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70)화 (71/582)

제70화. 표류 (12)

서혜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발을 디뎠다.

도현이 학교에 온 첫날을 제외하고는 처음 하는 방문이었다.

‘우리 아들은 하모니 반이랬지?’

서혜나가 도현이 설명해준 길을 떠올리며 걷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서혜나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밀턴 씨!”

흔치 않은 태양같이 밝은 금발의 남성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턱 부근에서 굽슬거렸다.

“아, 혜나 씨. 안녕하세요.”

얇은 은테 너머의 눈이 반가운 호선을 그렸다. 지적이고 차가워 보였던 갈색 눈이 순간 온화하게 변했다.

파티가 끝나고 진을 데리러 와서 한 번 본 적 있는 사이였다.

그 옆에 있던 여성이 반가운 표정으로 서혜나의 손을 잡았다.

“오, 정말 만나보고 싶었어요. 반가워요. 난 로테 레이시예요. 로테라고 불러줘요.”

“저도 혜나라고 불러주세요. 발음이 어려우면 나나도 괜찮아요.”

“나나. 귀여운 이름이네요. 잘 어울려요.”

로테가 부드럽게 웃었다. 두 눈엔 호의가 가득했다.

서혜나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동행했다. 부부는 굉장히 말재주가 좋고 가벼운 말에도 교양이 묻어났다.

로테는 특히 서혜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눈을 빛내며 보는 게 진이 도현을 볼 때 가끔 짓던 표정과 비슷해서 가족은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앗! 같이 가요!”

어디선가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르샤였다. 레이시 부부와 나르샤는 익숙하게 인사를 나눴다.

“부모님 오늘 못 오시는 건가요?”

“네. 아무래도 시간을 내기 힘드셔서요.”

로테와 밀턴은 나르샤가 기특한 눈치였다. 12살 터울의 나르샤는 바쁜 부모를 대신해서 동생을 알뜰살뜰히 보살폈다.

네 사람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화두에 오르는 주제는 아이들이었다.

이처럼 아이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처음인 서혜나는 몹시 즐거웠다.

도현이 온통 잘나고 귀여운 탓에 자랑할 거리가 차고 넘쳐서 더욱 그랬다. 개중 무엇을 자랑해야 할지 고르고 골라서 선별해야 할 정도였다.

‘이래서 학부모 모임에 참가하는 거구나.’

서혜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 * *

줄리아는 뿌듯한 마음으로 학부모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반에 들어온 순간부터 앞에 크게 펼쳐진 벽화의 위용에 입을 떡 벌렸다.

그도 그럴게, 도저히 아이의 솜씨라고 보기 어려웠다.

벽화 속 하늘은 보랏빛과 주홍빛이 뒤섞여 아주 오묘하고 신비로웠으며, 다른 아이들이 그린 엉성하고 미묘한 꽃들조차 일종의 그림 사조 같이 느껴졌으니….

“이걸 진짜 애들이 그린 건가요?”

“그럼요. 모두 아이들이 한 거예요.”

이 엄청난 작품을 자랑할 기회가 왔다는 게 너무 신이 났다.

게다가.

“오늘 DJ-N 조 보고 놀라실지도 몰라요.”

옆에 서 있던 미아 선생님이 작게 속삭였다.

아이들의 재롱 잔치와도 다름없는 날.

자신의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한 만큼 흐뭇한 심정으로 지켜보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줄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정된 공연.

예정된 박수.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를 거야!’

지금도 보라.

들어오는 순간부터 벽화 앞에서 웅성거리며 감탄하고 있지 않나!

찰칵거리며 사진을 찍는 소리도 들렸다.

줄리아의 시선이 도현에게로 향했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조용한 DJ-N 조.

진이 쭈그려 앉아 있는 니콜라스와 도현을 둘러보았다.

“준비 다 했지?”

“응!”

“문제없음.”

그들은 마지막으로 악보를 보고 있었다.

그사이 반에 점점 더 사람이 많아졌다.

“어? 나르샤다.”

문을 등지고 있었으면서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건지, 귀신같이 눈치챈 니콜라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엄마 아빠랑 도현이네 엄마도 계셔!”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조금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오셨어요?”

어색해하는 도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혜나는 반에 들어온 순간부터 시선을 빼앗았던 그림을 보며 말했다.

“응. 그런데 저 벽화는 네가 한 거니?”

“꽃은 다 같이 그렸어요. 나무랑 하늘은 제가 그렸고요.”

서혜나도 도현이의 그림 실력은 익히 알고 있었다.

도현이의 다락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기도 했고, 잊을 만하면 줄리아에게서 전화가 오기 때문이었다.

- 도현이가 미술적 재능이 정말 뛰어나요. 미술 쪽도 고려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줄리아의 말을 떠올린 서혜나는 자랑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우리 아들은 미술’도’ 뛰어났다.

‘나랑 장혁이를 닮아서 그런가.’

어쩌면 부모의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도현은 서혜나의 옆에 선 부부를 보았다.

나르샤랑 밀턴은 본 적이 있었지만, 진의 엄마를 뵙는 건 처음이었다.

도현이 일단 익숙한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자, 밀턴이 잔잔히 웃으며 화답했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던 로테가 잠잠히 있다가, 차분하게 남편에게 껌딱지처럼 달라붙은 진을 돌아보았다.

“…진?”

“응?”

아빠 품에 안겨 이리저리 몸을 비비던 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새로 사귄 친구 좀 소개해 달라니까 그렇게 싫다더니….”

“싫어! 도리는 내 친구인걸!”

로테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진을 보자, 진이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로테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미묘한 긴장과 경계가 서려 있었다.

두 모녀와 한 남자만 아는 미묘한 대치가 끝나고.

로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진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한숨을 쉰 밀턴이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바이올린 연주를 잘한다며?”

“응! 정말 잘해! 진짜, 음악회에서 듣던 거보다 더 멋졌어!”

“그래? 대단한데.”

웃으며 대답했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9살이었으니까. 그 나이대에 나올 수 있는 실력엔 한계가 분명했기에 진의 말이 과장된 표현이라고 여겼다.

‘그래도 진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의외군.’

작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하루 종일 거장의 음악을 듣는 밀턴이 9살의 연주에 갖는 관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기대되는구나.”

밀턴이 가볍게 말했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서혜나는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바이올린.

그건 서혜나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분명, 도현은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전에도 몇 번 의문이 든 적이 있었으나, 이에 관련해 물어보지 못했다. 바이올린에 한해서 도현이 얼마나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늘은 기념비적인 학부모 참관일이자, 바이올린과 관련된 의문을 해소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 날이었다.

서혜나의 이러한 생각을 모르는 도현은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을 벽화로 안내했다.

“오 마이 갓….”

로테가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흘렸다.

“굉장히 자유분방하면서… 조화로워. 미숙함과 능숙함이 공존하는데 그게 전체적인 그림을 해치지 않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부각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군.”

로테는 깊은 감명을 받은 표정이었다.

서혜나도 의문을 밀어두고 아이들이 열심히 그리 그림을 감상했다. 그러다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평범한 꽃들 사이에 새치름하게 껴 있는 게 귀엽고 웃겨서 서혜나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건 줄기에 달린 꽃이 세 개나 되네?”

“케르베로스 꽃이거든요.”

“…그, 그렇구나.”

서혜나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약간 묘한 정적이 내려앉아, 황급히 벽화를 훑어보던 서혜나가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켰다.

“저건 꽃이 두 가지 색이네?”

특이하게도 검은색과 남색이 섞여 있었다. 서혜나가 가리킨 곳을 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답했다.

“그건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될 뻔했지만, 다행히 척추동물에 해당하지 않아서 건강해진 꽃이에요.”

“……?”

서혜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꽃을 보았다.

이젠 다른 꽃들도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저 파란색 꽃은 곰팡이가 핀 꽃이고 보라색 꽃은 독에 중독된 꽃이고 그런 건 아니겠지?

서혜나가 불신에 걸린 사이.

줄리아가 밝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도현은 선생님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 이들을 보다가, 진과 니콜라스와 함께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부모님석으로 마련된 자리에 하나둘씩 앉기 시작하고.

교탁 앞으로 가서 선 줄리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자, 자. 모두 앉아주세요. 전시회 구경은 음악회 끝나고 천천히 해주세요. 하모니 반 친구들이 엄마 아빠한테 보여 드리려고 음악회를 준비했거든요.”

저마다 부모님과 떠들고 있던 아이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신나게 준비했지만, 막상 어른들 앞에서 공연하려고 하니까 떨리는 모양이었다.

“촬영은 하셔도 괜찮지만, 미아 선생님께서 카메라로 촬영해서 델마 아카데미 홈페이지에 올릴 예정이라서 거기서 확인하실 수도 있어요.”

줄리아가 차근차근히 해야 할 말을 설명하고.

벨벨벨- 벨벨-

벨 소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자, 이제 하모니 반 친구들. 첫 번째 순서부터 나와 볼까요?”

첫 번째 조는 재키네 조였다.

재키가 떨리는 표정으로 음악회용으로 준비된 디지털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았다.

그 외에도 세 명의 친구들이 각각 기타, 실로폰, 플루트를 들고 나왔다.

“어, 이거…?”

학부모 측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재키의 선곡은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행진곡에 초점을 맞췄는지, 의자에 앉아야 하는 피아노와 기타를 제외하고서 실로폰과 플루트가 당당하게 행진했다.

학부모석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야 제자리에 돌아왔고, 연주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그 후로도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동요를 고른 아이들은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에 맞춰 부모님들은 박수로 박자를 맞추었다.

그리고 나르샤도 손뼉을 치며 아이들이 하는 공연을 보고 있었다.

‘귀여워!’

음악회라고 해서 조금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뽀쟉이들이 뽀쟉뽀쟉 하는 게 너무나 귀여웠다.

공연 레퍼토리도 굉장히 다채로운데, 다 유명한 곡들이어서 알아맞히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니콜라스의 차례가 되었다.

나르샤가 콩닥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엄마가 꼭 찍어서 보내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 사고뭉치가 의젓하게 피아노 의자에 앉는 모습을 나르샤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피아노 같이 배우게 하길 잘했지.’

피아노 선생님이 오실 때마다 싫다고 뛰쳐나가려는 걸 붙잡아 놓느라 얼마나 땀을 뺐던가.

과거의 자신을 치켜세우고 있는데, 진이 갑자기 반을 나갔다.

‘……?’

나르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건 나르샤뿐만 아니라 교실 안에 있는 모두가 그랬다.

조원 한 명이 탈주했는데도 니콜라스와 도현이 태연하게 자리를 잡았다.

‘??’

그 와중에 바이올린을 드는 도현의 동작이 참 우아했다.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는 가운데, 니콜라스가 건반을 눌렀다.

* * *

벽면에 붙어 서서 촬영하고 있던 미아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참느라 고역이었다.

‘얘들아…! 대체 왜!’

중간 점검일 때 그들이 보여준 완벽했던 연주를 알고 있는 미아는 속이 타들어 갔다.

니콜라스나 진이 장난기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모님들을 모두 모시고 하는 공연에서도 이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저…. 미아 선생님. 진이 나간 것도 계획된 거 맞죠?”

줄리아가 불안한 눈치로 물었다.

“…아뇨.”

“…아니라고요?”

미아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선생님 사이에 불안한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둘의 시선이 진이 나간 문으로 향했다.

진이 다시 들어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문을 뚫어져라 보는데 똥땅거리는 피아노 반주 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가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마음을 비우자.’

미아는 해탈한 기분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그래.

그래도 열심히 준비했던 애들이 아닌가.

완전히 망쳐버릴 생각으로 이런 건 아닐 것이었다.

미아는 마음 편히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약간의 전주가 이어지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바이올린에 턱을 기댄 도현이 팔을 들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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