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표류 (6)
아이들은 그렇게 과자를 한 봉지, 두 봉지… 계속해서 야무지게 까먹었다.
미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자꾸만 손이 갔다.
새로운 봉지를 하나 더 까고 먹으려던 때였다.
“자자, 자리에 앉아봐요!”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던 줄리아가 손뼉을 쳐서 아이들을 집중시켰다.
니콜라스는 재빨리 과자를 숨겼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이자, 줄리아가 ‘흐흠’ 소리를 내며 허리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오늘부터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게 있어요! 뭘까요?”
‘준비해야 하는 거?’
도현이 갸웃하는데, 재키가 손을 번쩍 들고선 말했다.
“오픈 하우스요!”
“맞아요!”
줄리아가 잘 맞췄다며 재키를 칭찬했다.
“그동안 갈고닦았던 음악 수행 평가도 이날 하는 거 모두 기억하고 있죠?”
까먹고 있었다.
“곧 있으면 부모님이 학교에 방문하셔서 우리 친구들이 잘 지내고 있나 보러 오는 날이에요. 우리 반은 음악 수업 시간에 오픈할 예정인데, 우리 친구들을 보러 학교에 와주시는 부모님을 위해서 예쁜 그림도 그려서 반에 전시할 거예요!”
따지고 보면, 영화 촬영장에 구경 왔을 때랑 별반 차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도현은 이쪽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진과 니콜라스를 흘끔- 곁눈질해 보았지만, 둘은 딱히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해 보였다.
아니, 어쩌면 관심이 향한 곳이 따로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봉지 틈 사이로 맛있는 냄새를 폴폴 풍기는 과자를 아닌 척 주시하고 있었다.
진과 니콜라스는 서랍 아래에 있는 과자를 보고, 도현은 그런 둘을 보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도현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 들켰나 싶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림 주제는… ‘들꽃’이에요!”
쿵, 쿵.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줄리아가 자꾸만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들킨 걸까?
냄새가 났나?
아니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 건가?
긴장으로 땀이 난 손을 말아 쥐는 도현과 달리, 줄리아는 흐뭇한 심정이었다.
줄리아가 들꽃을 주제로 정한 건 도현의 영향이 컸다.
지난 미술 시간에 도현이 그린 들꽃이 큰 감명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도현도 줄리아의 뜻을 짐작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아주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줄리아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꽃이라곤 했지만, 어떤 꽃이든 좋아요. 선생님이 나눠주는 종이에 하모니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꽃을 그리고, 옆에는 좋아하는 글이나 편지를 쓰는 거예요!”
도현은 고민했다.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는 건, 눈감아 줄 때 자진 납세하라는 뜻일까? 아니면 저 시선에 다른 의미가 있는 걸까?
도현이 치열하게 줄리아의 눈빛을 분석하고 있는 동안, 줄리아는 가장 기대되는 활동을 말했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 종이를 붙여서 벽 전체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그림도 그릴 예정이랍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재밌을 것 같다고 웅성거렸다. 줄리아는 뿌듯함을 느꼈다.
한쪽 벽면이 아이들이 그려놓은 꽃으로 가득 차면 얼마나 압도적일까!
상상만으로도 설렜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줄리아가 오늘따라 든든하게 느껴지는 도현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도현도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려 화답했다.
‘역시!’
줄리아는 도현이 자신의 눈빛을 알아들었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도현이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이미 다 눈치채신 것 같았다.
도현의 눈에 체념의 빛이 감돌았다. 모든 걸 포기하고, 털어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종이 가지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어디 나가지 말고요!”
줄리아가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반을 나갔다.
도현이 줄리아가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십 초간 문을 주시하던 도현은.
“하아….”
긴 숨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도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늘어졌다.
‘들킨 게 아니었어.’
과자를 들켰다면, 이렇게 방치하고 나갈 리가 없었다.
허탈하기도 하고, 다행이다 싶기기도 했다.
고개를 돌리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진과 니콜라스가 그저 시시덕거리며 부스럭부스럭 과자를 꺼내 먹고 있었다.
도현도 증거 인멸을 위해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과자는 아이들의 뱃속으로 안전하게 이동되었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줄리아가 돌아왔다.
도현은 입가에 묻은 가루도 없음을 확인하고 이내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줄리아는 아이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종이를 받은 아이들은 줄리아의 인도에 따라 졸래졸래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줄리아의 지시에 따라, 주위에 핀 꽃 중에서 마음에 드는 꽃 앞에 가서 주저앉았다.
도현 외 두 명도 옹기종기 모여 자리 잡았다. 그들이 뽑았다가 도로 심은 전적이 있는 꽃 앞이었다.
“내가 노란 꽃 할게.”
“나는 그 옆에 잔디!”
“주제는 들꽃인데?”
“잔디만 따돌리면 불쌍하잖아!”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진이었다.
도현은 아까부터 유독 눈에 밟혔던 분홍색 꽃을 그리기로 했다.
엄마가 잘 말려주어서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 꽃과 같은 종류의 꽃이었다.
도현은 연필로 연하게 밑그림을 그렸다.
눈썹을 살짝 찡그리면서 깊이 집중하던 때였다.
“줄리엣! 이거 어때?”
쪼르르 달려온 아이가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앙증맞은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응, 예쁘다.”
도현이 칭찬하자 아이가 기뻐하며 줄리아에게 달려갔다.
도현은 다시 자신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밑그림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으니 이제 색연필로….
“줄리! 여기는?”
좀 더 옅은 색 표현을 위해 손목에 힘을 빼고….
“줄리! 줄리엣!”
아, 나구나.
도현이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던 사실을 깨달으며 고개를 들자, 미술 시간에 대화를 나눈 걸 계기로 꽤 친해졌던 재키가 제 그림을 보여주었다.
울부짖는 파란 곰팡이가 있었다.
“…꽃 멋지네.”
잠깐, 꽃이 맞겠지?
“앗! 진짜? 통과다!”
맞는 것 같았다.
어째서 통과를 줄리아에게 받지 않고 자신에게 받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며 다시 그림을 그리려는데.
“줄리엣! 여기도!”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도현이 조금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저기…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너한테 통과받아야 한다는데?”
“누가?”
“몰라! 그냥 애들이!”
도현은 상황을 이해하길 포기하곤, 찾아오는 아이들마다 칭찬을 들려주었다.
똑같은 대답을 하는 건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서 귀엽다, 매력적이다, 개성이 돋보인다, 강렬하다, 감각적이다, 독창적이다 등등… 온갖 감상평을 쥐어 짜내야만 했다.
옆에서 모든 과정을 보고 있던 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도리, 인기 많네!”
도현은 지쳐 보였지만….
‘괜찮은 분위기야.’
진은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판단했다.
도현은 반짝반짝 빛나 시선을 끄는 반면에 차분하면서 묘한 분위기 탓에 다가가기 쉽지는 않았다.
이처럼 원래도 도현을 어렵게 여기던 아이들이 많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촬영 일정 탓에 수업을 자주 빠지며 그 거리감이 더욱 커졌다.
그런 상황이 어제를 기점으로 뒤집혔다.
신문의 영향으로 반 아이들이 도현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이네.’
진이 축 늘어진 도현을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 *
유난히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곧장 바이올린을 들고 연습실로 향했다.
며칠 후에 할 녹음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촬영 기간에는 연기에 신경이 쏠려, 아무래도 바이올린에는 소홀한 감이 있었다.
도현은 조금 반성하며, 하교 후 시간부터 엄마의 퇴근 시간까지 꾸준히 바이올린을 켜는 중이었다.
슥, 슥.
도현은 바이올린을 손질하면서 생각했다.
‘촬영이 끝났는데, 여전히 바쁘고 다사다난한 것 같네.’
손질이 끝난 바이올린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자세를 잡았다.
도현을 괴롭히던 거부감과 죄책감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익숙했다.
그저 잘 다듬어진 나무일 뿐인데 어딘가 묘한 애틋함과 친근함까지 느껴졌다. 이 매끄러운 바이올린이 꼭 오랜 시간 함께한 가족 같았다.
‘형에겐 가족이나 다름없었겠지.’
도현은 정장을 빼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도현에게 상속되기로 한 유산이라며 바이올린을 건넸던 때를 떠올렸다.
그땐 그냥 화가 났는데….
지금은 가장 소중했을 가족을 제게 주었다는 사실이 애틋하다.
도현은 음을 길게 늘어트렸다.
맑고 선명한 소리가 차올랐다.
심장보다 더 깊은 어딘가를 간질이는 음색에 어째서 형이 이 바이올린을 아꼈는지 알 것 같았다.
도현도 이 바이올린이 정말 많이 좋아질 것 같으니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함께하고 싶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도현의 마음을 읽었는지, 바이올린이 화답하듯 더 맑은 소리를 내었다.
도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녹음 대비로 시작했던 연주는 갈수록 목적을 잃었다. 사실, 파티가 끝난 후부터 늘 그랬다.
도현은 좀 더 마음껏, 충동이 이끄는 대로 연주를 했다.
형의 연주는 특별했다.
연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봄을 연주할 때도 하나의 봄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잘 관리된 꽃들이 있는 유리 온실의 봄, 비바람이 치는 숲에 찾아온 봄, 노란 갈대밭을 감싸는 봄, 건물의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를 밝힌 봄….
연주를 들으며 상상할 때면 정말로 형이 그려낸 세계에 발을 담근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모든 연주가, 도현과 희성에겐 짧은 여행이었다.
슬픔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더 열심히 연주했다.
* * *
“잘 다녀와, 아들!”
서혜나가 자동차 차창을 내리곤 손을 흔들었다.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에 봐요.”
“그래!”
검은 차가 멀어졌다. 도현은 등교하는 아이들 사이에 섞여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런데.
키득키득.
몇몇 아이들이 도현을 보며 웃었다.
단순히 웃는 것이라면 ‘줄리엣 사건’ 탓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뭔가, 미묘하게 거슬렸다.
도현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간 도현은, 그 원인을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도현이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야아!”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등장한 앨리슨이 머리카락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성을 냈다.
“누가 내 신문에 이딴 짓을 해놨어!”
위로 치켜 올라간 눈과 씩씩거리는 숨이 앨리슨의 기분을 그대로 드러냈다.
“내가,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남이 열심히 만든 거에 어떻게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할 수가 있어!”
한참이나 게시판 앞에서 화를 내던 앨리슨은, 그 뒤에서 멀뚱히 서 있는 도현을 뒤늦게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줄리엣!”
앨리슨은 곧장 도현에게 달려왔다.
“줄리엣! 여기 말고, 다른 쪽으로 돌아가! 음…. 여기는 길이, 길이….”
“이미 다 봤어요.”
“어어, 그, 그러니?”
당황한 듯 허둥지둥하던 앨리슨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속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미안.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잡으면 교문 앞에 거꾸로 매달아 놓을게. 진심이야. 맹세해!”
“…그러면 큰일 나지 않을까요?”
“아니! 큰일은 이미 났어! 저게 신문부와 척지겠단 소리가 아니면 뭐겠어! 신문부가 만만해 보였나 보지? 한두 번이 아니야! 인터뷰 사진 올라올 때마다 꼭 이렇게 낙서하는 애들이 있다니까!”
앨리슨의 말을 들어보니, 이게 딱히 특별한 경우는 아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열불을 내던 앨리슨은 흥분이 가라앉고 나자 도현의 눈치를 봤다.
“저… 너는 괜찮아? 미안. 내가 괜히 인터뷰하자고 해서…. 기분 나빴지? 아니, 내가 당연한 소리를! 당연히 나빴겠지!”
“괜찮아요.”
놀라긴 했지만… 놀랐을 뿐이었다.
“일단.”
“이, 일단?”
“저것부터 떼죠.”
“아! 그래야지! 깜빡할 뻔했네!”
앨리슨이 울상을 지으며 신문을 떼어냈다.
…아니, 울상이 아니라 음산한 표정으로 저주의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린 것도 같았다.
주섬주섬 떼어낸 자리가 텅 비어 어딘가 휑해 보였다.
“이번에야말로 꼭…! 꼭 누군지 찾고 말겠어!”
앨리슨은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녀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도현을 홱- 돌아보았다.
“너도 범인을 잡는 데 협조할 거지?”
“…음.”
도현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앨리슨이 화가 난 건 이해하지만, 도현은 꽤 바빴다.
쉬는 시간에는 벽화를 그렸다.
줄리아 선생님이 미리 공지했던 들꽃을 주제로 한 벽화였다.
게다가 하교 후엔 녹음이 예정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심력 소모는 삼가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별다른 흥미가 일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하는 작태가 너무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위에 한 낙서나 글도 딱 어린아이 수준이라 도현으로선 화도 나지 않았다.
그다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도현은 이 일을 가볍게 넘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