한가운데 홀로 남겨졌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푸른 하늘에 걸린 구름과 찰싹이는 잔물결뿐인 잔잔한 바다였다.

그 고요함은 도현을 새로운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영화 촬영이 끝났다.

동시에, 원망도 내려놓았다.

도현은 망연한 기분이 되었다.

‘그럼 이제 난 뭘 하면 되는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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