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표류 (7)
예상치 못한 거절에 질질 매달리던 앨리슨은, 도현이 완고한 태도를 보이자 결국 포기했다.
터덜터덜 사라지는 앨리슨을 배웅하고 나서, 도현도 반으로 들어갔다.
“어! 줄리엣, 왔어?”
“응. 안녕.”
도현은 자연스럽게 화구를 챙겨 종이를 붙인 벽으로 갔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장인의 마음으로 세심하게 그려 넣고 있을 때였다.
“도리야아!”
누군가 뒤에서 도현을 덮쳤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진, 좋은 아침.”
“그게 문제가 아니야아! 네 사진에 누가 낙서했다며!”
도현이 쭈그려 앉은 자세에서 일어나자 도현의 등에 달라붙어 있던 진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들었어?”
도현이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살짝 긁었다.
“당연하지! 오늘 와 보니 게시판이 텅 비어서 깜짝 놀랐단 말야! 그 사진은 예술 작품이나 다름없었는데, 누가 감히 그런 짓을…!”
분노의 방향이 조금 이상했다.
“분명히 네 미모를 질투한 애가 틀림없어!”
진은 종종, 아니 사실 자주 도현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럴 때마다 도현은 어색하면서도 의아했다. 혹시 놀리는 건가, 싶어서 의심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도현의 외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칭찬한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적어도 도현이 겪고 느낀 바로는 그랬다.
어렸던 아이는, 주위의 무관심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갔다.
도현은 제 외모에 관심도 없었고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이런 칭찬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돌려주는 게 적절한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은 말을 돌리기를 택했다.
“별일 아냐.”
“별일 아니긴 무슨!”
“장난으로 한 거겠지. 솔직히 내 사진이 너무 눈에 띄긴 했잖아.”
진은 기분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도현이 자신은 괜찮다며 성난 진을 간신히 달래놓고 숨을 돌리는데, 어느새 옆에 와 있던 니콜라스가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일부러 너한테 엿 먹이려고 그런 거면 어쩌려고?”
“앨리슨이 인터뷰 사진에 낙서하는 경우가 많다고 그랬어.”
도현의 말에 니콜라스가 반박했다.
“걔네들 있잖아! 너만 보면 자석처럼 끌려와 부딪치고 가는 애들! 걔네가 일부러 한 짓 아니야?”
자석이라니.
우스운 표현이었다.
니콜라스의 말이 영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정말이래도, 나는 날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신경을 쏟고 싶지 않아.”
진과 니콜라스는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어쩌면 둘의 반응이 정상적일 수도 있었다. 아니, 저 반응이 일반적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현은 정상적이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은 성장 과정을 거쳤다.
오래 산 건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많은 일을 겪었다. 어쩌면 남들은 겪지 않을 일들도.
도현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 혐오감을 표출하거나, 부정적인 어휘와 행동을 가한 사람들도 많았다.
도현은 그들에게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마음이 넓거나 겁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일일이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일일이 받아치다가는 신경 쇠약에 걸리거나 엄청난 싸움꾼이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둘 다이거나.
도현이 무심하게 생각했다.
이런 관조적인 태도는 불완전한 영혼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삶의 요령이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진과 니콜라스의 눈에는 한없이 태평하고 느긋하게 비쳤다.
“그렇게 그냥 넘기다 보면 별일 아닌 것도 큰일이 된다, 너?”
니콜라스가 뼈 있는 지적을 했다. 그 표정이 진지해서 도현도 잠깐 고민이 들긴 했지만.
‘역시 불쾌한 일에 굳이 마음 쓰긴 싫어.’
도현도 은근히 고집이 있었다.
진과 니콜라스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 * *
아니, 백기를 든 줄 알았다.
지잉-
[맥 버클러 : 야. 내가 호구 짓 하지 말랬지?]
‘설마 지원군을 요청했을 줄이야.’
[맥 버클러 : 평소엔 그렇게 똑똑한 녀석이]
[맥 버클러 : 이럴 때만 꼭 바보처럼 굴지.]
‘바보는 아닌데.’
도현의 입술이 미묘하게 튀어나왔다. 도현이 열심히 타자를 눌러 그의 말을 반박했지만.
[맥 버클러 : 퍽이나.]
곧바로 돌아온 답장은 단호했다.
맥은 가끔, 무척이나 칼 같을 때가 있었다.
도현은 조금 머쓱한 기분이 되어 핸드폰을 보다가 화면을 껐다.
그리고 때맞춰.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촬영 때 동시 녹음했던 현장 소리를 기초로 바이올린 소리만 후시 녹음으로 따로 딸 예정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왈트가 이미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현의 인사에 왈트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도현은 속지 않았다.
담백한 인사와 달리, 눈빛에는 명백한 긴장과 흥분의 기색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도현과 왈트는 영상을 돌려 보며 어떻게 소리를 내야 할지 타이밍과 속도를 숙지했다.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성우가 녹음하는 방식과 조금 비슷했다.
녹음이 시작되자.
리암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바이올린으로 연기했다.
마치 ‘나는 연기자야’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음조차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순간부터 처음으로 선명한 음색을 내고 이어 서툴게나마 음악의 형태를 그리는 것까지.
유의 성장 과정이 도현의 연주에 담겼다.
도현에게 연기자로서 감탄한 리암과 달리 왈트는 오로지 바이올린 실력에만 집중했다.
이렇게 띄엄띄엄, 초보자의 실력을 가장한 연주 말고 제대로 된 연주를 듣고 싶었다.
제대로 된 연주를!
지극히 맑고 선명하면서도 끝 처리가 미묘하게 거친 음색을 듣고 있자면 충족감과 동시에 갈증이 일었다.
“조금 쉬었다 하죠.”
리암이 왈트에게는 커피 한 잔을, 도현에게는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왈트는 도통 도현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 바이올린.”
“네?”
도현이 흠칫했다.
‘설마… 형의 바이올린을 알아본 건가?’
도현이 긴장하려던 찰나.
“왜 몸에 맞지 않는 바이올린을 쓰죠?”
도현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이 바이올린이 형 것임을 알게 된다면….
절레절레.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인가요?”
도현이 고개를 젓는 걸 대답하기 싫다는 뜻으로 이해한 왈트가 그리 물었고.
도현은 정신을 차리곤 대답했다.
“선물받은 거라 그래요.”
“그래도 몸에 맞는 사이즈를 쓰는 게 좋을 텐데요. 꽤 키가 크고 팔이 긴 성인이 쓰던 것 같은데… 지금 당신에겐 맞지 않아요.”
“그래도 이 바이올린이 아니면 의미 없어요.”
도현의 단호한 대답에 왈트가 눈가를 조금 찡그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괜히 참견했군요. 그럼 바이올린은 누구한테 배웠죠?”
왈트는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촬영 내내 담백했던 태도와는 상반되었다.
도현은 침묵했다.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없었다.
형과 있을 때도 형의 연주를 듣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지, 바이올린을 직접 켜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될 일이었지만….
지긋.
‘믿어주지 않을 것 같네.’
도현이 왈트라도 믿기 어려울 것 같았다.
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가 아무런 가르침도 없이 프로 바이올리니스트 수준의 실력을 가졌다니, 그게 무슨 꿈같은 소리인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왈트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포기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요…. 조심성이 많은 친구로군요.”
그리 말하면서 가늘게 뜬 눈이, 정말 조심성이 많은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에게 말해주기 싫어하는 건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왜 연주자라는 걸 비밀로 하려는 거죠?”
도현이 리암에게 내걸었던 조건 두 가지.
하나는 왈트가 이사야 역할을 맡는 것이었고, 하나는 크레딧에 올릴 바이올리니스트에 가명을 적는 것이었다.
실상, 도현이 연주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다는 부탁이었다.
비록 도현이 충동을 참지 못해 마지막 연주에서 직접 바이올린을 켜긴 했지만….
리암이 스태프들에게 함구해 달라고 부탁했고 실제로 파티에서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도현은 두 달 가까이 같이 지냈던 사람들을 믿었다.
“저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배우로서 작품에 참여한 거니까요.”
바이올린 실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형의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굳건했다.
수행 평가나 영화에 소리를 싣는 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박아 세상에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생각한 것이 이니셜 ‘H’.
리암은 이도현의 H로 받아들이고 도현에게는 정희성의 H인 알파벳이었다.
도현의 대답에 왈트는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그와 반대로, 도현의 대답을 신인 연기자의 패기와 열정으로 받아들인 리암은 아쉬워하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 *
유와 이사야가 바이올린을 켜는 장면의 소리는 모두 땄다.
이제는 마지막 장면.
도현이 라이브로 연주했던 장면을 녹음할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녹음했던 <달빛>을 듣던 왈트가 눈시울을 붉혔다.
“오, 신이시여.”
그는 감탄사를 터트리다가, 긴 숨을 내뱉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 <달빛>은 정말… 정말 완벽하군요…. 현장에서 들을 수 없었던 게 통탄스러울 정도야.”
왈트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는 일견 황홀하기까지 한 기색이었다.
도현은 왈트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내 결론 내렸다. 흐릿하게 갈피가 잡히던 것이 드디어 선명해졌다.
도현은 확신했다.
‘형 팬이구나.’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도현에게서 형을 떠올린 점이나, 연주 스타일이 같다는 것에 과도한 반응을 보인 점, 도현의 연주에 이토록 집착하는 점까지.
‘엄청난 열성 팬이구나.’
도현은 납득했다.
왈트는 이제 도현에게 의뭉스럽고 수상쩍은 인물이 아닌, 팬심을 숨긴 바이올린 광으로 보였다.
생각의 정리를 끝낸 도현은 왈트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대신 묘한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도현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때와 같은 연주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으음… 역시.”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도현이 의아해하자.
“그런 연주를 똑같이 두 번이나 할 수 있다면, 이쪽이 더 놀랐을 거다. 그 정도는 이미 감안하고 있어.”
리암이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당시 도현의 연주는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이라는 말 외엔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자연재해처럼 몰아친 심상은 단숨에 사람들의 넋을 빼앗아 갔다.
<달빛>이 울리는 내내, 그들은 무력하게 서서 도현이 펼치는 세계에 빨려 들어갔다.
“혹시 모르니 녹음을 해두긴 하는데, 아마 영화에 삽입될 소리는 그때 현장에서 녹음한 소리가 될 거야.”
“아.”
도현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는 단순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연주자의 감정이 배어들어, 그것이 악기라는 매개체를 타고 청각적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때 연주는 그 순간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럼 이 연주만 하면 다 끝나니까, 마지막까지 힘내서 해봅시다.”
리암이 도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제 딴에는 살살 두들긴 거겠지만, 솥뚜껑 같은 손이 여린 어깨를 치니 도현은 잠시 휘청여야 했다.
도현이 연주한다는 소리에 왈트가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그게 꼭 신의 기적을 목전에 둔 사람 같은 맹목을 담고 있어서 도현은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이어.
두 번째 <달빛>이 이번에는 낡은 건물 옥상이 아닌, 작은 실내에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