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74)화 (75/582)

제74화. 표류 (16)

도현은 차분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도현이 말을 할수록 윌리엄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그리고 줄리아 선생님은.

“신이시여…. 그 말 사실이니?”

놀람과 당혹을 넘어 경악한 기색이었다.

당연했다.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있다고 여겼는데, 집단적인 괴롭힘이 있었다니…. 심지어 인종 차별에서 비롯된 괴롭힘이!

도현이 한 말은 절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벽화에 낙서한 일보다 더욱 큰 문제였다.

“대체 그 아이들이 누구니?”

옆에 있던 다비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다비를 한번 보았다가,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아마… 윌리엄이 가장 잘 알지 않을까요?”

“그래, 맞는 말이구나.”

줄리아 선생님의 시선이 다시금 윌리엄에게로 향했다.

윌리엄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실감했는지,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다.

“윌리엄. 너는 선생님과 따로 대화를 좀 해야겠구나! 그리고,”

“잠깐!”

앨리슨이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향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한 앨리슨이 줄리아를 보고 말했다.

“아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

“네!”

앨리슨이 한 걸음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문 사진에는 니콜라스와 도현, 진이 모두 있었는데, 진만 낙서가 안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범인으로 다비드를 확신했던 거고요!”

아.

도현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개중에 다비는 경계와 적개심이 어린 눈초리로 윌리엄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아주 허무했다.

“나, 낙서하는 중에 누가 지나가서….”

눈을 부라리던 다비의 얼굴이 순간 미묘해졌다.

윌리엄이 털어 놓은 진실은 왼쪽에서부터 차례로 낙서하는데, 가장 오른쪽에 있던 진까지 낙서할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었다.

“허어… 그런.”

세 사람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라서 더욱 그랬다.

“이제 다 끝난 거니?”

“아, 네!”

“그래, 그러면… 윌리엄!”

벼락같이 떨어진 호성에 윌리엄이 움찔했다.

“교무실로 가자. 너는 어머니한테 연락드릴 거야.”

“어, 엄마는 안 돼요!”

윌리엄이 겁에 질려 애원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완고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비는 윌리엄을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보았다.

그때, 다비가 도현을 향해 야, 라고 불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한테 할 말 없냐?”

다비는 퍽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쏟아지는 힐난의 시선에 도현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한 게 맞으니까.

아까도 사과했지만, 도현은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도현이 곧바로 사과하자 다비는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더니.

“사과하면 다야? 난 이미 상처받았다고!”

라고 말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애초에 네가 도리를 괴롭히지 않았으면 의심할 일도 없었잖아.”

“내가 언제 쟬 괴롭혔다고 그래?”

“생일 파티에 도리만 빠트리려고 하고, 너 그리고 윌리엄 무리가 도리 놀릴 때 같이 있었잖아!”

“윽.”

다비는 침음을 흘렸다.

“그, 그래도 내가 하지도 않은 행동을 의심한 건 너네들이 잘못한 거잖아!”

“의심받을 짓을 하질 말든가!”

니콜라스가 지지 않고 받아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는데, 잠시 한숨을 내쉰 진이 말했다.

“나도 미안해. 널 의심해서.”

“에이, 무슨 소리야! 그럴 수도 있지! 괜찮아!”

도현과 니콜라스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들을 대할 때와 온도 차이가 너무 확연했다.

“그래?”

“응!”

“그럼 말고!”

진도 진이었다.

사양 없이 미안함을 툴툴 털어버렸다. 아주 시원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러나 다비도 그에 못지않았다. 범인으로 몰렸던 일은 새까맣게 잊은 것인지, 관심도 없는 것인지 진의 주위를 맴맴 돌며 말을 걸고 있었다.

“진, 사진 되게 잘 나왔더라!”

“그렇지? 그거 엄청 여러 번 찍은 거거든. 제일 잘 나온 사진 고르느라 애썼지.”

“끄응….”

그때가 생각났는지 니콜라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괜찮은 것 같은데, 니콜라스가 한쪽 눈을 감았다, 덜 웃었다, 이빨이 너무 나왔다 등등… 온갖 이유로 재촬영을 요구했던 진이었다.

그래도….

도현이 다비의 말에 대답해주는 진을 보았다.

아무래도 진이 다비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이쯤에 무시했을 텐데, 대화를 받아주는 것을 보면 확실했다.

“이, 이거 기사로 써도 될까?”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앨리슨이 묻자.

“절대 안 돼!”

진이 정색했다.

앨리슨이 징징대며 달라붙었지만, 진의 정색은 풀리지 않았다.

“그럼 진 얘기는 빼고! 오늘 있었던 일들만!”

앨리슨이 한 발짝 물러났으나.

“학교 측에서 이 문제에 대처할 것 같은데 신문에 싣기엔 좀 그렇지 않을까요?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도현이 차분히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으렇겠지이….”

결국 앨리슨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먼 미래에, 앨리슨이 진과 다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게 되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될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이 있었던 후에 다비와 아이들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다비는 여전히 도현이 아니꼬운 기색이었지만, 적어도 전처럼 다른 아이들이랑 어울리며 도현을 흉보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지만.’

델마 아카데미 측의 대응은 아주 빠르고 신속했다. 그동안 도현을 괴롭혔던 애들은 모두 교무실로 불려 갔다.

직접적으로 행동했던 몇몇 아이들은 학교 측에서 벌을 내렸고, 간접적으로 행위에 참여했던 아이들은 교내 봉사를 하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반성문은 잘 썼냐?”

니콜라스가 다비를 비웃었다.

다비가 잠시 울컥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노려보다가, 진의 눈빛에 꼬리를 내렸다. 대신 칭찬해 달라는 얼굴로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진! 내가 과자 사 왔어!”

“오! 도리토스다!”

니콜라스가 신이 나서 달려들자 다비가 과자를 뺏었다.

“진만 먹을 수 있거든?”

“치사하게 그게 무슨 짓이야! 너 진짜 속 좁다.”

“뭐라고?”

니콜라스와 다비는 틈만 나면 싸워대서, 도현의 학교생활은 더욱 정신없어졌다.

싸움이 붙은 두 비글을 말리는 건 언제나 진과 도현이었다.

“다비! 그만해!”

다비는 진의 한마디면 언제나 꼬리를 흔들었고.

“니키. 자꾸 그러면 수영장에서 못 놀게 할 거야.”

니콜라스도 도현의 협박 아닌 협박에 금방 조용해졌다.

의도치 않은 변화였지만, 도현은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야. 너무 가까이 앉지 마.”

다비가 도현을 노려보았다.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말이다.

* * *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어서 와!”

할리가 밝은 표정으로 반겼다.

도현은 할리의 꾸준한 구애(?) 끝에 할리의 집에 놀러 오게 되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개가 도현을 반겼다.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달려들어서 도현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브로콜리! 얌전히 있어야지!”

개는 얌전해졌다.

다만 문제는,

“…좀 치워줘.”

뒤로 넘어간 도현의 가슴팍에 앞발을 올린 채로 얌전해졌다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헥헥대는 브로콜리에, 할리가 해맑게 웃었다.

“얘가 사람을 되게 좋아하거든! 네가 좋아서 그래! 브로콜리 이리 와. 도현이 무겁대!”

그러나 브로콜리는 굳건했다.

“왜 이러지? 원래 말 잘 듣는데?”

할리가 낑낑대며 강아지를 껴안고 잡아당겼다.

끼잉, 낑.

브로콜리도 덩달아 낑낑댔다. 도현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콜리야! 착하지! 응? 아빠 말 듣자!”

간신히 앞발이 떨어졌다. 도현이 잔디를 손으로 짚으며 일어났다.

조금 진정했는지, 이번에는 달려들지 않고 도현의 주위를 뱅뱅 돌다가, 몸을 세워서 앞발을 휘젓다가, 다시 돌아다니다가, 꼬리를 흔들다가, 왕! 짖었다.

“얘가 이러는 거 처음 봐! 네가 많이 좋나 봐! 한번 쓰다듬어줘 봐. 좋아할 거야.”

“쓰, 쓰다듬어?”

“응! 혹시 강아지 무서워해?”

“아니. 무섭진 않아.”

“그럼 쓰다듬어 줘! 우리 콜리는 순해서 안 물어. 그리고 털도 항상 관리해줘서 깨끗해!”

왕!

할리의 말을 긍정하듯이 브로콜리가 짖었다.

도현은 어색하게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목 부근을 아주 살짝,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이 손 사이사이 지나갔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도현은 잠깐 손을 떼고 브로콜리를 보았다. 그러자 더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도현의 손에 앞발을 턱 올렸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브로콜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털도, 그 아래 느껴지는 온기도, 검은 털 사이에서 유독 맑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도 모두 심장을 간질거리게 했다.

도현은 이 놀라운 생명체를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강아지 좋아해?”

할리의 물음에 도현은 잠깐 멈칫했다가, 콜리의 머리를 길게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응, 그런 것 같아.”

도현이 한숨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홀린 듯이 브로콜리를 쓰다듬는데, 할리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자! 브라운도 먼저 와 있어.”

도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브로콜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꼭 ‘왜 일어나?’ 이런 것 같아서 도현은 심장이 아팠다.

도현과 할리가 집으로 걸어가자 브로콜리가 졸래졸래 따라왔다. 도현은 문득 든 의문을 말했다.

“근데 이름이 브로콜리야?”

“응. 얘 견종이 보더 콜리거든. 그래서 브로콜리! 근데 길어서 보통 콜리라고 불러.”

직관적인 작명 센스였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브로콜리, 브로콜리. 도현은 속으로 강아지 이름을 불렀다.

문제는 집 안에 들어가서 생겼다.

낑! 끼잉!

브로콜리가 문 앞에서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도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할리를 쳐다보자. 할리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집에 들이려면 또 씻겨야 한단 말이야. 이따 나가서 다시 놀아주자.”

단호한 표정을 짓는 할리에 결국 도현은 애타는 브로콜리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할리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할리의 부모님과 촬영 때 보았던 할아버지가 도현을 반겨주었다.

할리의 집은 무척이나 달콤한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가 파이를 구워주셨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파이야! 너도 먹어보면 깜짝 놀랄걸.”

“파이 냄새였구나. 냄새 진짜 좋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할아버지는 내가 해달라 할 때마다 구워주시거든!”

할리가 틈새를 놓치지 않고 어필했다.

그리고 들어간 할리의 방에는.

“여.”

가로로 누운 브라운이 손을 들었다.

베개를 옆구리에 대고 드러누운 채 발가락을 까딱이는 모양새가 마치 자신의 방에 있는 것같이 편안해 보였다.

핑, 피융, 푸슉!

게임 효과음이 울렸다.

“아, 안 돼! 지지마! 할 수 있어!”

브라운이 게임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집중했다.

“브라운이 자주 놀러 왔어?”

“음…. 일주일에 다섯 번?”

거의 매일 놀러 왔단 소리였다.

“너희도 빨리 와! 삼인전 하자!”

“그래!”

할리가 뛰어가 브라운의 옆에 앉았다. 도현도 할리가 건넨 게임기를 들었다.

“근데 나 게임 해본 적 없어.”

“한 번도?”

“응.”

브라운이 기겁하더니, 딱한 표정을 지었다.

“불쌍한 것, 게임이 얼마나 재밌는데!”

그리 말하더니 게임에 대한 기본적인 작동법을 알려주었다. 도현은 설명을 들으며 어설프게 따라했다.

이론적인 부분은 꽤 간단했다.

도현은 금방 익혔고, 셋은 신나게 게임을 했다.

도현은 자꾸 귓가에 맴도는 브로콜리의 울음소리를 애써 밀어두고 집중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그들이 게임을 멈춘 건 할아버지가 파이를 가져다주었을 때였다.

“맛있게 먹으렴.”

“감사합니다.”

“허허, 아니다. 우리 손주랑 재밌게 놀고.”

“할아버지 좋아!”

할리가 할아버지에게 달려들어 폭 안겼다. 할리의 어깨를 몇 번 도닥이던 할아버지가 이제 친구들이랑 놀라면서 할리의 등을 부드럽게 밀었다.

그들이 서로를 아끼고 있다는 게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집이었다.

파이는 투박하지만 정겨운 맛이었다.

할리가 왜 이 파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파이를 모두 해치우고.

“마당에 나가자!”

할리의 말에 의해 마당으로 나가게 되었다. 도현도 신이 나서 따라 나갔다.

왕!

문을 열자마자 브로콜리가 웃는 얼굴로 반겼다.

도현은 한 삼 년은 떨어졌다가 재회한 심정이 되어 브로콜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꼬리를 붕붕 돌리며 좋아했다.

그들은 브로콜리와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한 명이 공을 던지면, 브로콜리가 순발력 있게 뛰어서 잡아챘다. 그러고선 웃는 얼굴로 달려와 공을 내밀었다.

“잘한다, 우리 콜리!”

할리가 마구 칭찬하며 간식을 내밀자, 브로콜리는 주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얼굴을 사정없이 핥자 할리가 청명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그늘 한 점 없이 밝아 보였다. 브로콜리랑 할리는 여러모로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도현은 순간, 할리의 집에 놀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색하진 않을지, 무엇을 하며 놀지 계속 고민했는데 오히려 더 빨리 오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한동안 브로콜리와 놀아주고, 집에서 배드민턴을 가져와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세 명이라서 수가 맞지 않자, 할리의 할아버지도 참전했다.

할아버지가 연세가 있으셨기 때문에 조금 걱정했던 도현은.

휘익!

“아싸! 또 일 점! 할아버지 최고!”

브라운이 방방 뛰며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넷 중에서 가장 노련한 실력을 자랑했다. 도현과 할리는 할아버지의 스매시를 막아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러나 팀을 바꿔서 같은 팀이 되었을 땐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도현은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웃고 떠들며 뛰어다녔다.

집으로 돌아갔을 땐, 잔뜩 녹초가 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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