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66)화 (67/582)

제66화. 표류 (8)

리암은 연주하는 도현을 보았다.

바이올린을 손에 쥘 때면, 도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평소의 차분하고 단정하던 모습이 환상처럼 느껴질 만큼 거칠고 사나웠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연주하더라도 묘하게 날것의 느낌이 있었다.

리암은 그것이 기술적인 미숙함 탓인지, 혹은 도현이 의도한 것인지 헷갈렸지만 분명한 것은 그조차 하나의 음악으로 느껴진다는 거였다.

리암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음향 장비가 들어찬 작은 방이 아니라 도현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조금씩 영역을 넓혀갔다.

그날 밤의 연주는 거칠게 몰아친 선율이 날카로운 갈퀴로 속을 무자비하게 긁어내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푸른 호수에 비친 하얀 달처럼 묘려하며 불안하게 일렁였다.

좁고 답답한 실내가 아니라, 푸른 나무들이 우뚝 솟은 숲속의 호숫가에 앉아 달빛을 내리쬐는 느낌이었다.

한없이 온몸을 적시는 충만함과 처연한 달빛에 알 수 없이 아릿해지는 마음.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이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느낌은 완전히 달랐지만, 이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잘 어울릴 것이 분명했다.

연주가 끝나고.

리암과 왈트는 천천히, 여운에서 빠져나왔다.

“후우….”

리암이 숨을 뱉어내고서 낯빛을 굳혔다. 표정이 심각해 보여서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음에 안 들었나?’

생각해 보니 너무 잔잔하게 연주한 것 같았다.

좀 더 격렬하고 동적으로 다시 해야 하나, 생각하던 때였다.

“곤란해, 곤란해.”

“왜요? 혹시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아니. 이렇게 잘해버리면, 안 쓰기도 너무 아깝잖아!”

아, 그런 뜻이었구나.

리암은 정말로 아까운지 한숨만 푹푹 쉬어댔다.

“오오…. 내 생에서 두 번째로 완벽한 <달빛>이야!”

아마도 첫 번째는 도현이 옥상에서 연주한 <달빛>인 것 같았다.

감격에 젖은 왈트에, 도현은 작게 웃었다.

그들은 녹음이 모두 끝나고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왈트의 무한한 관심과 도현의 철벽, 그리고 리암의 주접이 이루어진 환장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도현은 귀가할 수 있었다.

“이젠 진짜로 나중에야 보겠구나.”

리암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가 완성되길 기다릴게요.”

“흐하! 그래! 네가 실망하지 않을 만큼 좋은 영화를 만들어 오마!”

도현이 리암을 따라 웃었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도현에 대한 믿음을 쌓은 리암처럼, 도현도 리암을 믿고 있었다.

그가 가져올 결과가 기대되었다.

도현은 리암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둔중한 차가 완전히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서 있던 도현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도현보다 먼저 집에 와 있었던 서혜나가 도현을 반겼다.

“잘하고 왔니?”

“네. 재밌었어요.”

“수고했어. 장하다, 우리 아들. 그래도 많이 섭섭하겠네. 촬영하는 거 많이 좋아했잖아. 다 끝났다고 하니 조금 허전하지?”

서헤나의 손이 도현의 머리 위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칭찬과 위로의 의미였다.

도현은 머리를 스쳐 간 온기에 눈을 깜빡이다가.

“…네. 근데 괜찮아요.”

눈을 둥글게 접으며 웃었다.

* * *

요즘 하모니 반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나가 놀지 않는다.

“어때! 내 해바라기!”

“내 튤립은 파란색이야!”

“나는 보라색!”

벽화를 채워 나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싶은 꽃을 마음껏 그리라고 말했고, 아이들은 그 말을 성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작고 커다란 색색의 꽃들이 한쪽 벽을 잔뜩 채워갔다.

거기서 중심을 잡는 건 어쩌다 보니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 자리라는 요상한 감투를 쓰게 된 도현이었다.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의 자리는 그 이상한 이름과 다르게 꽤 책임이 막중했다.

일단, 아이들이 나무를 본다면 도현은 숲을 보아야 했다.

신나게 여기저기 그린 꽃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푸른 잔디나 하얀 구름 따위를 그려 넣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커다란 난관이 있었으니.

“후히힉! 흐후히히!”

잔뜩 신나서 그리는 것까진 좋은데, 어째서 꽃에 이빨이 달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지옥에 사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케르베로스 꽃(?)을 그려 넣겠다는 아이를 간신히 말려, 한 줄기에 세 개의 꽃망울이 달린 나름 평범한 꽃을 그리도록 유도했다.

이빨은 뾰족한 꽃잎으로 탈바꿈했다.

도현이 안도의 숨을 뱉으려는 찰나.

“내 꽃은 바이러스에 오염된 꽃이야!”

말라비틀어진 검은 꽃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삐쩍 마른 몰골이 정말 바이러스라도 걸린 듯이 처참했다. 도현은 정말이지, 아이들이 창의성이 넘친다고 생각했다.

‘이게 몇 번째지.’

도현은 숫자를 세보려다가 포기했다.

초등학교 교실에선 생각보다 별의별 기상천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빨간색으로 칠하려고 했는데 실수로 노란 선을 그었다며 울먹이는 아이를 달래고 온 줄리아가 부드럽게 재키를 타일렀다.

“바이러스에 걸리면 꽃이 너무 불쌍하잖니.”

“이건 가짜 꽃이니까 괜찮아요!”

재키는 똑똑했다.

재키가 ‘알 건 다 안다’라는 눈빛으로 줄리아를 올려다보자, 줄리아는 당황했다.

사정없이 동요하는 눈동자를 보고 있던 도현이 침착하게 재키를 불렀다.

재키와 줄리아의 시선이 도현에게 향했다.

“무슨 바이러스에 걸린 거야?”

“무슨 바이러스냐니?”

“종류가 있잖아. 바이러스도.”

“음…. 으음.”

끙끙대던 재키가 생각이 났는지 크게 외쳤다.

“그럼 나는… 좀비 바이러스!”

도현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좀비의 특징을 빠르게 떠올리는 중이었다.

느리게 움직이고, 자아가 없고, 식욕이 왕성하고, 공격력이 높고, 몸이 부패하고, 소리를 잘 듣고….

도움 되는 내용이 없었다.

도현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좀비 바이러스와 가장 유사한 바이러스가 광견병 바이러스인 거 알아?”

재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좀비 바이러스가 가진 특성이 광견병 바이러스와 흡사한 부분이 많거든. 예시로, 광견병 바이러스에 걸리면 이 바이러스가 신경관을 타고 뇌까지 올라와. 그때부터 열이 나거나, 감정적인 변화를 겪고 나아가 발작까지 일으키게 돼. 뇌에 염증이 생기면서 성격적인 변화도 생기는데, 우리가 아는 좀비처럼 공격성을 띠게 되는 거야.”

재키와 줄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한 박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 뇌의 염증으로 인해 성격 변화를 비롯해 정신 착란이나 공격성까지 띠게 되는 건데 꽃에는 뇌가 없거든. 꽃은 다른 꽃을 물거나 공격할 수 없다는 소리야.”

“고, 공격은 못 해도 오염될 수는 있잖아!”

재키가 항변했다.

도현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광견병 바이러스의 숙주는 개, 늑대, 여우, 너구리 같은 포유동물이거든. 포유동물은 포유강에 속하는 동물을 일상적으로 일컫는 말인데, 가장 큰 특징은 척추가 있는 동물이라는 점이지. 그리고 안타깝지만, 꽃은 척추도 없고 동물도 아니야.”

재키와 줄리아가 질린 표정을 짓는데, 도현이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꽃은 좀비 바이러스에 오염될 수 없다는 거야.”

재키가 입을 헤벌리고 쳐다보는데, 도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이해하기 어려우면 다시 설명….”

“나, 나 건강한 꽃 그릴래! 건강한 꽃이 좋아!”

재키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건강이 정말 중요하지.”

도현이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바들바들 떠는 재키와 그 옆에서 상냥하게 검은색이나 남색으로 덧칠하는 게 좋겠다며 조언하는 도현을 보던 줄리아가 깨달았다.

도현은 프로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현이 옅게 웃자, 줄리아는 마음 깊이 탄복했다.

은근슬쩍 도현의 옆에 다가간 줄리아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공손하게 물었다.

도현이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 자리를 맡은 후, 여러 가지 일을 함께 겪으며 묘하게 도현을 동갑내기 비스무리하게 느끼게 된 줄리아였다.

그에 도현은 창의성을 다른 방향으로 발휘하도록 방향을 틀어주거나, 그게 어려울 것 같으면 방금 한 것처럼 혼란을 주어서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된다는 팁을 주었다.

여유와 유능함이 폴폴 풍겨 나오는 모습에 줄리아가 감탄한 얼굴로 끄덕끄덕하며 존경의 의사를 표현했다.

역시, 나보다 더 똑똑한 것 같았다.

* * *

도현은 이제 거의 꽉 찬 벽화를 보았다.

‘정말 다사다난했지….’

군데군데 함정이 조금 있긴 하지만, 얼핏 보기엔 꽤 멋졌다. 도현은 조금 뿌듯해졌다.

단순히 도현이 혼자 그린 그림이 아니라, 반 친구들이 다 같이 노력한 결과물이라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도리야! 뭐 해! 나가자!”

“아, 응!”

이번 시간은 체육이었다.

도현은 벽화를 뒤로하고 진과 니콜라스를 따라 나갔다.

방학이 가까워졌기에 수업은 갈수록 자유로워졌고 이젠 숫제 노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물총을 쏘아댔다.

차아악!

등에 닿는 차가운 감각에 도현이 흠칫했다.

돌아보니 니콜라스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차분히 대야에 가서 물을 장전한 후, 목표물을 조준했다.

그 후론 난전이었다.

* * *

아이들은 쫄딱 젖은 채로 반에 들어왔다. 누구 하나라 할 것 없이 모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 바닥에 물웅덩이가 고였다.

삼총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착 달라붙은 옷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기가 마르면서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

더운 날씨에 오들오들 떨며 팔을 싹싹 비비고 있을 때였다.

“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진이 얼굴에 가닥가닥 들러붙어 시야를 방해하는 금발을 떼어냈다. 시선이 위로 향했다.

“진, 안녕?”

짙게 탄 코코아처럼 진한 고동색 고수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애였다.

도현에게 나름 익숙한 얼굴이었다.

복도에서 도현이 지나갈 때 자주 치고 지나가던 무리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뭐야.”

진이 자못 인상을 썼다.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처럼 모두와 친한 진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곧 내 생일이야. 이번 주 금요일에 생일파티를 열 생각인데, 너도 올래? 우리 학년 애들은 거의 다 올 거야!”

아. 잠깐 감탄사를 뱉은 다비가 니콜라스를 보며 성의 없이 말했다.

“너도 오든가.”

니콜라스가 머리를 좌우로 강하게 흔들며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물기가 여기저기 튕겨 나가자, 다비가 짜증을 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에 니콜라스가 헹, 코웃음을 쳤다.

니콜라스랑 사이가 안 좋나?

도현이 의문을 품을 때였다.

“도리는?”

“도리?”

“도현 말이야.”

“아… 글쎄.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리 말하며 은근한 눈길로 도현을 비웃었다.

세 사람의 낯빛이 굳었다.

학년 애들이 ‘거의 다’ 온다고 했으면서 도현만 쏙 빼놓으려는 행동에 어떠한 고의성을 감지하지 못한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알았어. 시간 나면 갈게.”

“정말? 꼭 와!”

다비는 신이 나서 몇 가지 말을 더 늘어놓았다. 진이 간신히 다비를 내쫓자, 니콜라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너 진짜 갈 거야?”

“아니? 안 갈 건데?”

진이 볼에 바람을 넣곤 눈가를 찌푸렸다.

“은근히 도리만 따돌리려고 하잖아! 마음에 안 들어!”

니콜라스도 고개를 주억였다.

“난 사실 도리 사진에 낙서한 것도 쟤가 아닌가 의심스러워. 쟤 도리한테 시비 거는 무리랑 어울리잖아.”

그 얘기가 나오자 진은 잠깐 주춤하곤 니콜라스에게 사나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니콜라스가 합! 입을 다물었다.

진은 은근히 도현의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했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음을 알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라 도현은 눈치채지 못한 척 굴었다.

진이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 * *

진과 니콜라스, 도현은 그 주 금요일에 만나서 오랜만에 합주 시간을 가졌다.

촬영 때는 도현이 바빠서, 촬영이 끝나고는 밀린 것까지 모두 노느라 수행 평가 연습을 게을리 한 참이었다.

셋은 다비의 생일파티는 까맣게 잊고 진의 엄격한 감독하에 열심히 수행 평가를 준비했다.

“더! 더 감정을 담아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았는지 매서운 지적이 날아왔다.

도현은 허가 찔린 얼굴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덩달아 찔린 니콜라스도 함께였다.

“자, 한 번 더 하자!”

“넷!”

“응!”

스파르타였다.

그렇게 다비의 생일파티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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