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62)화 (63/582)

제62화. 표류 (4)

잠깐의 소동이 있었지만.

한없이 미안해하는 서혜나가 엄한 오해를 사기 전에, 도현은 이들에게 한국의 분위기나 상황을 곁들여 문화를 설명했다.

한국에서 산 적 없는 아들의 능숙한 설명에 서혜나가 의문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홀로 등교를 한다는 말에 경악하기는 했지만, 이번 일이 방치나 학대가 아닌 문화적 차이에서 일어난 사고임을 이해한 것 같았다.

어른들은 침울해져 있는 서혜나의 처진 어깨를 토닥이며 앞으로 주의하면 된다고 위로했다.

그 위로에도 불구하고 서혜나의 낯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다.

도현은 친구들과 놀겠다고 말을 남기고 자리를 피했다.

“근데 수영장 진짜 크다!”

물속에서 파닥거리고 있던 할리가 한 말이었다.

다들 집에 오자마자 수영장 칭찬부터 했다.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그런지, 샌디에고 사람들은 수영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

수영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도현으로선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수영장이 있어서 니키와 친해질 수 있었지.’

어쩌다 보니 미끼 노릇을 톡톡히 한 수영장이었다.

물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친구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할리가 왜 안 들어오냐고 물었다.

“그냥. 젖는 게 싫어서….”

도현이 어물거리는데, 비스킷 한 조각을 우물거리던 맥이 비웃었다.

“수영 못해서 그런 건 아니고?”

도현이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렇게 유치해 보여요?”

옷을 갈아입는 게 번거로웠을 뿐이었다. 딱히 어제 놀림받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정말로.

“그으래?”

맥의 얼굴에 떠오른 비열한 표정에 불안한 기운을 감지한 도현이 뒷걸음질 치는데.

번쩍!

“으악! 맥! 내려줘요!”

“싫은데!”

동양인과 서양인, 그리고 13살인 맥과 9살인 도현의 나이 차이 탓인지 도현의 몸이 꽤 수월하게 공중에 떴다.

도현이 바둥거렸다.

“으풉!”

풍덩!

한순간에 눈앞에 물이 들어찼다.

눈을 꾹 감은 채, 반사적으로 팔을 휘저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기가 어린 뺨에 와 닿는 차가운 공기에 감았던 눈을 떴다.

“푸하학!”

맥은 신나는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도현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맺힌 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가 거슬려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머리카락이 뒤통수에 착 달라붙었다.

“흐하! 어때? 시원하냐?”

맥이 비웃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도현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으면 더 만만히 본다고 했죠?”

“…뭐?”

그 순간.

도현이 팔을 쑥 뻗었다.

그리고.

“으악! 놔!”

“싫은데요?”

찰팍!

“어푸푸!”

맥이 수영장으로 끌어당겨졌다.

맥이 물 밖으로 고개를 들고 머리를 털자, 어느새 물 밖으로 나간 도현이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 맥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리허설 날, 아나콘다 같던 도현의 이중성을!

맥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현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는 맥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젖어서 축축 늘어지는 옷이 불편했다.

그러나 시도는 불발되고 말았는데,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니콜라스에게 붙잡힌 탓이었다.

행복해하는 니콜라스에 차마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도현은 다시 물속으로 입수해야만 했다.

허탈한 표정으로 물에 동동 떠 있는 도현을 맥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물속이라고 아이들이 얌전할 리가 없었다.

얌전히 수영하던 아이들은 점차 물장난을 쳤고, 마구잡이로 물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현은 물에 실컷 맞고, 실컷 먹기까지 하고 나서야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이들이 물장난을 그만두고 나왔을 땐 한창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술에 취한 몇몇 이들이 신이 나서 수영장에 뛰어들기도 하고, 저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떠들며 놀았다.

도현이 흔들의자에 앉아 달콤한 초콜릿 과자를 냠냠 먹고 있을 때였다.

“어! 우리 배우님! 내 행운의 신! 일로 와, 일로 와!”

리암이 살짝 상기된 얼굴로 도현을 불렀다.

도현의 의자에서 내려와 총총 걸어오자, 흐물흐물하게 지쳐서 잔디밭에 널브러진 맥에게도 손짓했다.

“자, 우리 맥 배우님도!”

맥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팔로 몸을 지탱하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도현과 맥이 가까이 오자 리암이 둘의 손에 논알코올 칵테일을 쥐여 주었다. 분홍색이 밑에 깔린, 아주 예쁜 칵테일이었다.

“자, 우리 영화를 이끌어 간 훌륭한 배우님들을 위해서 건배합시다!”

사람들이 모두 잔을 위로 들어 올렸다.

맥은 조금 어색한 동작으로 팔을 들었고, 도현은 능숙하게, 혹은 익숙하게 잔을 위로 치켜올렸다.

어쩜 우리 아들은 건배하는 것도 영화 속 장면 같다며 서혜나가 감탄하고 브리아나가 격하게 동의하는 것에 손을 삐끗할 뻔했지만, 간신히 못 들은 척하기에 성공했다.

밤이라 피부색이 잘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건배!”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액체가 달빛 아래서 파도쳤다.

모두에게 꿈만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 * *

달이 머리 위에 떴다.

슬슬 파티는 파장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보호자가 데리러 와서 이미 돌아갔고, 몇몇은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연 배우들의 나이가 어린 탓도 있었지만, 촬영이 끝난 지 오래되지 않기도 했고 다음 날이 월요일인 것도 한몫했다.

맥은 혼자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서혜나가 다급히 말렸다.

맥은 손님이 모두 돌아가고 나면 택시를 불러 데려다주겠다는 서혜나의 말에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었다.

찰싹.

물방울이 위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낙하했다.

맥은 묘하게 어두워진 낯으로 수영장 모서리에 걸터앉아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그는 굉장히 심란한 기분에 사로잡힌 상태였다.

‘이렇게 끝이라니.’

분명히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정말로 끝이 났음이 느껴지자, 왜 이리 아쉬운 건지.

자꾸만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맥이 고개를 들어 새삼스러운 눈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물론 시작은 반강제였지만, 솔직히 말해서 즐거웠다. 이제 와 상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그동안 신나게 노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토록 넓고 예쁜 집에서 처음 지내보았다.

셋에게는 익숙한 일인지는 몰라도, 맥은 삼 일간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질 낮은 욕설도 없었고, 모든 게 깨끗하고 청결했으며, 별것 아닌 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찰박.

맥이 발바닥으로 물을 살짝 찼다.

물방울이 잠시 알알이 비산했다가 다시 섞여 들었다.

잔잔하게 물결치는 푸른빛 탓인지.

삼 일간 동심으로 돌아가 논 영향인지.

자꾸만 감성적인 기분이 들었다.

맥은 문득 자신이 유치하다며 코웃음 쳤던 동화를 떠올렸다.

누군가 들었다면 비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지만, 맥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건 맥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맥은 감성에 젖어 자유롭게 상상했다.

신데렐라가 요정을 만나 무도회장을 갈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름다운 드레스와 유리 구두를 벗고 다시 재투성이로 돌아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동화는 정말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신데렐라는 다시 재투성이로 돌아갔을 때 욕설을 내뱉지 않았을까? 엄청난 허전함과 허탈함을 느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게 분명했다.

지금 자신이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곧 12시가 다가온다.

이젠 너무 맡아서 지긋지긋한 핫도그 냄새와 허름한 다락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맥은 우울한 낯으로 물 위에 일렁이는 달을 걷어차 일그러트렸다. 몇 번을 반복해도 다시 달은 형체를 회복했다.

맥은 달을 노려보다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고선 달빛에 취한 사람처럼 흥얼거렸다.

나는야 맥~ 재투성이라네~

재투성이~ 맥~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노래였다.

맥이 노래 부르기에 진심이 되어가던 순간이었다.

“맥.”

고저의 변화가 없는, 단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맥은 그 속에 담긴 부드러움과 다정함을 이젠 알았다.

“맥, 뭐 해요?”

도현이 맥의 옆자리에 앉았다.

맥이 물에 빠트렸던 것을 경계하는지, 조금 멀찍이 떨어진 위치였다.

맥은 애매한 거리감이 웃겨서 픽, 웃음을 흘렸다.

꼭 이 거리감이 도현과 자신의 세계 사이를 표현한 것 같았다.

맥은 지금 순간 모든 것이 자신의 처지와 연결되어 보였다.

“그냥 앉아 있었어.”

“그래요?”

“어. 너무 놀아서 피곤하기도 하고.”

“하긴. 저도 조금 졸려요.”

조금이 아닌 듯, 도현의 눈은 졸음으로 나른히 풀려 있었다.

맥은 문득 떠오른 것을 물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말하는 거예요?”

“연기 말이야.”

맥의 질문에 도현은 잠이 조금 깬 듯, 한결 또렷해진 눈을 끔뻑였다.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뭐?”

맥이 눈썹을 휙 꺾었다. 의외란 표정이었다.

“너라면 바로 다음 작품 찍을 줄 알았는데.”

“네? 그건 제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잖아요. 지원할 수 있는 역할도 있어야 하고, 있다고 해도 오디션에 합격해야 하고….”

“야. 네가 떨어지면 누가 붙냐?”

도현의 말을 끊은 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도현은 웃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쩌면 도현도 달빛에 물들었는지도 몰랐다.

“사실 이 영화도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예요. 원래 거절하려고 했거든요.”

“진짜? 왜? 너 연기하는 거 좋아하잖아.”

단언하는 말투였다.

“연기가 좋다고 해서 꼭 영화를 찍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긴 한데.”

맥이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뒤쪽으로 젖혔다.

“역시 넌 특이해.”

맥이 별이 총총 떠오른 하늘을 보며 별을 세듯 도현의 특이한 점을 셌다.

“화를 안 내는 것도 신기하고, 예의 바른 것도 신기하고, 말을 차분히 하는 것도 신기하고,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것도 신기하고, 연기를 잘하는 것도 신기하고, 바이올린을 잘 켜는 것도 신기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신기하고, 인기 많은 것도 신기하고….”

이러다가 숨 쉬는 것도 신기하다고 할 기세였다.

“그리고….”

술술 말을 하던 맥이 머뭇거렸다.

“아냐, 아니다.”

맥이 손을 휘휘 저었다. 도현이 뭐냐고 묻자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잠깐 그들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정적 사이로 맥이 말을 툭 뱉었다.

“그럼 이제 볼 일 없네.”

“네?”

“너 연기 안 한다며.”

도현은 잠시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 생각해야 했다.

“맥.”

도현은 말을 꺼내면서도 이게 맞는지 아리송했다. 아니라면 조금 창피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도현은 용기 내어 말했다.

“여름 방학에 진이랑 니키랑 같이 해변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맥의 얼굴이 퉁명스러워졌다.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맥이 속으로 툴툴거리는데, 도현이 뒷말을 이었다.

“혹시 맥도 같이 갈 수 있어요?”

“그래, 좋겠…네에?”

맥이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끄덕끄덕.

“날? 왜?”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게 아닌가?’

도현은 당황했다.

용기 내어 건넨 말에 부정적인 반응이 돌아오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전 우리가 친해진 줄 알고….”

도현이 어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뺨이 달아올랐다.

“미안해요. 부담스러웠으면 못 들은 걸로 해도 돼요.”

차분한 평소와 달리 조금 빠르게 속삭인 말이었다. 맥이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아니!”

맥이 다시 한번 강조해서 부정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 골목길에서만 해도, 아니, 서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이렇게 가까워질 줄 몰랐다.

촬영이 모두 끝이 났으니, 더는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촬영이 아니라면 맥과 도현 사이에 접점은 전무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몸이 축축 늘어졌다.

도현과의 인연이 끊기는 게, 꼭 특별했던 일상을 박탈당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맥은 생각했다.

자판기 앞에서 만났을 때 시비 걸지 말걸, 시비를 걸어도 음료수는 엎지 말걸, 리허설 때 바로 사과할걸, 촬영장에서 좀 더 친절하게 굴걸….

그랬다면 서슴없이 만나서 놀 수 있을 만큼 친해졌을지도 모르는데.

도현은 용서해 주었지만, 맥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껄끄러움이 남아 있었다.

더 친해지길 원하는 건 너무 뻔뻔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일정 선을 넘지 못하고 알짱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도현이 먼저, 애매한 거리를 한 발짝 좁혔다.

“그럼 같이 간다는 거예요?”

수영장에 담은 물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맥이 애써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뭐, 내가 같이 가주지.”

무심한 말투와 다르게, 딱 그 나이대 소년 같은 미소를 얼굴에 그린 채였다.

“맥! 이제 가자. 많이 기다렸지?”

서혜나가 미안한 얼굴로 달려왔다. 그녀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곤 짧게 혀를 찼다.

“세상에. 벌써 열두 시도 넘었네. 어머니 걱정하시겠다. 빨리 가자.”

“네. 가요.”

맥이 선선한 태도로 일어섰다. 도현이 그런 맥을 올려다보며, ‘다음에 봐요’라고 인사했다. 맥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열두 시가 지났고, 유리 구두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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