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61)화 (62/582)

제61화. 표류 (3)

셋째 날은 아침부터 바빴다.

오후에 있을 파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서혜나를 돕는다는 핑계로 같이 장을 보러 갔다. 졸래졸래 잘 따라오던 아이들이 천방지축이 된 건,

“오. 저거 맛있겠다.”

맥이 과자에 흥미를 보인 후부터였다.

가볍게 흘린 말에 니콜라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니콜라스의 눈이 스낵 코너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던 서혜나가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공수표를 날렸다.

“먹고 싶은 건 담아도 된단다!”

서혜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살면서 한 번도 튕겨본 적 없는 니콜라스가 냅다 카트에 과자를 담기 시작했다.

이후.

서혜나는 조금 후회했다.

“저기! 새로 나온 과자래!”

저쪽에 가 있나 싶더니만.

“우와! 이것 봐!”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서혜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도저히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녔던 탓에, 집으로 돌아온 서혜나는 소파 위로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도현이 워낙 얌전한 아이라 그동안 실감하지 못했지만, 이맘때쯤의 아이들을 키우는 건 전쟁 같은 일이었다.

‘그래도 도현이가 아이다운 모습은 보기 좋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 으앗!”

와르르!

장거리를 정리하겠다고 나선 진이 땅바닥에 우르르 쏟아진 재료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

짧은 감탄사를 뱉다가, 슬쩍 시선을 올려 서혜나가 늘어져 있는 소파를 곁눈질했다.

이미 이쪽을 보고 있던 서혜나와 정확히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하핫… 실수로 그만….”

주근깨를 찡긋거리고 입꼬리를 귀엽게 들어 올리며 살살 웃었다.

애교로 무마하려는 행동에 원래도 뭐라 할 생각이 없었던 서혜나는 소파에서 내려와 진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담으면 되는 거니까. 봐, 상한 음식도 없네.”

서혜나는 여기저기 떨어진 것들을 주워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진이 조금 멋쩍어하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감았다, 풀었다 하는데 한숨 소리가 끼어들었다.

“사고 치기는.”

맥이 몹시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진을 보고 있었다.

일명 ‘A-mart 사건’의 시초이자 발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자, 서혜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자, 봐. 이런 건 잘 잡고 꺼내야지.”

“맥은 뭐 잘하나….”

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어느새 맥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척척 정리해 내고 있었다. 그 능숙한 모습에 서혜나가 작게 감탄했다.

사람들의 놀란 반응에 맥은 은근히 뿌듯한 표정을 짓다가,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척척척.

척척척!

맥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재료가 정연하게 정리되었다.

손질까지 하려는 것을 서혜나가 막자, 싱크대로 가서 채소 종류를 뽀득뽀득하게 씻었다.

그 모든 움직임이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

“자, 잘하는지도?”

진이 말을 정정했다.

파자마 파티를 하면서, 진은 맥을 완전히 편안히 여기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 다가가기 어려운 유형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지내본 맥은 생각보다 성격도 유하고 꽤 유쾌한 성격이었다.

그뿐 아니라, 종종 보이는 무심한 모습은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보단 신경 쓰지 않으려는 치기 정도로 보였다. 쿨함을 숭배하는 니콜라스와 증상이 조금 비슷했다.

‘남자애들은 모두 그런가?’

진은 조금 의아해하다가.

허세와 치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도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둘이 유독 유치한 것 같았다.

어느덧 진의 마음속에서 맥은 니콜라스와 같은 위치까지 내려갔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모습은 상당히 의외였다.

의외의 어른스러움에 진은 니콜라스와 동등한 위치에서 맥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맣게 모르는 맥은 이리저리 열심히 움직였다.

“혹시 요리도 할 줄 알아요?”

도현이 묻자 맥이 심드렁히 답했다.

“간단한 것만.”

맥은 굉장히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답했지만, 도현에게는 그것만 해도 대단해 보였다.

도현은 맥이 새롭게 보였다.

항상 자신에게 형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맥에게는 미안하게도, 도현에겐 형보다는 어린 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솔직하지 못하고 틱틱 대는 성격 탓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약간 형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맥이 좀 더 일하고자 했지만, 아이에게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던 서혜나가 단호히 만류하고 위층으로 보냈다.

아이들은 그렇게 이 층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음… 이제 뭘 하지.”

“다락방에 갈래?”

“아! 맞아. 맥한테 그림도 보여주자!”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이 물었고, 진이 동의했다.

“그 엄청나다는 그림 실력?”

“응! 빨리 가자, 빨리.”

진과 니콜라스가 잔뜩 들뜬 기색으로 맥을 끌고 다락방으로 향했다.

그냥 내 발로 가면 되는데 왜 질질 끌고 가냐는 맥의 황당함이 담긴 항변은 묵살되었다.

죄인처럼 질질 끌려온 맥은 다락방의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도리가 그린 거라고?”

그의 말엔 의심이 서려 있었다.

가끔, 꽃이나 다른 사물들이 그려진 것도 있었지만, 모든 그림이 대부분 한 남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사진처럼 사실적이거나, 특출 나게 섬세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시선을 잡아끌었다.

맥은 미술 작품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웬만큼 유명한 미술관에 가더라도 감탄보다는 하품이 더 많이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현의 그림은 지루하지 않았다. 심심하지 않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것만으로 맥이 놀라기엔 충분했다.

믿기 어려워하는 맥의 모습에 진과 니콜라스가 코밑을 쓱 쓸며 뿌듯해했다.

맥이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다.

“왜 너희가 자랑스러워해?”

“그야 도리는 내 친구니까!”

도현이 찡한 표정으로 둘을 보자, 맥이 잘들 논다는 표정이 되었다.

“근데 이 사람은 누구야?”

“도현이 좋아하는 형이래!”

맥의 말에 도현 대신 대답한 건 니콜라스였다.

맥은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래도 보통 이렇게 그림까지 그리나?’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조금 독특하게 비칠 법한 광경이었다. 이에 맥이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자,

“도리야! 나 캔버스에 그림 그려보고 싶었어! 나 해봐도 돼?”

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응! 시간 남았잖아. 우리 그림 그리고 놀자!”

“그럴까? 니키는… 좋아하는 것 같고 맥은 어때요?”

“어? 나?”

맥이 반사적으로 묻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

학교 미술 시간을 제외하곤 그림을 그려본 적 없었지만, 온갖 화구와 사이즈별로 종이가 늘어져 있으니 손이 근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맥은 어느새 물어보려던 질문을 까먹은 채였다.

그렇게 네 명의 아이들은 파티 시간이 되기 전까지 다락방에 배를 대고 드러누워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아이들을 부르려고 왔던 서혜나는 물감과 흑연으로 꼬질꼬질해진 아이들의 손을 보곤 화장실로 밀어 넣었다.

아이들은 뽀득뽀득 깨끗한 손이 되고 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 * *

딩-동.

“앗, 또 울렸다! 제가 열게요!”

진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시간이 흐르자 첫 번째로 도착한 리암과 로잔나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진! 잘 지냈니?”

브리아나가 진을 격하게 껴안았다. 진이 꺄륵, 웃으며 팔로 브리아나의 목을 휘감았다.

브리아나가 진을 들어 올린 채로 서혜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두 번째로 뵙네요! 안녕하세요!”

“네, 반가워요. 와줘서 고마워요.”

“에이, 파티를 열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다들 그럴 거예요.”

브리아나가 넉살 좋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브리아나는 보이는 아이들마다 기뻐하며 인사했다.

“집 정말 좋다, 도리!”

진과 니콜라스가 도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어느새 도현을 도리라고 부르는 촬영 팀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고.

겨우 며칠 만에 보는 거였지만, 반가운 얼굴들에 도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오랜만이다! 촬영은 잘 마쳤어? 아, 보러 가고 싶었는데! 마침 그날 조카를 돌봐야 해서 못 갔지 뭐야.”

애버리의 말에 맥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봤으면 깜짝 놀랐을 텐데. 완전 쩔었거든요.”

“뭐야. 그 정도야?”

애버리가 아쉬움에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나중에 영화로 보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거랑은 또 다른데 말이지. 그래서 그날 어땠어? 이야기 좀 해줘 봐.”

애버리의 질문에 아이들이 신나서 대답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코앞에서 여럿이 모여 하는 것에 머쓱함을 느끼고 있는데,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드디어 봤다!”

할리의 표정이 화악 폈다.

할리가 도현에게 곧장 달려왔다. 반갑게 인사하는 할리는 브라운과 함께 있었다.

“윌리는?”

“걔? 몰라. 안 온다는 것 같은데.”

도현의 물음에 브라운이 심드렁히 답했다.

잠시 후.

모든 인원이 도착했다.

한쪽에서 서혜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리암이 사람들의 주위를 모았다.

“먼저, 파티를 열어주신 혜나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정말 완벽한 파티네요.”

리암의 인사에 사람들이 다 함께 박수쳤다.

서혜나가 여유롭게 웃으며, 맘껏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음 감독으로서 영화를 제작하는 거라 부족한 부분이 많았는데, 여러분들이 있어서 이렇게 잘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암이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몇 달 동안 얼굴을 맞댔던 이들의 면면을 보면서 후련함과 아쉬움, 그리고 뿌듯함을 느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행군이 끝이 났다.

“다들 이상한 감독 믿고 따라와 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리암의 말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구구절절한 내용 없이 핵심만 담은 말. 성의 없다고 느낄 수도 있었으나, 적어도 여기에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리암의 눈이 은근히 붉어진 것을 발견한 이들은 울컥해 입술을 앙다물거나, 웃음을 눌러 참았다.

리암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영화를 제작하면서 잘 풀리는 날만 있는 건 아니었다.

NG 컷이 수도 없이 많이 나와 촬영이 지연되었던 순간도, 소품을 잘못 가지고 와 문제가 생겼던 순간도, 촬영해야 하는 장소에 일반인들이 지나다녀서 허리 숙여 사과해야 했던 순간도 있었다.

이 외에도 정말 힘들었던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나중에 되돌아봤을 때, 그땐 정말 힘들었지, 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릴 일들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암의 선창을 시작으로.

“다들 수고하셨어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리암의 시선이 향한 곳은 두 주연 배우가 있는 곳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도현을 만난 건 천운이었다. 그리고 무리해서 욕심을 부렸던 맥도 생각보다 훨씬 잘해주었다.

또다시 울컥한 리암이 큼, 큼 헛기침을 하자, 로잔나가 소리 죽여 웃었다.

파티는 즐거웠다.

어른들은 각자 술을 한 잔씩 손에 쥐고 있었고, 아이들의 손에는 논알코올 칵테일이 들려 있었다.

리암이 도현과 처음 만난 날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정말 상상도 못 했지!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건방진 꼬마가 연기 천재였을 줄은!”

취기가 오른 리암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웬 꼬마가 제 몸보다 커 보이는 가방을 메고 혼자 나타나서 뭔가 싶었는데 말이야…!”

리암이 웃으며 말을 이어갈 때였다.

“잠깐만요. 혼자?”

애버리가 리암의 말을 끊었다.

“도현이가…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맞죠?”

“네. 맞아요”

“그 어린애가 혼자 돌아다녔다고요…?”

로잔나의 대답에 애버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한 도현이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로잔나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전 이 이야길 들었을 때 당연히 보호자와 함께인 줄 알고…. 리암, 아이가 정말 혼자였나요?”

“어? 어어….”

“세상에! 그러면 보호자를 찾거나 경찰에 신고했어야죠!”

로잔나가 깜짝 놀라 큰소리를 냈다.

그들에게 비난과 힐난의 말을 들으며, 리암은 조금 억울한 눈치였다.

사실 리암이라고 해서 그 정도로 상식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리암도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그때의 도현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 외에도, 안개 낀 날 같은 흐릿함과 어스름함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하이 톤 목소리가 아닌 조금 낮고 침착한 말투도 오해를 가중하는 요소였다.

도현의 외양이 앳되어 보이긴 했지만, 원래 동양인은 대체로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이지 않는가? 리암도 미성년자인 줄 알았던 동양인이 서른 살임을 듣고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현은 외양에 대한 편견만 내려놓고 보면 절대로 그 나이로 볼 수 없는 아이였다!

약간의 억울함을 담아 말하자, 로잔나는 무척이나 못난 인간을 보듯이 리암을 보았다.

“계약했을 때는요? 그때 그냥 넘어갔죠?”

뜨끔.

리암은 정곡을 찔렸다.

계약서를 작성할 때 자연스럽게 도현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라 까맣게 잊었던 리암은 그냥 어리구나, 생각하며 단순히 넘어갔다.

리암이 쭈그러든 사이, 애버리가 한 말에 깜짝 놀란 서혜나가 몹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 왜 잊고 있었지!”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미국이 아동의 안전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다른 문제에 정신이 팔려 거기까지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서혜나가 당황하는 것을 보던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저도 깜빡 잊었는걸요. 같이 나가자는 걸 혼자 가고 싶다고 한 것도 저고요. 지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도현의 말에 서혜나의 표정은 더욱 우울해져, 죄책감에 꽁꽁 감싸인 목소리로 사과했다.

‘…위로였는데, 왜 역효과가 난 것 같지?’

당황한 도현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며 서혜나를 진정시켰다. 그러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운이 좋았어. 한적한 길로만 다녀서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지 않은 게 행운이었어.’

만약 유동 인구가 많은 거리를 홀로 돌아다녔다면, 엄마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 오싹했다.

도현은 어깨를 살짝 떨다가, 다시 엄마에게 옅게 웃어 보였다.

…어째서 엄마의 안색이 더욱 나빠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