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표류 (14)
서혜나는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그녀는 밀턴이 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 이 정도의 천재를 보는 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정희성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었죠.
서혜나도 알고 있었다.
정희성은 클래식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 클래식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으니까.
연일 매체에서 정희성의 수상에 대해 떠든 적도 있었다.
그런 사람과 비교할 정도로 뛰어난 수준이라니.
서혜나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전문가의 말이었기에 더욱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도현은 대체 어디서, 언제 바이올린을 배운 것인가?
사실 이 질문은 서혜나가 이미 여러 번 고민한 문제였다.
갑작스럽게 리암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가, 도현의 바이올린 연주와 관련해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고 싶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
그때도 이상하다 여기긴 했다.
그러나 워낙 잘하는 게 많은 아이니까, 그림처럼 제 나이치고 잘하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제 나이치고 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바이올린을 다루는 도현의 동작은 놀라울 만큼 능숙했다.
도저히 서혜나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있었다. 퇴원하던 날 분명, 도현은 바이올린을 켤 줄 모른다고 말한 바 있으니까.
그다음에 남편이 옷에 대해 물었고, 도현은 그것도 선물받았다고….
서혜나의 두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 희성 형이… 사준 거예요. 바이올린을 선물해준 형이요.
서혜나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희성이 형, 바이올린, 선물, 병원.
그녀는 몇 년 전, 정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입원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그의 죽음으로 인터넷이 꽤 떠들썩해졌었다.
시기가 겹친다.
이토록 우연이 반복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밀턴이 했던 말까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정확한 물증은 없었지만, 심증은 이미 굳어져 가고 있었다.
도현이 만났던, 그리고 떠나보낸 사람이 그 정희성이라면.
그렇다면 바이올린을 선물받은 것도, 지금 보여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실력까지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도현이 정희성과 같은 인물에게 바이올린을 배워왔던 거라면!
물론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도현의 연기와 그림을 보았던 서혜나는 역치가 꽤 높아져 있었다.
도현은 학교를 나온 이후부터 줄곧 조용한 서혜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사이 그녀는 확신했고, 생각을 정리했다.
조용히 걷던 서혜나가 입을 열었다.
“엄마 깜짝 놀랐어. 도현이가 바이올린을 너무 잘 켜서!”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거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나?’
도현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려는 찰나.
“역시 우리 아들이야! 우리 아들은 어쩜 못하는 게 없다니까!”
서혜나가 밝은 얼굴로 주접을 떨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에 도현은 안심했다.
그녀는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바이올린을 더 배워보고 싶진 않니?”
“바이올린을요?”
“응. 밀턴 씨가 음악 평론 쪽에서 일하는데, 도현이가 재능이 있다고 하시더라고.”
불가능한 수준의 천재라고 열성적으로 한 말을 단순히 ‘재능이 있다’라고 간단히 말한 서혜나였다.
도현이 부담을 가지지 않길 원해서였다.
“엄마가 듣기에도 정말 좋은 연주였어. 그래서 도현이가 흥미만 있다면 바이올린을 진지하게 배워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들은 어때?”
도현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형은 이미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형의 모든 경험을 물려받은 게 도현이었다.
아직 몸이 따라주지 않아 기술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많지만, 바이올린이 손에 익는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지금은 도현의 나이가 어려서 이 연주가 대단히 들릴지 몰라도, 형과 같은 나이가 되었을 때 형 수준에 버금가는 연주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었다.
도현이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처럼, 형은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건 영혼뿐 아니라 육체와 숨결까지 스며든 재능이었다.
형의 영혼과 합쳐지며 그 재능을 일부 물려받았더라도, 결국 다른 사람이었다.
초반은 무섭게 따라잡고 혹은 앞지를지 몰라도 나중에 간다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리라.
그러니 도현은 형의 기억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벅찼다.
솔직히, 형의 기억을 가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게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지금이 좋아요.”
“그렇구나….”
서혜나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아쉬움이 묻어났다.
“혹시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 엄마는 도현이가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경험했으면 좋겠어. 그게 무엇이든지 말이야.”
“알겠어요.”
서혜나는 삐죽 솟아나려는 욕심을 눌러두었다.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다. 뭐가 되었든지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길 바랐다. 그동안 못 해준 만큼 그런 생각이 더욱 강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서혜나가 운을 뗐다. 도현이 시선을 돌려 서혜나를 보았다.
“곧 있으면 여름 방학이잖아.”
“네.”
일주일 뒤에 학기가 끝이 난다. 도현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싶어서 신기했다.
“혹시 여름 방학 동안 한국에 다녀오는 거 어떻게 생각하니?”
“여름 방학 동안이요?”
“응. 가서 아빠도 보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고. 어때?”
도현은 그 말에 깔린 전제를 눈치챘다.
여름 방학이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
엄마는 아직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이다.
도현은 갑자기 기분이 붕 떠올랐다. 아직 언제 돌아갈지 정확하진 않았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머릿속이 맑게 개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두 달 정도 여행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어때?”
“좋아요!”
도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 대답에 서혜나가 아차 하며 덧붙였다. 애한테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방학 내내 놀지는 못할 것 같아. 실제로 엄마 아빠 휴가는 이 주일 정도고, 나머지 시간에는 회사에 가야 할 것 같거든. 그래도 괜찮겠니?”
걱정과 우려가 담긴 말에도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도현에게 그런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도현의 속내를 모르는 서혜나는 생각보다 더 선뜻한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다.
혹시 한국에 가는 걸 싫어하거나 거부감을 보일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아빠가 좋아하시겠다.”
서혜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방학하고 바로 가는 거예요?”
“한 이틀 정도 뒤에 출발할 것 같아. 그럼 도현이 처음으로 집에 가보는 거네? 집에 도현이 방이랑 연습실도 있어. 가서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도현은 제 방과 연습실이 한국에 있는 집에도 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 집에서 홀로 생활할 아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제 방은 새로 만드신 거예요?”
도현이 물은 질문에 서혜나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도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 항상.”
제대로 안아준 적조차 없는 아들이었지만, 스스로 선택해서 다가가길 거부했지만, 모순적이게 그들의 집에는 항상 도현의 방이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아기방으로 시작해, 아이가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땐 더 큰 방으로, 책을 좋아한다는 이야길 들었을 땐 커다란 책장에 동화책을 잔뜩 집어넣었고….
모순이고 위선이었다.
퇴근하고 들어올 때마다, 한 번도 쓴 적 없는 방에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갔다.
스스로 뭘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매일매일이 답답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시간은 텅 비어 있었다. 꽉 찬 지금에야, 그때 얼마나 공허한 시간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서혜나가 웃었다.
“이번에 도현이가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인테리어도 파란색으로 새로 했어. 기대해도 좋아!”
부러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도현도 왈가왈부하지 않고 긍정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도란도란 한국에 가면 무엇을 할지 이야기했다.
* * *
도현이 방학 동안 한국에 간다는 얘기를 들은 진과 니콜라스는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방학에 뭘 할지 다 정해놨는데 말이지.”
도현은 그들 사이에 죄인이 되어 살살 눈치를 봤다.
조금 불퉁한 표정을 짓던 진은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 도현에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관대하게 용서해 주었다.
도현은 진의 자비심에 감탄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진이 목소리를 착 낮췄다. 세 아이 사이에 의미심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똥 사건’의 범인을 찾아내야지!”
범인을 찾아낸다지만, 그들은 이미 한 명으로 특정하고 있었다.
정확한 물증은 없었지만, 본능적인 레이더가 이 녀석이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잡지? 발뺌할 수도 있잖아.”
“흠, 그러게.”
아이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했다.
그때 니콜라스가 아이디어를 내었다.
“비슷한 상황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비슷한 상황?”
“응! 내 레이더가 도리의 사진에 낙서한 애랑 벽화에 낙서한 애가 동일 인물이라고 외쳐대고 있거든. 그러면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또 그러지 않을까?”
“그림이라도 걸어두고 잠복 수사를 하자는 거야?”
“맞아!”
“언제 올 줄 알고?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잖아.”
진의 지적에 니콜라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도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그런 내용이 있었어.”
뜬금없는 말에 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도현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한밤중에 벼랑 아래에서 한 시체가 발견돼. 그런데 그 죽음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어. 건물의 창문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창문이 모두 닫혀 있었던 거야.”
“귀, 귀신 이야기야? 귀신은 싫어!”
“귀신 이야기는 아니야.”
“그, 그래?”
니콜라스가 안심했다. 진이 더 말해보라고 독촉했다.
“그 후로도 기이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계속 발견돼. 그 죽음을 조사하던 주인공은 몇몇 시체에서 공통점을 알아냈어. 시체의 오른쪽 손가락이랑 혀가 검게 변색되어 있었던 거야.”
도현은 잔인한 부분과 복잡한 내용은 적당히 잘라내어 설명했다.
그것만으로도 진과 니콜라스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사실 그 연쇄 살인의 범인은 호르헤라는 수도사였어. 호르헤는 지식을 제한하기 위해서, 책 끝에 독약을 발라 놓은 거야. 그래서 장서관에 몰래 들어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긴 사람들은 모두 중독되어 죽음을 맞이한 거지!”
니콜라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호르헤는 광신도였거든. 자신이 믿는 진리와 어긋나는 내용을 다른 이들이 알기를 원치 않았어.”
이야기를 듣던 진의 얼굴이 전구가 켜진 듯 밝아졌다.
“그렇구나!”
진이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도 종이에 무언가 발라놓는 거야! 거기에 낙서를 한 사람은 손에 묻어나겠지!”
“아하!”
니콜라스도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다가, 아리송한 표정을 했다.
“독약을 바르자고?”
도현이 기겁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범죄잖아. 그게 아니라, 적당히 지우기 어렵고 잘 묻어나는 무언가를 발라야겠지.”
“나나!”
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반짝이 가루 어때? 그거 비누로 씻어도 잘 안 사라져!”
“그럼 손에 반짝이가 묻은 애가 범인이겠네!”
진과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외쳤다.
“그럼 어떻게 범인을 유인하지?”
세 사람이 다시 골몰하던 때였다.
“뜬금없이 그림을 그려서 걸면 너무 티 나지 않을까?”
진의 걱정 어린 음색에 니콜라스가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그럼 그림이 아니면 되잖아?”
“그러면?”
“신문이 있잖아!”
니콜라스의 말에 진과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앤이 도와줄까?”
자연스럽게 앨리슨을 앤으로 부르는 진이었다.
“도와줄 거야.”
“그걸 어떻게 알아?”
“저번에 앨리슨이 많이 화가 나서, 신문을 엉망으로 만든 범인을 꼭 잡고 말겠다고 했거든.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흔쾌히 해주지 않을까?”
“! 그럼 됐네!”
“그럼 앤을 찾아가자!”
“앤이 몇 반인지 아는 사람 있어?”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도현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찾지?”
그때였다.
“내 얘기 해?”
빨간 머리카락이 눈앞에 불쑥 들이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