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73)화 (74/582)

제73화. 표류 (15)

도현은 놀란 숨을 삼켰다.

“내 별명이 들리는 것 같아서! 혹시 내 얘기 했니? 뒷담은 아니지? 오, 정말 뒷담이었다면 말하지 말아줘. 나 상처 잘 받거든.”

오랜만에 듣는 톡톡 쏘아붙이는 어조였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휴우, 다행이다. 그럼 나는 왜 찾은 건데?”

“앨리슨은 왜 여기에 온 거예요?”

“음…! 그게 말이지.”

앨리슨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세 아이를 보았다.

“너희들이 어제 제대로 한 건 했다며? 그 일을 취재하고 싶어서 말이야! 줄리엣 이후 빵 터트릴 만한 기삿거리가 없었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니!”

진과 도현, 니콜라스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래서 말인데, 취재에 협조해줄 수 있니?”

“좋아요!”

그들은 곧바로 대답했다. 그 적극적인 태도에 앨리슨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의외로 순순히 허락해주네. 저번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거절당할 각오 하고 왔는데….”

“그거 말인데요, 앨리슨.”

도현은 그들의 계획을 차분히 설명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도현의 이야기를 듣던 앨리슨은.

“정말 악질이구나! 그림에도 낙서를 하다니! 좋아, 나도 협조할게! 아니, 무조건 협조할 거야!”

의욕을 활활 불태우며 흔쾌히 협조 의사를 밝혔다.

도현의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도현은 게시판을 보고 슬쩍 웃었다.

‘록 밴드 ‘DJ-N’ 전격 취재!’

세 사람이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이 크게 박혀 있었다.

“또 걔야.”

“줄리엣이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도현은 슬그머니 게시판에서 멀어졌다.

* * *

혹시라도 다음 날에 낙서가 발견될까 걱정했지만, 그들의 걱정은 금방 해결되었다.

벽화에 똥을 그리고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자 자신감이 붙었는지,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서 확인한 게시판에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진은.

입을 턱 벌렸다.

“풉, 킥!”

니콜라스가 진을 비웃었다. 진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현과 니콜라스의 얼굴에는 콧수염을 비롯해 우스꽝스러운 낙서가 그려진 반면에, 환하게 웃는 진의 사진만 유독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반짝이까지 바를 필요도 없었네!”

니콜라스가 유쾌하게 외쳤다. 진이 양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뒤늦게 이쪽으로 온 앨리슨은 감탄사를 뱉었다.

“진만 깨끗하네? 왜지?”

어리둥절한 말투에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말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앨리슨은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었다.

“완전 사랑꾼이잖아! 물론 못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쩜 좋아, 나 이런 얘기 완전 좋아해!”

어느새 신문을 망쳤다는 분노를 깔끔하게 잊어버린 앨리슨이었다.

앨리슨은 누군지 알고 싶다며, 빨리 가자고 그들을 독촉했다.

진은 조금 어물쩍거렸지만, 앨리슨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터덜터덜 따라나섰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비가 어딨는지 찾아다녔다.

다비가 발견된 곳은 운동장이었다.

공을 차며 신나게 웃고 있던 다비는 진을 발견하곤 딱딱하게 굳었다.

‘왜 진이 날 보는 거지?’ 하던 표정이 ‘내 뒤를 보는 건가?’로 변하더니 자신의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하자, ‘정말 날 보는 건가?!’로 변했다.

그 표정 변화가 너무 확연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다비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주인을 반기는 레트리버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만약 꼬리가 달려 있었다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진! 무슨 일이야!”

그는 진 주변에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이마를 짚고 있던 진이 고개를 들었다. 다비는 ‘기다려’를 들은 개처럼 가만히 진의 말을 기다렸다.

“너….”

“응!”

“너 손 좀 내밀어 봐.”

“손? 그래!”

허탈할 정도로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곤 손가락을 유심히 보았다.

햇빛을 받은 손날 부분이 오색으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잡았다, 이 범인!”

니콜라스가 외쳤다.

“범인?”

“너지! 신문에 낙서하고 벽화를 망쳐놓은 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다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너 맞지! 도현의 사진에 낙서했던 것도! 우리 벽화에 똥을 그린 것도!”

“아니거든!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그럼 손에 그 반짝이는 뭔데?”

“반짝이?”

니콜라스가 팔짱을 꼈다. 그러고선 우쭐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손에 있는 그 반짝이가 증거야! 우리가 사진에 발라둔 거거든! 네가 낙서하지 않았다면, 반짝이가 묻을 일이 뭐가 있어?”

“나 진짜 아니야!”

다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헹,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손에 반짝이는 왜 묻었는데?”

“그, 그건….”

“말 못 하지? 네가 낙서했으니까!”

“아니야!”

“강한 부정은 긍정이랬어!”

“아니라니까?!”

“봐봐, 저 봐. 흥분하는 거 봐. 찔리니까 그러지!”

다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내 온 인내심을 끌어모았는지, 방금 전보다 진정된 어투로 말했다.

“난 그런 적 없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그리고 벽화 얘기는 처음 듣는 얘기야!

“저저, 잘못했으면서 뻔뻔하게 구는 것 좀 봐! 찔리지도 않나 봐!”

다비가 바들바들 떨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건데!’

답답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같은 편이지만 얄미운 니콜라스의 모습에 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증거까지 있는데, 네가 아니라고 한들 우리가 믿겠어? 그 반짝이부터 해명해 보든가!”

니콜라스답지 않은 예리한 태도였다.

도현은 감탄했다.

‘니키가 화가 많이 났구나.’

하긴, 길이길이 남을 명작을 그리겠다며, 학교에 있는 꽃들을 종류별로 하나씩 몰래 뽑아 와 옆에 두고 그렸던 니콜라스였다.

그렇게나 애정을 쏟았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니콜라스의 지적에 다비는 말문이 막힌 듯 멈칫했다.

그에 따라 네 사람의 시선이 점점 더 따가워졌다.

진의 눈망울에 한심함과 실망이 가득 찰 무렵.

“낙서는 정말 내가 아니야. 그리고 손에 반짝이가 묻은 건….”

“묻은 건?”

니콜라스가 재촉하자, 다비가 눈을 딱 감더니 내질렀다.

“그, 그냥…. 그냥 신문을 가져갈까 고민했을 뿐이라고! 그때 만지작거리다가 묻은 거고!”

“왜 그런 건데?”

차분한 도현의 질문에 다비가 어물거리다가, 볼을 조금 붉혔다. 밝은 햇빛 아래 하얀 피부가 선홍빛을 띠었다.

마치 첫사랑을 앓는 소년처럼….

첫사랑을 앓는 소년처럼?

도현이 기이한 예감이 든 순간,

“지, 진이 예쁘게 나왔길래….”

조금은 수줍고, 풋풋한 애정이 서린 목소리였다.

네 아이가 대체 무슨 소릴 들은 것인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것이라 여기고 싶었지만, 몸을 꼬는 작태를 보자니 그럴 수도 없었다.

다비를 몰아붙였던 니콜라스조차 이 순간만큼은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데, 도저히, 아무리 봐도, 어딜 보나, 거짓 한 점 없는 진실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이성을 찾은 도현이 진을 흘깃 보다가, 빠르게 눈을 돌렸다.

지금은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신 도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일단, 의심한 건 미안해. 우리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정황상이나 상황상….”

다비의 생일 파티 건이나 사사건건 부딪쳤던 일들, 그리고 도현의 화풀이까지 뭉뚱그려 말한 도현이었다.

“솔직히 지금도 그 말을 믿기 어렵…진 않지만, 완전히 믿을 순 없어.”

“맞아! 쟤 말을 어떻게 믿어!”

당황에서 빠져나온 니콜라스가 맞장구를 쳤다.

“아니라니까? 아니라고!”

다비가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표정으로 소리치자, 그에 맞서 니콜라스도 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증명해 보라니까?”

“아까 말했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잠깐 식었던 분위기가 다시 과열되었다.

“네가 아니면 대체 누군데! 네가 가장 의심스럽잖아! 그럼 말해봐! 누군지!”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몰라! 넌데!”

“아니라고, 모른다고!”

“정말 몰라?”

“정말 모른다…!”

다비가 멈칫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기색이었다.

“벽화에 똥이 그려져 있었다고?”

“모른 척 발뺌하기는!”

“아씨, 그런 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던 다비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낙서를 발견한 게 혹시 언제야?”

다비의 질문에 니콜라스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보았고, 도현이 대답했다.

“오픈 하우스 전날이었어.”

“으음….”

다비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불편한 듯 눈가를 찡그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며칠 전에… 윌리엄이 너네 반에 들어가는 걸 봤어.”

“그게 언젠데?”

“언제였더라…. 흠, 나흘 전이었나?”

시간이 정확히 일치했다.

네 아이가 시선을 교환했다.

니콜라스가 이내 진지해진 태도로 물었다.

“그 거짓말 진짜야?”

“진짜… 아씨, 거짓말 아니라니까!”

“일단 가보자! 윌리엄이 어디에 있지?”

왁왁대는 다비를 무시한 채 아이들을 재촉하는 니콜라스였다.

그들은 잴 것 없이 곧바로 윌리엄을 찾아갔다.

억울함을 풀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던 다비도 함께였다.

그리고 억지로 뺏은 손에는.

“반짝이가 있네?”

진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뭔 소릴 하는 거야!”

윌리엄이 반항했다. 그런 윌리엄을 보던 도현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교실에서 있었던 일도 너야?”

“난 낙서한 적 없어!”

도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난 낙서라고 말한 적 없는데?”

“!”

그리하여 범인은 제삼자의 인물로 밝혀졌다. 다비와 말씨름한 것이 억울하게도, 허무할 정도로 쉬운 검거였다.

들켰다는 걸 깨달은 윌리엄이 되레 배짱을 부렸다.

“그, 그래서 뭐! 뭐 어쩔 건데!”

도현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윌리엄을 보았다.

어쩔 거냐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도현도 고민해 봤지만, 답은 간단했다. 고민조차 필요 없었을 정도였다.

진과 앨리슨이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근처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을 불렀다. 그에 윌리엄도 위기감을 느낀 것 같았다.

“치, 치사하게 이르냐? 비겁하게!”

윌리엄이 되는 대로 외쳤다. 니콜라스는 열받은 표정이었지만, 도현이 만류했다.

“저게 진짜!”

“니키, 진정….”

“나 아닌데?”

도현이 시선을 돌리자.

잔뜩 열이 오른 다비가 눈을 부라리며 씩씩대고 있었다.

거기까진 괜찮았으나… 그 시선이 향한 곳이 도현이 아닌, 윌리엄이었다는 점에서 도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야! 말이면 다 되는 줄 알아? 내가, 어? 너 때문에!”

거의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친구 사이 아니었나?’

도현이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선생님이 도착하시기 전까지 다비는 훌륭하게 윌리엄을 달달 볶았다. 니콜라스가 나설 자리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도현은 윌리엄의 다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포착했다.

“윌리엄.”

도현의 차분한 부름에 윌리엄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친 도현이 말했다.

“지금 도망가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어차피 친구들은 선생님께 이미 다 말했을 거고, 도망가면 혼날 일만 늘어날 거야.”

다비와 다르게 침착한 어투였지만, 그렇기에 윌리엄은 도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결국, 윌리엄은 도망치지 못했다.

“선생님!”

니콜라스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줄리아는 얼굴이 많이 어두운 상태였다.

“윌리엄, 왜 그런 거니?”

“그, 그게….”

윌리엄은 추궁하는 선생님에 처음에는 아닌 척 거짓말을 했다.

“정말 오해가 있었, 있었….”

윌리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줄리아의 뒤에서 오직 윌리엄만을 쏘아보고 있는 네 아이 때문이었다. 이처럼 부정적인 시선을 여럿에게 받아본 적 없는 윌리엄이 말을 더듬었다.

윌리엄은 마지막 희망을 보듯이 선생님을 보았으나, 선생님의 표정에도 엄격함이 자리한 채였다.

사방에서 쏘아져 오는 압박감에 땅에 붙어버릴 것 같이 위축되던 윌리엄은.

“끄윽, 사시일….”

뭐가 그리 서러운 것인지 끅, 끅 울며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술술 자백했다.

윌리엄과 그 친구들은 자주 신문에 낙서하고 놀았다고 했다. 도현의 사진도 딱히 악감정을 가지고 낙서했던 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벽화에 똥을 그려놓았는지 묻자, 복도에서 도현이 자신을 무시했다며 오히려 억울해했다.

“저는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와서 깔보고 무시했어요!”

오히려 피해자라도 된 듯한 말투였다.

윌리엄의 그 말에 도현은 뒤늦게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도현이 충동적으로 화풀이를 한 날, 제일 먼저 마주했던 이가 윌리엄이었다.

도현이 한숨을 쉬었다.

이 일에 다른 일까지 엮어서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사건 전후를 설명하려면, 전부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커지는 건 도현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으나….

도현이 니콜라스를 한 번 보았다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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