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63)화 (64/582)

제63화. 표류 (5)

마시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술을 들이붓던 리암은 한동안 연락이 어려울 거란 말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다.

도현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일상이 찾아왔다.

평범하지만, 누군가에겐 지극히 특별한 일상이었다.

이제 평화롭고 잔잔한 날들이 펼쳐질….

“아!”

도현이 비틀거리다 벽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고개를 들자 낄낄거리며 멀어지는 무리가 보였다. 최근 종종 부딪치던 무리였다.

도현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바로 섰다. 반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발을 잡았다.

“오, 이런. 너 괜찮니?”

발그스름한 곱슬머리와 코에 걸친 안경이 유독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작지 않은 키와 조금씩 여물어가는 이목구비가 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였다.

“아, 네. 괜찮아요.”

“그래? 저 애들이 치고 지나가던데…. 못된 애들이 널 괴롭히는 건 아니고?”

무리가 사라진 쪽을 노려보는 눈이 제법 매서웠다.

“괜찮아요. 가끔 치고 지나가는 게 전부인 걸요.”

“너 되게 태평한 소리를 한다! 나라면 따라가서 정강이를 걷어차 줬을 텐데 말이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도현이 가볍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가 보네! 예상과는 다른걸.”

“예상이요?”

도현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그러자 보는 사람까지 전염될 것 같은 활기찬 미소가 눈앞에 가득 펼쳐졌다.

“아차, 인사부터 해야지! 반가워! 난 앨리슨 뮐터야. 친구들은 나를 앤이라고 불러! 빨간 머리 앤의 앤 말이야! 음, 정말 내가 빨간 머리 앤이랑 닮았니?”

“…그, 전 잘 모르겠어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저는,”

“네가 누군지는 알아! 줄리엣! 맞지?”

“그건 별명이에요.”

“정말? 난 본명인 줄 알았어! 남자애라서 좀 의외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도현은 그녀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앨리슨은 말투가 몹시 빠르고, 쏘아붙이듯이 독특한 어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신문부야! 교내 이슈나 행사를 신문으로 만드는데 가끔 인터뷰도 하거든! 주로 유명인들 위주로 하는데…. 교내에서 네 이름, 아니, 별명이 심심치 않게 들리더라고. 처음엔 줄리엣이라고 해서 긴 머리카락의 예쁜 여자애인 줄 알았지 뭐니? 그런데 긴 머리카락도 아니고, 여자애도 아니잖아!”

앨리슨은 무척이나 재밌어했다. 도현은 그녀의 말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오! 내가 또 딴 길로 샜구나. 내가 하려던 말은, 그래서 이번 주제를 ‘줄리엣을 파헤쳐라!’로 할 예정이라는 거야. 혹시 협조해 줄 생각 있니? 참고로 저번달 인터뷰이는 해리 선생님이었어! 이번에 결혼하셨거든!”

도현은 당혹스러웠다.

상황과 문맥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저 ‘줄리엣을 파헤쳐라!’의 줄리엣이 자신임을 알 수 있었다.

‘나를 파헤쳐서 뭐 하려고….’

도현이 떨떠름히 생각했다.

“어때? 인터뷰할 마음이 있니?”

“거절할 수 있는 얘긴가요?”

“당연하지!”

도현이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럼 안타깝지만 네 인터뷰를 싣진 못하고, 주변인들을 인터뷰하겠지!”

“…주제를 바꿀 수는 없는 건가요?”

“음…. 미안한 일이지만, 요즘 학교에 별다른 이슈도 없고 스타도 없거든. 매일 공지 사항 같은 거나 적어서 올리니 신문부에 관심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거 있지? 그래서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정말로 안 될까요?”

도현이 우울한 기색으로 물었다.

앨리슨이 손을 허둥지둥대며 당황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

도현이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살짝 뜬 눈으로 도현을 보던 앨리슨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렇게 싫니?”

도현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자, 앨리슨의 어깨가 땅에 닿을 기세로 점점 더 내려갔다.

“그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데 할 수 없지…. 내가 마음대로 써서 올리면 널 치고 간 애들과 다를 게 없는 거잖아?”

도현에게 하는 말보단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워 보였다.

앨리슨의 눈동자를 마주 본 도현은 조금 흠칫했다. 길거리에서 비에 홀딱 젖은 처량한 고양이가 딱 저런 모양새일 것 같았다.

“시간 뺏어서 미안했어. 나 이만 가볼게.”

그리고 앨리슨은 정말 뒤돌아서 발을 옮겼다. 그 뒷모습이 너무 작아 보여서 도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앨리슨.”

“응? 왜? 아, 걱정하지 마. 주제는 바꿀 거야.”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앨리슨이 안녕, 하고 인사하며 다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도현의 입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움직였다.

“인터뷰할게요.”

우뚝.

앨리슨이 일시 정지했다. 도현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정말?”

기대 반 의심 반을 담은 눈빛이 쏘아졌다.

도현은 인정했다.

이상하게 주위에서는 차분하고 이성적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자신은 무척이나 충동적인 성격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을 물릴 수는 없었다.

생기가 도는 눈이 다시 시무룩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생각보다 재밌을 거야!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인터뷰를 해보겠니? 아! 영화를 찍었다고 했지. 그럼 할 수도 있겠구나. 더 잘됐네!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앨리슨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팔팔해졌다.

“좋은 얘기만 잔뜩 써줄게! 약속해!”

도현은 앨리슨의 화법에 완전히 휘말렸다. 어, 어 하는 사이에 약속까지 잡아버렸다.

약간 넋이 나간 채 반으로 돌아온 도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도현은 조금 멍하니 있다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혼자 왜 웃어?”

진이 의아해하며 묻자, 도현은 진과 니콜라스에게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의외로 둘은 신문부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종종 심심할 때 벽에 걸린 신문을 읽는다는 것 같았다.

“그거 인기인만 실리는 건데!”

“저번달에는 해리 선생님이 실렸다고 했는데?”

“해리 선생님 아이들 사이에서 정말 인기 많으신 분이거든! 일단 잘생기셨잖아!”

“저저번달에는 농구부 부장이 실렸고.”

진의 말에 니콜라스가 덧붙였다.

도현의 낯빛이 조금 해쓱해졌다.

‘앨리슨은 신문이 인기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들은 자신이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았다.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모두 자신의 선택이었다.

도현은 마음을 깨끗이 비웠다.

하얀 백지 같은 마음으로 임한 인터뷰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줄리엣이라는 별명은 어쩌다가 생겼는지, 이름은 뭔지, 좋아하는 건 뭔지, 영화를 찍은 계기가 뭔지 등등….

상식적이고 평범한 질문에 도현은 조금 여유를 되찾고선 편안히 대답했다.

“고마워! 신문은 다음 주에 발간될 거야! 꼭 확인해!”

“네. 알겠어요.”

손을 붕붕 흔드는 앨리슨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참!”

앨리슨이 붉은 머리카락을 휙 날리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네 사진도 신문에 넣어도 괜찮을까?”

“제 사진이요?”

“응!”

인터뷰에 사진이 들어가는 건 평범한 일이었다. 도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잘 들어가!”

“네, 앨리슨도요.”

도현은 다시 인사를 나누고, 반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걱정했던 일이 쉽게 끝났다는 생각에 개운하기도 했….

멈칫.

도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연하게 물은 질문에 자연스럽게 허락했지만, 생각해 보니 앨리슨은 도현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무슨 사진을 쓰겠다는 거지?

도현은 묘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 * *

며칠 후.

평소처럼 등교하던 도현은 유독 한 곳에 모여 있는 아이들에 의아함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눈에 들어온 광경에 뻣뻣하게 굳었다.

푸른 하늘과 떨어져 내리는 꽃비, 기쁨과 행복으로 수줍게 웃는 소년의 사진은 따뜻한 햇빛이나, 깨끗한 바람 냄새가 날 것 같았다.

그 소년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 사진은 대체 어디서 난 거야.’

도현이 망연히 생각했다.

총체적으로 문제가 아닌 부분이 없었다.

일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것도 그랬고, 그 위에 위풍당당하게 쓰인 ‘줄리엣을 파헤쳐라!’도 그랬다.

도현이 느낀 불안감이 실체화된 순간이었다.

물론, 사진을 써도 되겠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대답하긴 했다.

그러긴 했으나!

그 사진이 저 순간일 줄은, 그리고 이렇게까지 눈에 띄는 크기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현이 한동안 멈춰 서 있자, 하나둘씩 시선이 모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도현이 몸을 휙 돌려 반으로 향했다. 발을 내딛는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빨랐다.

그러나 반으로 도망친다는 생각이 굉장히 일차원적이었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안녕! 줄리엣!”

교실에 들어오는 족족, 아이들은 도현에게 크게 인사했다.

뒤늦게 등교한 진과 니콜라스도 ‘안녕, 줄리엣!’이라고 외치고는 쓰러졌다.

도현은 둘이 포복절도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인터뷰가 이렇게 영향력이 클 줄이야.’

사진이 준 시각적 충격 탓이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한 도현이었다.

그날, 도현의 별명은 전교에 파다하게 퍼졌다.

쥐구멍에라도 숨어 들어가고 싶어서 시선을 미묘하게 바닥에 고정하고 다니던 도현은 점심시간쯤에는 해탈의 경지에 올랐다.

“줄리엣!”

“응, 안녕.”

이젠 여유롭게 인사를 돌려줄 수 있을 정도였다.

도현의 옆에서 음료수를 쪽쪽 빨아 먹던 진이 투덜거렸다.

“도리는 줄리엣이 아니라 도리토스인데 말이지.”

도현은 잠시 지나가던 사람들이 제게 ‘안녕! 도리토스!’라고 인사하는 상상을 해보다가, 몸을 살짝 떨었다.

진과 니콜라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금이 나은 것 같았다.

앨리슨은 도현의 별명이 일파만파 퍼지고 정확히 그다음 날, 도현을 찾아왔다.

“고마워! 네 덕분에 완전 대박 났어! 인터뷰가 이렇게 주목받은 건 처음이야!”

정확히 도현이 불행한 만큼 앨리슨은 행복한 것 같았다.

도현은 그래도 한 명이라도 행복해서 다행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싱글벙글 웃으며 칭찬과 자기 자랑을 쏟아내던 앨리슨이 도현의 옆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진과 니콜라스를 보며 물었다.

“얘네들이 네가 친하다고 했던 친구들이니?”

“네. 진이랑 니키요.”

“그래? 진, 니키 안녕! 내가 과자 사 왔는데, 셋이 나눠 먹어! 아 참, 과자는 내 마음대로 골랐는데 혹시 싫어하는 종류는 아니지?”

니콜라스가 봉지를 뒤적뒤적하다가, 도리토스 한 봉지를 발견하곤 도현의 앞에 흔들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네!”

“나 먹어본 적도 없는….”

“그래? 다행이다! 내가 잘 골랐나 보네. 걱정했는데 말이지!”

몇 차례 더 말을 쏟아내던 앨리슨은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총총 걸어 나갔다.

붉은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도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닫힌 문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보던 진이 말했다.

“쟤 말 진짜 빠르다. 붉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꼭 빨간 머리 앤 같아!”

“빨간 머리 앤이 별명이래.”

“어, 진짜?”

진이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신기해!’라는 말을 남발하는 진은 앨리슨이 마음에 든 기색이었다.

“관찰하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든 게 친구로서인지, 관찰 대상으로서인지는 조금 애매했지만 말이다.

우적. 우적.

아무래도 좋았던 니콜라스는, 도리토스를 뜯고선 한입 가득 털어 먹고 있었다.

너무 맛있게 먹어서 도현은 니콜라스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가 도리토스가 아닐까, 합리적인 추측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럼 가장 좋아하는 과자를 별명으로 붙여준 건가?’

도현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혹시 이 별명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나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니콜라스를 관찰하던 도현은.

“우버, 으부버? (과자, 안 먹어?)”

맹한 얼굴로 와작와작 과자를 씹어 먹는 니콜라스에 자신이 너무 나갔음을 깨달았다.

“나도 줘.”

도현이 손바닥을 내밀자 니콜라스가 도리토스를 한 움큼 쥐어서 손바닥 위로 쏟아 주었다.

와작!

혀 위로 짭조름한 맛이 감돌았다.

‘맛이 너무 강한 거 아닌가?’

도현이 눈가를 찡그리며 오물오물 씹었다. 한 조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잘 모르겠으니 하나만 더 먹어보자.’

아작!

아작, 와작, 우그작!

손바닥 위를 더듬었지만, 어느새 텅 비어 가루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좀 짜긴 하지만 먹을 만은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