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표류 (11)
도현은 여전히 엄마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행동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적어도 도현은 그랬다.
종종 이별을 생각하면 눈앞이 핑 돌 정도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점차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애초에 도현은 그런 것들에 익숙했다.
유예 기간이 별로 남지 않았거나, 제 살을 파먹는 것들.
만약, 자신이 연기하면 할수록 몸이 아프다는 걸 일찍 알았다면 그만뒀을까?
글쎄. 도현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도현은 미련스럽다는 점에서 뜨거운 조명에 몸을 부딪치는 불나방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차일피일 문제를 미루는 사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
자신의 행복이 누군가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다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이 모든 것을 속으로 삭였다.
이상함을 아무도 못 느끼도록….
“흐으으음.”
니콜라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도현을 보았다.
“왜?”
“약간… 눅눅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도현이 살짝 흠칫했다.
정말 의외지만, 니콜라스는 예리할 때가 많았다.
눈치와 상관없이 동물적 감각에 가까운 직감이 발달한 것 같았다.
턱.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야. 도리토스는 바삭함이 생명이야. 눅눅한 도리토스는 도리토스로서 생명이 끝난 거라고!”
빤히 마주쳐 오는 에메랄드빛 눈이 더없이 진지했다.
“그러니까 언제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알겠어?”
니콜라스는 도리토스에 얼마나 진심인 걸까?
도현은 지난번에 폐기했던 가설–가장 좋아하는 것을 별명으로 붙여 주었다는-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도현은 언제나 신선함과 바삭함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의심의 눈초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 * *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막 등교해 교실로 들어온 도현은 멈칫했다.
“으우… 흐우우.”
서러움이 그득그득 담긴 울음소리의 주인은 재키였다.
휑한 교실에 덩그러니 서서 훌쩍이던 재키와 문 앞에 멈춰 서서 정지한 도현의 시선이 마주치고.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옷소매로 대충 눈가를 벅벅 비비는 행동에 도현이 황급히 다가가 손을 잡아 저지했다.
“왜 우는 거야?”
도현은 질문을 던지고 나서 곧바로 후회했다.
일단 차분히 달래야지, 무작정 이유부터 묻다니. 너무 성급했다.
재키는 도현을 보자 더욱 서러워진 것 같았다. 순한 얼굴이 울상을 짓자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다.
도현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재키가 무너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그림….”
“그림?”
“그림을, 훌쩍, 누가 망쳐놨어!”
“…뭐?”
도현의 눈이 그제야 벽화로 향했다.
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재키의 말대로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손수 그려 넣은 꽃들이 가득 찼던 벽화 한가운데에 가로로 된 타원형이 몇 겹 쌓아져 있었다.
“저게 뭐지?”
도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자, 재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똥이잖아!”
“!”
도현이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똥이 왜 꽃밭 한가운데에 있는 거지?
엄마 차를 타고 등교하는 도현은 상당히 빨리 오는 축에 속해서 교실 안은 한산했다.
도현은 현재 반에 등교한 두 명, 재키와 헤더를 번갈아 보았다.
도현은 차분히 생각했다.
하모니 반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으로서 그동안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상황을 판단해 보건대….
‘꽃밭에 동물이 놀러 와서 볼일 보고 간 걸 표현한 건가?’
반 친구들의 창의성에 도현은 또다시 감탄했다.
“누가 한 거야? 신박하다. 어떤 동물 똥이야? 기린? 코끼리? 하마?”
도현의 말에 재키와 헤더가 기이한 것을 보듯 도현을 보았다.
…이게 아닌가?
“우리 반 애들이 한 거 아니야! 오늘 헤더가 제일 먼저 왔는데, 처음부터 저렇게 되어 있었다고 했어!”
“맞아.”
안경을 추켜올린 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제 가장 늦게 반을 나온 건 루시래. 루시는 똥같이 더러운 건 안 좋아해. 그리고 나도 아니야. 그럼 뭐겠어?”
도현은 헤더의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 헤더는 시끄러운 아이 중 그나마 얌전한 아이로, 쓸데없는 행동을 별로 안 좋아했다.
벽화를 그리던 내내 한 번도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의 터치를 받은 적 없는 아이기도 했다.
그런 헤더가 이제 와 똥을 그릴 리는 없었다.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심성이 착한 애였다. 물통에 물 받아 오기 같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도 스스로 나서서 할 정도였다.
결론은 한 가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림을 망친 거란 거야?”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
“이제 어떡해! 내일이잖아!”
그렇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벌써 오픈 하우스를 하루 전으로 앞두고 있었다.
“음….”
도현이 눈을 깜빡이며 꽃밭 한가운데에 떨어진 똥을 보았다. 헤더와 재키가 불안한 기색으로 도현을 보았다.
“이제 우리 망한 거지? 그치? 흐어엉! 내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그렸는데!”
“아냐, 아직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헤더가 침착하게 재키를 타일렀다.
방법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헤더를 쳐다본 도현은 자신을 쳐다보는 헤더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멀뚱.
시선을 교환하던 도현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헤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도현이 납득했다.
벽화로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낀 자세로 가만히 벽화를 응시하고 있자니, 재키가 주변을 왔다 갔다 했다. 헤더의 시선도 도현에게 고정된 채였다.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이자 두 사람의 고개도 따라 움직였다.
그게 흥미로워서 몇 번 더 하다가, 헤더의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자 낯을 굳히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현의 눈썹이 모아졌다. 저 구도에 저 위치, 저 크기, 저 색감이라면….
“아!”
“뭐, 뭐야. 방법을 찾은 거야?”
헤더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팔레트와 붓을 꺼냈다.
거침없는 손놀림을 따라 굵고 진한 선이 그려졌다. 재키가 양 뺨을 부여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경악에 벌어졌던 입은 곧 감탄의 의미로 변했다.
거대했던 똥이 점차, 꽃밭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수목으로 변해갔다.
가지는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뻗어 갔다. 단순한 갈색이 아니라 회색, 붉은색을 섞어 만든 나무색은 전체적인 색감을 해치지 않았다.
이어 도현은 붓에 노란색 물감을 칠했다.
‘왜 노란색을?’
재키가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도현이 거침없이 점을 찍었다. 가지 주변에 콕콕 점을 찍은 후 다음은 분홍색이었다.
찬란한 빛깔을 품은 나뭇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다양한 색감을 조화롭게 사용한 나무는 꼭,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나무 같았다.
지극히 비현실적이라, 꽃밭 한가운데에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꽃밭이 저 나무를 둘러싸기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었다.
도현은 붓을 탁, 튕겼다.
나뭇잎 주변에 물감이 불규칙적으로 점점이 찍혔다.
나뭇잎에 쓴 색으로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꼭 빛이 번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나무 하나를 만들어낸 도현은 잠시 두어 걸음 물러나 벽화를 살펴보았다.
‘뭔가 허전한데….’
고개를 갸웃하던 도현의 시선이 나무의 밑동에 닿았다.
도현은 얇은 붓을 꺼내 들어 하얗고 작은 꽃 군락을 그렸다. 한층 더 보기 좋아졌다.
다시 한번 꼼꼼히 점검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름 괜찮은데.’
그리 생각한 도현이 재키와 헤더를 돌아보았다. 어떤지 묻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입을 헤- 벌린 채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으로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꼭 요정들이 사는 신비한 섬 같아!”
재키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이참에 콘셉트를 완전히 바꿔버리자. 들꽃에서 환상의 섬으로!”
헤더도 신난 것 같았다. 둘은 도현을 부추겼지만, 도현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콘셉트는 들꽃이었잖아. 줄리아 선생님이랑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그렇게 하자.”
도현이 차분히 달랬다. 둘은 아쉬워하긴 했지만, 막무가내로 우기지 않고 수긍했다.
아무튼, 일은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울해하던 애들이 신나서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
‘벽화 수습만 말이지.’
벽화는 하모니 반의 모두가 힘을 합쳐 완성한 그림이었다.
장난이었다고 해도 질이 나빴다.
누굴까?
도현이 찬찬히 가능성 있는 용의자를 추렸다.
* * *
오늘도 귀여운 아이들을 볼 생각에 룰루 콧바람을 불며 교실로 들어온 줄리아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에 멈칫했다.
뭔가 데자뷔가 느껴졌다.
‘이런 때면 항상…!’
줄리아의 눈이 도현을 찾았다.
줄리아와 도현의 눈이 딱- 마주쳤다.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가, 도현이 시선을 스윽, 피함으로써 대치가 끝났다.
그리고 도현의 눈이 향한 곳을 따라간 줄리아는.
“!”
하루아침에 꽃동산이 신비의 섬으로 탈바꿈했다.
줄리아의 눈이 도현에게로 향했다.
‘네가 한 거니?’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에 도현이 ‘그렇게 됐어요.’라는 뜻을 담아 미소 지었다.
떠름한 눈이 다시 벽화로 향했다.
당황스럽긴 한데….
솔직히 전보다 예뻤다.
동화스러운 분위기에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빽빽이 그린 꽃들의 엉성함조차 작품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줄리아는 조금 의아해졌다.
도현은 그동안 ‘들꽃’이라는 콘셉트에 충실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갑작스럽게 변덕이 들었나?’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역시 아이는 아이인 건가!
까만 생머리가 착 달라붙은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오늘따라 더 앳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갑자기 나무는 왜 그린 거야?”
그건 그렇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줄리아는 9살인데도 묘하게 동갑내기 같을 때가 있는 도현의 기행에 호기심을 느꼈다.
아이들이 줄리아 몰래 손가락으로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도현이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요.”
부끄러울 법한 말이었지만, 도현은 이미 얼굴에 철판을 깐 채였다.
“죄송해요. 콘셉트는 들꽃이었는데….”
“아니야! 선생님은 지금도 마음에 들어! 엄청 예쁜걸.”
“정말요? 다행이다.”
도현이 말간 얼굴로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혹시….”
은근한 어조였다.
“계속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칠해도 될까요?”
그러면서 벽화를 지긋이 응시했다. 떠오르는 영감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은 이미 한 명의 예술가였다.
부끄러움에 표정이 잠깐 흐트러질 뻔했으나, 이 방법은 줄리아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통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들꽃이 가득한 환상의 섬으로 하면 되지!”
흔쾌한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도현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재키와 헤더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
도현은 재키와 헤더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똥 사건(?)을 비밀로 하는 대신, 벽화에 둘이 원하는 것을 하나씩 그려주기로 한 것이다.
거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도현이 재키와 헤더를 향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았다. 둘이 엄지를 치켜올리며 윙크했다.
훌륭한 거래였다.
도현은 거래를 완전히 이수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 밑에는 무릎을 굽히고 휴식을 취하는 유니콘과 오색으로 반짝이는 날개를 자랑하는 요정이 그려졌다.
* * *
재키와 헤더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도현은 진과 니콜라스가 오자마자 이 일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에게 이런 일까지 숨기고 싶진 않았던 탓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분노했다.
특히 나름대로 벽화에 애정을 쏟았던 니콜라스는 분기탱천하며 씩씩거렸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어?”
진의 말에 도현은 자신의 사진 위에 낙서가 그려져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럼 사진에 낙서한 사람이랑 벽화에 낙서한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럼 도리한테 앙심을 품은 인물이겠네.”
세 사람 모두 동일한 인물을 떠올렸다.
“다비드 데니얼.”
세 아이가 동시에 말했다.
“그 망할 놈이…!”
당장 뛰쳐나갈 기색인 니콜라스를 간신히 말렸다.
도현은 차분히 제 생각을 말했다.
“내일이면 학부모 참관일이잖아. 괜히 그 전에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 다들 기대하고 있을 텐데, 이런 일로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아깝잖아.”
도현이 재키와 헤더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한 이유였다.
아무도 모른다면 그저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일이 커지면 참관일 전날에 학교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전시회도, 음악회도, 합창도 열심히 준비했는데 괜한 일로 망치면 안 되잖아. 그리고 데니얼이 그랬다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아직 심증뿐이니까.”
“그러면 이렇게 넘어갈 거야?”
“아니.”
도현이 재차 말했다.
“오픈 하우스가 끝나면 범인을 찾아야지.”
도현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단순히 혼자 피해를 당한 게 아니라, 반 전체가 피해를 입은 일이기에 더욱.
그리고 정말 범인이 데니얼이라면….
- 그렇게 그냥 넘기다 보면 별일 아닌 것도 큰일이 된다, 너?
니콜라스의 경고를 가벼이 넘긴 도현의 실수였다.
실수엔 책임을 져야 했다.
범인을 잡고 나선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일까진 잊자. 우리 열심히 준비했잖아.”
“후우… 그래. 도리 말이 맞아.”
“쳇, 알았어.”
역시 심성이 곱고 배려심이 남다른 진과 니콜라스는 도현의 말을 수용해 주었다.
그 후 세 사람은 잠깐 똥 사건을 머릿속에서 치우고, 다음 날 있을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의 눈이 기대로 반짝반짝 빛났다.
뭔가 일이 많긴 했지만….
드디어 내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