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표류 (10)
겁쟁이.
도현은 스스로를 그렇게 평했다.
주말 동안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돌아올 답이 두려워서였다.
도현은 자조했다.
어설프게 덮어놓은 모래흙은 무너져 내렸다. 모른 척 덮어놓았던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혼란스러운 심정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공기가 뾰족뾰족하게 변해 뇌를 찔렀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눈앞으로 성큼 다가온 이별은 도현을 극도의 스트레스로 몰아갔다.
견딜 자신이 없어 덮어두었기 때문에 더욱 반작용이 큰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Hey! Chinese!"
한 남자애가 눈을 양옆으로 찢으며 무어라 외쳤다. 그러자 그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원숭이 흉내도 내봐!”
앳된 목소리가 도현을 조롱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었던 일이었다.
9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은 종종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일을 저지르곤 했다.
평소에 도현은 그런 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병원에서 들었던 ‘Ghastly child’의 다른 버전 정도로 느꼈다.
단어에 담긴 혐오나 멸시의 뜻은 같으니까. 다만 개인을 향하냐, 집단을 향하냐가 다를 뿐.
‘어찌 보면 지금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한 적 있었다. 적어도 도현 개인을 향한 비난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이 상황이 도현의 신경을 긁었다.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그것을 표출하고 싶어졌다.
낯선 충동이었다.
도현이 성큼성큼 발을 움직여 무리 쪽으로 걸어갔다.
이쪽으로 올지는 몰랐는지, 살짝 당황하던 아이들이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한 척을 했다.
그러나 도현이 가까워질수록 말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도현은 방금 큰 소리로 자신을 조롱했던 남자애를 응시했다. 도현보다 키가 작았기 때문에 시선은 자연스레 아래로 향했다.
도현의 시선을 마주한 윌리엄은 차분하게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위축되었지만, 아닌 척 코웃음을 쳤다.
이미 움츠러든 윌리엄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 어떡하지?’
도현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겉보기엔 태연하기 그지없는 낯을 한 채였다.
충동적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라 이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생각해놓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지, 애초에 왜 여기에 온 건지 생각하는 사이, 생각에 빠진 도현의 시선을 무언의 압박으로 이해한 윌리엄이 점점 더 작아졌다.
그때였다.
한쪽에서 삐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뭐야?”
고개를 돌린 도현은 익숙한 얼굴에 눈이 살짝 커졌다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다비였다.
짧은 찰나, 눈이 마주친 다비는 잠깐 충동적으로 나선 것을 후회했다.
‘쟤 왜 저래?’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도현의 분위기가 낯설었다.
진의 옆에 있을 때나 실실거리며 웃고 다니지, 옆에 친구가 없을 때 도현은 원래 기본적으로 무표정했다. 다비가 주로 보아온 표정도 그랬다.
분명 익숙한 표정인데…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뾰족한 얼음의 단면이나, 시퍼런 유리 조각이 연상될 만큼 날카롭고 예민해 보였다. 이쯤 되니 까마귀 같은 검은 눈동자도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물러설 수는 없지!’
다비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도현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마음을 다잡으려 저번주의 생일 파티를 떠올리다가, 다시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진은 생일 파티에 오지 않았다.
바빠서 못 오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애들에게 슬쩍 물어보니 저 애의 집에 놀러 갔다는 게 아닌가!
‘내 생일이었는데!’
다비가 이를 갈았다.
그날 밤 다비는 서운함에 케이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생일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두가 즐거웠던 파티였다.
다비가 이를 갈고 있는 사이, 머릿속으로 정리를 끝낸 도현이 침착하게 제 입장을 밝혔다.
“나는 너희를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아.”
느릿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왕 말한 김에 본심을 슬쩍 덧붙였다.
“…솔직히, 조금 귀찮아.”
다비는 할 말을 잃었다.
말하면서 은근히 눈치를 보는 건 뭐란 말인가? 저 조심스러운 태도는 또 뭐고!
오히려 저 태도 때문에 홧김에 내뱉은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게 절절히 느껴졌다.
그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도현이 짜증 난다거나, 수준 낮다거나,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는 둥 떠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귀찮단다. 그냥 귀찮단다!
이쪽을 향하는 시선마저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실되어 보였다.
다비가 대답이 없자, 이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인지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뒤에서 뭐라고 떠들어도 상관없어. 근데 굳이 내 반응까지 얻으려고 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그 친절함에 감동…은 개뿔.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다비가 버럭 성질을 내었다.
그 반응에 도현의 고개가 조금 기울었다. 얼굴엔 희미한 의문이 담겨있었다.
“왜 그렇게 내 관심을 끌려는 거야?”
다비가 입을 떡 벌렸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뇌가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진이 아니었으면 도현은 다비에게 지나가는 개미 뒷다리에 묻은 먼지나, 그 개미 옆에서 굴러다니는 나뭇잎에 붙은 진드기만도 못한 존재였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미쳤냐?”
“가만히 있는데 치고 지나가고, 굳이 말을 걸면서 주의를 끌고. 이게 관심을 끄는 행위가 아니면 뭔데?”
도현이 다양한 감정을 연기하는 것과 별개로, 그 감정을 진실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가상의 인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 인물을 자신의 위로 덧입히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감정적으로 성숙해지는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도현은, 남을 괴롭힘으로써 얻는 저열한 만족감을 공감하지 못했다. 공감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조롱이 수치스럽거나 화가 나기보단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뿐 아니라,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내고 찾아낸 것을 아끼는 것만으로도 벅찬 도현의 입장에선 이들이 정말 이상해 보였다.
도현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내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희들한테 관심 없어. 굳이 가질 생각도 없고.”
“나도 없거든?!”
다비가 황당해하며 반박하자,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서로 신경 쓰지 말자. 그럼 됐지?”
퍽 명료한 말투는 산뜻하기까지 했다. 듣던 다비조차 ‘그런가?’ 했을 정도였다.
싸우는 건지, 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에 아이들이 웃음소리를 내거나,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적극적으로 도현의 앞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이들도 윌리엄과 마찬가지로, 초반에 도현이 보인 기백에 밀린 탓이었다.
그것을 눈치챈 다비는 뒤늦게 억울함이 들었다.
그는 옆에서 아주 조금 부추기거나, 같이 시시덕대기는 했지만 맹세코 직접적으로 도현을 치거나 욕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행동했던 애들은 가만히 있었고, 애꿎은 자신이 이딴 소리나 듣고 있었다.
자신이 먼저 나섰다는 사실을 가볍게 무시한 다비는 잠시 어울렸던 애들에게 정이 떨어졌다.
다비가 괜히 아이들을 노려보는 사이, 돌아오는 답이 없자 도현은 이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럼 그런 줄 알고 난 갈게. 안녕.”
도현이 담백한 태도로 인사한 후, 뒤돌아서 반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사라지는 도현을 붙잡지 못한 채,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 * *
“야! 도리도리!”
니콜라스가 벽화를 채색하고 있는 도현의 어깨를 뒤에서 탁- 쳤다.
“응?”
“다비가 너 좋아한다며?”
너무 헛소리라서 도현은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말했다.
“소문 쫙 났어! 다비가 너한테 심술 맞게 군 거 널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니콜라스는 숫제 웃겨 죽을 지경이었다.
끅끅거리며 바닥에 쓰러진 니콜라스를 도현이 조금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대화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가 있지?
심지어 짧은 사이에 이상하게 와전되어서 소문까지 났다.
니콜라스의 말을 빌리자면 쫙.
줄리엣 때도 그렇고, 이 학교는 묘하게 소문이 빨리 퍼지는 것 같았다.
도현이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누구한테 뭐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국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나.’
예민한 상태라는 이유로 화풀이를 했다. 그래, 차분하고 논리적인 척했지만, 그건 화풀이였다.
도현은 그들이 자신을 조롱한 것에 반응한 게 아니었다. 그저 제 감정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뿐이었다.
도현은 피곤함을 느끼며 눈을 문질렀다.
스스로를 비난하며 한심했던 행동을 반성하는데, 막 소식을 들었는지 진이 상기된 표정을 하고 반에 들어왔다.
“도리야!”
도현의 앞에 한달음에 달려온 진이 주위를 홱홱 둘러보고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도리야! 너무 놀라지 마! 다비가….”
“날 좋아한다고?”
“헛! 알고 있었네? 진짠가 봐!”
진의 얼굴에 놀라움과 동시에 미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도현이 판단하기에, 그건 안도 같았다.
“그래서 너한테 못되게 군 건가 봐! 나는 날 좋아해서 그런 줄 알고 괜히 미안했… 헙!”
진이 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도현은 사건 전말의 요모조모를 완전히 파악했다. 왜 그 무리와 부딪힐 때마다 진이 묘하게 조용했는지까지도.
“방금은 잘못 말한 거야!”
진이 뒤늦게 수습했다.
“진.”
“응. 응!”
일단, 호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런 오해를 받게 놔두기에는 아주 조금 불쌍했다. 도현은 오해부터 정정했다.
“걔는 너 좋아하는 거 맞을 거야.”
“…응?”
진이 현실 부정을 했다.
그럴 리 없다고 말하는 진에게 은은히 웃어 보이며, 도현은 어이없음을 넘어서 일종의 자괴감까지 느꼈다.
그저 장난처럼 굴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독 적개심을 보인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열렬히 노려보던 이유가 풋사랑에 얽힌 문제였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모든 게 허무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도현의 말을 애써 부정하던 진은 도현이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고 나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야기를 들은 니콜라스는 믿기 어려워했다.
“지, 진짜? 네가 화를 냈다고?”
도현이 잠깐 고민했다.
엄밀히 말하면 화를 낸 건 아니었다. 언성을 높인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화풀이는 맞았으니까.’
그리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라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니콜라스가 몹시 놀라움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도현이 화를 냈다니. 그 도리토스가!
이거 하자고 해도 좋다, 저거 하자고 해도 좋다, 하기 싫어졌다고 해도 좋다, 싫어하는 일이 있긴 한 건지 궁금할 정도로 무던하고 맹맹한 그 도리토스가!
니콜라스는 도현이 화를 내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궁금하다!’
니콜라스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니콜라스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한 도리토스가 잔뜩 성을 내는 상상이었다.
니콜라스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이, 진은 무척이나 의기소침해서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손을 말아 쥐며 꼬물거리던 진이 눈을 들어 도현을 흘끔 훔쳐보았다.
그러다 눈이 딱 마주치자 그런 적 없는 척 은근히 시선을 피했다.
도현의 시선이 계속 따라붙자,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오더니 울상을 지었다.
“미안….”
니콜라스가 쯧쯧, 혀를 찼다. 잠깐 흘겨본 진이 도현을 보고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너랑 친하게 지내서 너한테 지, 질투한 것 같아.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걔가 좀… 내가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마다 그러더라구. 일부러 비밀로 한 건 아니고, 그냥 민망해서….”
그랬다.
진은 진지하게, 진심으로 다비가 부끄러웠다.
진이 친하게 지내는 남자애마다 질투하는 걸 보고 있자면 얼굴이 다 빨개졌다.
다비는 진과 친한 남자애들이 다 진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수치는 자신의 몫일까?
진은 억울했다.
“푸하!”
니콜라스가 과장되게 숨을 뱉었다.
“이제 숨통이 트이네. 자꾸 걔 얘기 꺼내려 할 때마다 진이 막아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시원통쾌하다는 표정은 다 죽어가는 진과 대비되었다.
그동안 입막음을 당했던 게 많이 답답했던지, 봉인이 풀린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이것저것 떠들어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한 손으로는 붓칠하며 니콜라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니콜라스의 말에 따르면, 다비는 유감스럽게도 1학년 때부터 진에게 반해서 졸졸 쫓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 가장 핫한(?) 도현이 진과 친하게 지내니까 위기감을 느껴 저렇게 나온다는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작년엔 나한테도 저런 적 있어! 왠지 모르겠는데 얼마 안 가서 그만뒀지만.”
저 한없이 맑은 얼굴을 보고 질투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도현은 다비의 심정을 짐작했다. 동시에, 니콜라스와 다비의 사이가 안 좋아 보였던 이유도 깨달을 수 있었다.
고개를 주억이다가, 옆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푸흐…!”
도현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진이 모든 걸 해탈한 듯 하얗게 탈색된 표정을 하고 있던 것이다.
도현은 잠시 자괴감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색이 조금 삐져나갔다.
“그래…, 많이 웃어…. 도리가 웃으면 됐지.”
그렇게 모든 걸 통달한 듯 굴다가도,
“만나면 머리 몸통 배로 나눠주겠어….”
가끔가다 이를 박박 갈기도 했다.
도현이 흐느끼자, 니콜라스가 붓은 내려놓고 웃으라며 도현의 손에서 붓을 빼앗았다.
어른스럽다고만 생각했던 진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