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60)화 (61/582)

제60화. 표류 (2)

도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하늘을 보다가.

짝!

양손으로 제 뺨을 차지게 쳤다.

여린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내일은 뒤풀이 파티를 해야 하고, 아직 녹음도 남아 있고, 음악 수행 평가도 멀지 않았고….’

해야 할 일을 하나둘씩 떠올리자, 허공을 배회하던 몸이 다시 땅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이렇게나 할 일이 많았다.

도현이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기지개를 쭉 켜며, 아침 공기를 폐에 가득 차도록 마시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현은 막 방에서 나오던 서혜나와 마주쳤다.

“좋은 아침이에요.”

“응, 좋은 아침. 오늘도 일찍 일어났네.”

“이 시간이면 눈이 떠지더라고요.”

“엄마는 이 나이 될 때까지 아침잠이 많은데… 도현이가 엄마보다 낫네.”

그리 말한 서혜나가 웃었다.

“친구들은 아직 자고 있니?”

“네. 이른 시간이기도 하고, 어제 피곤했나 봐요.”

“아침은 언제 먹으려나….”

서혜나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일곱 시.

조금 이른 시간에 서혜나가 고민에 빠졌다.

“저 씻고 내려와서 아침 준비 도와드릴게요. 같이 해요.”

서혜나와 밤 산책을 했던 날 이후로 도현은 종종 식사 준비를 도왔다.

서혜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불편한 마음을 버리지 못한 탓이었다.

물론 아들과 함께할 시간이 늘어난 서혜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으음, 그럼 엄마도 씻고 나올까. 그러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기도 하네.”

좀 전에는 잠깐 간단히 씻은 게 전부였기 때문에, 도현은 옷가지를 들고 욕실에 가서 샤워까지 말끔히 마쳤다.

편안한 홈 웨어를 입고 내려온 도현은, 뭔가 엄청난 음식을 만들 기세인 서혜나를 말렸다.

“아침엔 간단히 먹는 게 속이 편하지 않을까요?”

온갖 이유를 가져다 대며 말리기에 성공한 도현은, 극적으로 토스트와 소시지, 과일 몇 조각과 따뜻한 수프로 아침 메뉴를 정할 수 있었다.

팅!

토스트 기계에서 토스트가 튀어 올랐다. 도현은 조심조심 토스트를 접시로 옮겼다.

한쪽에선 크림수프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서혜나가 소시지를 맛있게 굽는 사이, 도현은 잼 몇 개를 꺼내어 식탁 위에 두었다.

“이제 슬슬 친구들을 깨워야 될 것 같은데.”

“제가 올라갈게요.”

도현이 접시를 예쁘게 놓고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세상모르게 잠든 세 명이 보였다.

도현은 일단 가장 바깥쪽에 자리한 니콜라스를 살살 흔들었다.

“니키. 일어나.”

깨우려는 건지 재우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의외로 잠귀가 밝아서, 금방 눈을 떴다.

“후암. 아침이야?”

“응. 아침밥도 다 차렸어. 식기 전에 먹어야 해.”

“밥…. 응, 밥은 중요하지.”

니콜라스는 졸음이 그득한 눈을 몇 번 문지르더니 상체를 일으켜 팔을 쭉 폈다.

니콜라스가 화장실로 떠나고.

다음 타자는 진이었다.

흔들흔들-

좀 더 자신감이 생긴 도현이 니콜라스를 깨울 때보다 적극적으로 진을 흔들었으나.

“쿠울, 피유우-”

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진, 아침이야.”

“푸우-”

“진?”

“퓨푸…!”

진은 강적이었다.

도현은 진과 사투를 벌였지만, 그 소란에 깨어난 건 오히려 맥이었다.

“…낯선 천장이네.”

맥은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맥, 깼어요?”

“…응? 아, 아…. 그랬지….”

그는 나름의 납득 과정을 거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은 상태 그대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벽에 기대에 길게 하품을 했다.

나름 일어난 것 같아서 다시 진에게 시선을 돌린 도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불을 혼자 독차지하게 된 진이 둘둘 몸에 말고 애벌레처럼 웅크렸기 때문이었다.

깨우는 난도가 한 단계 상승해 버린 것 같았다.

“진, 진! 지인….”

그저 애타게 이름만 부르짖고 있는데.

“걘 그렇게 해서 절대 못 깨워.”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니콜라스가 장난스럽게 코끝을 찡그렸다.

그러곤.

“워우어억!”

진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괴성을 질렀다.

“흐어억!”

진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덩달아 놀라 벽에 찰싹 달라붙은 맥은 덤이었다.

“자, 일어났지?”

니콜라스가 뿌듯하게 웃으며 허리에 손을 짚었고.

도현은 그런 니콜라스를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간신히 모두를 깨우는 미션을 성공한 도현은, 반쯤 지친 기색으로 주방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저마다 개성적으로 아침 식사를 해치웠다.

니콜라스는 온갖 잼을 모두 발라 먹어서 맥의 질린 눈빛을 받았고, 진은 아직도 졸린지 수프에 토스트를 퐁당퐁당 빠트려 먹다가 볼에 수프를 묻히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먹는 걸 보고 웃다가, 티슈를 뽑아서 주었더니 반대쪽 뺨을 문지르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니콜라스가 바보라고 핀잔하며 한심해했다.

가장 평범하고 얌전하게 먹는 건 맥이었다. 맥은 얌전히 반절은 잼을 발라, 반절은 소시지를 올려 먹었다.

아침을 모두 먹은 후, 그들은 소화를 위해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맥은.

‘어제도 엄청나다고 생각은 했는데….’

환한 아침에 본 집은 더 엄청났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세세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늘막이 쳐진 테이블이나, 한쪽에 고이 놓인 흔들의자는 그림 속의 집 같은 느낌이 풍겼고….

게다가 수영장도 있었다!

어젠 수영장을 보지 못했던 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부럽다는 생각이 잠깐, 제 다락방이 떠올라 비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잠깐, 퍽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기분에 사로잡힐 뻔했던 맥은 저 앞에서 손을 흔드는 니콜라스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쟤네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는데 혼자 뭐 하는 건가, 싶어서.

어젯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맥은 같은 침대에 누워 신나게 수다를 떤 이후 마음의 장벽이 스르르 무너져 버렸다.

애초에 맥은 친구들과 곧잘 어울리는 활달한 성격이기도 했다.

물론 어울리는 건 보통 남자애들이었기 때문에 진은 조금 어색했지만, 진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기에 그도 곧 풀리고 말았다.

느긋하게 산책을 하며 그들은 이것저것 계획을 세웠다.

“이따가 수영도 하자!”

니콜라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오후엔 수영을 하기로 했고.

“어제 잠들어 버렸잖아! 그러니까 오늘 해야지!”

진의 의견대로 어제 하고자 했지만, 모두 잠드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보드게임과 술래잡기도 하기로 했다.

그들은 신나게 계획을 짠 후에, 식후 산책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소화가 모두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격렬한 움직임이 있는 것보다는 보드게임을 하기로 했고.

네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진이 자신의 말을 이동시켰다. 빨간 말이 식당에 도착하자, 진이 말했다.

“식당에서 그린이 촛대로 죽였어!”

진이 긴장한 기색으로 세 사람을 보았다.

진의 왼쪽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말했다.

“증명할 수 없어.”

이어 맥도 말했다.

“증명할 수 없어.”

“…!”

진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도현을 보았다.

내 추리가 맞은 걸까? 그럼 이번 판은 내 승리가 되는 걸까?

도현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평온한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이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도현이 싱긋 웃으며 손에 쥔 카드 한 장을 천천히 꺼내었다.

진의 눈앞에 촛대가 그려진 카드가 흔들거렸다.

“네 추리는… 틀렸어.”

“…!”

진이 휘청이며 바닥을 짚었다.

“이번엔 진짜 맞출 뻔했는데!”

도현은 진에게 보여주지 않은, 그린이 그려진 카드를 보고 태연하게 표정 관리를 했다.

맞추기는커녕, 정답 근처에도 못 갔다.

도현은 한 명씩 추리를 하고, 추리가 틀릴 때마다 정답을 찾아갔다.

후보군에서 몇 가지를 제외하고, 또 추리를 할 때 세 사람의 반응까지 합쳐서 계산하니 답을 알 것 같았다.

도현이 거침없이 최종 추리 장소로 말을 옮겼다. 그에 셋이 숨을 들이켰다.

“너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거기서 추리하면 되돌릴 수 없어!”

니콜라스가 진지하게 말렸지만, 도현의 말은 거침없이 이동해 최종 추리 장소에 도착했다.

화이트가 당당하게 우뚝 섰다.

“피콕이… 게임 룸에서 밧줄로 죽였어!”

…과연 정답일 것인가?

모두의 시선이 도현에게로 모였다.

도현은 평온한 기색으로, 사건 카드를 들췄다.

여기서 정답을 맞힌다면 그대로 우승, 틀린다면 바로 아웃이었다.

도현이 사건 카드를 읽고.

“뭐, 뭐야? 뭔데!”

맥이 조바심을 냈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으니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웃지 않는 걸 보니 틀린 건가?’

맥은 섣불리 판단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도현이 사건 카드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씨익- 즐거운 미소가 얼굴에 떠올랐다.

“내가 이겼어.”

“또 졌어!”

진이 울분에 찬 소리를 질렀다.

그건 맥이나 니콜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작용하는 게임에선 나름 골고루 승패가 갈렸는데, 머리를 굴려야 하는 추리 게임만 하면 도현이 우승을 싹쓸이해 갔다.

“으허! 지쳤다. 머리를 너무 많이 썼어.”

니콜라스가 뒤로 발라당 누웠다.

이어, 맥과 진도 지쳤음을 선언하며 쓰러졌고, 도현은 웃으며 그들 옆에 나란히 몸을 뉘었다.

그들이 깨어난 건, 서혜나가 머핀을 구워 가져왔을 때였다. 머핀을 먹고 되살아난 아이들은 그대로 곧장 수영장으로 향했다.

깨끗한 물과 시원한 바람, 따뜻한 햇살과 아늑한 정원까지.

모든 게 완벽해서 맥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도현이 수영에 서툴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된 맥은 니콜라스와 합세하여 도현을 놀렸다.

진 또한 도현을 위로하는 듯하면서 은근히 놀려, 도현의 입술이 아주 조금, 미세하게 튀어나왔다.

저녁은 아이들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피자를 시켜 먹었다.

치즈가 쭉쭉 늘어나는 피자를 먹으며, 거실에서 다 같이 영화 한 편을 틀어놓고 감상했다.

목이 막힐 땐 콜라를 한잔하니, 그런 천국이 따로 없었다.

소화 겸 운동인 술래잡기까지 마치고 하루를 보람차게 보낸 아이들은 녹초가 되어 침대 위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너네 놀아주는 거 정말 힘들다….”

앓는 소리를 내는 맥에 니콜라스가 자신이 놀아주는 거라며 건방지게 굴었다.

맥의 눈썹이 꿈틀했다.

처음엔 뭔가 호감과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갈수록 만만히 보는 것 같았다.

이대론 연장자로서 위엄이….

쌔액-

한바탕 레슬링이라도 벌이려던 맥은 작은 숨소리에 눈을 깜빡이곤, 옆을 돌아보았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붉은 홍조가 조금 올라와 있었고, 눈꺼풀이 감겨 긴 속눈썹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러니까.

“도리 잠들었는데?”

맥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응?”

니콜라스도 몸을 일으켜 도현을 확인했다.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

어젠 누가 자는 걸 확인할 새도 없어 곯아떨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도현이 잠든 걸 보는 게 처음이었다.

낮잠 잘 때도 도현은 늘 다리베개를 내어주는 편이었으니까!

세 아이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옹기종기 모여 잠든 도현을 구경했다.

니콜라스가 장난기를 이기지 못하고 도현의 코를 쥐려던 걸, 진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한 대 치는 것으로 막았다.

“이러니까 진짜 줄리엣 같다. 잠든 줄리엣!”

“줄리엣?”

맥의 의아한 말투에 진이 답했다.

“도현이 별명이 줄리엣이거든.”

“으프푸…! 그게 뭐약.”

맥은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써야 했다.

잘 어울려서 더 웃겼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도현을 주제로 조용조용 떠들기 시작했다.

“얘 때문에 처음에 얼마나 비교당하는 느낌이었는데.”

맥의 신세 한탄부터 시작해서.

“얘 그림도 잘 그린다? 본 적 있어?”

“뭐? 아니?”

“그럼 보여달라고 해봐! 다락방에 잔뜩 있는데!”

“다락방도 있었어?”

“응! 저어기. 저기 계단이랑 이어져 있어!”

다락방이 딸려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되고.

“근데 얘 바이올린도 잘 켜잖아.”

“리코더도 잘 불어.”

“리코더…. 그래. 아무튼 그것도. 그리고 연기도 잘하고. 너네 말대로라면 공부도 잘하는데, 그림도 잘 그린다고…?”

진이 추가했다.

“성격도 착하고 잘생겼어.”

“집에 수영장도 있고!”

세 사람이 불가해한 무언가를 보듯 잠든 도현을 보았다.

늘어놓고 보니 불공평한 생명체가 따로 없었다!

그들은 조금 더 토론을 이어가다가, 뒤척이는 도현에 합!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물고 보니 졸린 것도 같았다.

도현의 차분하고 고른 숨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이내 아무렴 어떠랴, 도현은 도린데, 하는 심정이 되어 졸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곧이어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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