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표류 (17)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 말인즉슨.
“곧 있으면 종업이네.”
진의 말에 도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종업.
방학이 끝나면, 도현이 2학년을 끝내고 3학년이 된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새삼 낯섦이 몰려들어 왔다.
자신이 학교를 무사히 다니고 한 학년을 졸업하다니.
도현이 작년 이맘때쯤을 떠올렸다.
도현은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를 다닐 수 없는 대신, 병원에서 영상으로 수업을 들었다.
병원 침대에 앉아 홀로 수업을 들었을 땐 조금도 상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물론, 비록 반 학기만 다녔지만….
‘신기하네.’
이런 순간이 오면 마냥 좋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아쉬워.’
도현이 아쉬움과 미련이 남은 눈으로 뛰어노는 반 친구들을 훑어보았다.
사실,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반 친구들과의 사이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진과 니콜라스랑만 어울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이 오픈 하우스를 준비하면서, 차츰… 아니 그보단 조금 더 빠르게 가까워졌고.
지금은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도, 겨우 한 학년 올라가는 것뿐인데도 괜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왜 그런 몰골이야? 내가 뭐랬어!”
“…바삭하라고?”
“그래! 잘 알고 있네!”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잠시 한심한 눈초리로 보던 진이 말했다.
“많이 아쉬워?”
도현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은 말이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어 선선히 답했다.
“응.”
도현의 간단한 답에 진이 몸을 늘어트렸다.
머리가 향한 곳은 도현의 무릎 위였다.
아주 자연스럽게 무릎을 베개 삼은 진이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나도 조금 아쉽긴 해. 싱숭생숭하고.”
“엥? 왜?”
니콜라스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같은 학교잖아.”
“반이 갈릴 수도 있잖아!”
“끄응… 그건 그런데….”
이번엔 니콜라스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반이 갈린다고?”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런데 새삼 실감이 났다.
만약 진과 니콜라스와 다른 반이 된다면….
도현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야, 왜 울상을 하고 그러냐.”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를 쳤다.
“그냥, 너희랑 다른 반이 되는 건 왠지… 상상이 안 가서.”
“다른 반이라고 해봐야 옆 반일 텐데 뭐. 쉬는 시간마다 놀면 되지!”
“그렇긴 하지.”
수긍의 말을 뱉으면서도 표정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진이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다른 반이 되는 건 싫어.”
도현이 동감한다는 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싫긴 한데… 만약 다른 반이 돼도 제일 친한 친구들은 너희일 거야. 나만 그래?”
“난 별로,”
“뭐? 죽고 싶다고?”
“별로 너랑 다를 것 없다고!”
진이 들어 올린 주먹에 니콜라스가 빠르게 항복했다.
도현은 두 사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응, 나도 그래.”
여름을 찾아왔음을 알리는 태양처럼 환히 웃었다.
태양 볕이 대지를 비추고 바다가 잘게 부서지며 반짝이던 날, 도현은 종업식을 치렀다.
* * *
도현은 남색의 수영용 반바지에 오버핏인 흰색 수영용 반팔 후드, 샌들까지 신고 해변에 서 있었다.
눈이 상한다고 씌워준 선글라스는 덤이었다.
찰칵! 찰칵!
서혜나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었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대충 찍은 사진조차 어린이 잡지에 나오는 화보 같았다. 피부도 하얘서 홀로 모래사장 위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도현이 서혜나 쪽을 돌아보았다.
찰칵!
서혜나는 본능적으로 다시 셔터를 눌렀다.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니콜라스의 부모님과 맥의 어머니는 일이 바빠 오지 못했더니, 어쩌다 보니 음악회에서 만난 멤버가 그대로 결성되었다.
어른들은 파라솔을 구해 와 돗자리를 깔았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이 children’s pool이라 그런지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푸른 물결이 몰려와서 하얀 거품을 만들어내며 사라지는 광경은 넋을 잃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니콜라스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바닷속으로 풍덩 빠졌다.
살짝살짝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돌고래처럼 유연하게 수영했다.
그에 맥이 조금 질린 눈으로 보았다.
“쟤는 물에서 태어났대?”
“니키는 수영 선수가 될 거래요.”
“어? 진짜?”
도현이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맥이 그래서 저렇구나, 하며 납득했다.
그 후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물장구를 치며 놀았다.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수영장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에 도현은 처음으로 수영을 진심으로 즐겼다.
“도리 개헤엄친다!”
그렇다고 실력까지 좋아졌단 소리는 아니었다.
맥은 도현이 어설프게 수영하는 모습이 웃긴 것 같았다.
자꾸만 풉, 킥, 푸 하면서 웃는 맥을 은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도현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촤악!
“악! 짜!”
맥의 얼굴에 물을 튀겼다.
방심하다가 물을 먹은 맥이 에퉤퉤거렸다.
“둘이 물싸움하는 거야? 나도 할래!”
유유히 수영하던 진이 합세하고.
“뭐야. 나 빼고 노냐? 에잇!”
니콜라스가 무작위로 물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물난리가 펼쳐졌다.
개인전으로 싸우기도 하고, 2 대 2로 붙었다가, 3 대 1로 몰아가기도 하며 싸우다 보니 금세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오로지 패자만이 있는 싸움을 마친 네 사람이 추적추적 돗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나란히 물에 젖은 모양새가 꼭 미역 줄기들 같아서 나르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르샤가 나눠준 커다란 수건을 몸에 꽁꽁 두르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도현의 표정이 점점 묘해졌다.
어디선가 비릿하고 구릿한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이게 무슨 냄새지?”
도현의 말에 맥이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히 대답했다.
“저기 옆에 바다사자들 모여 살잖아. 걔네한테서 나는 냄새야. 만날 바닷속에서 살면서 냄새는 대체 왜 나나 몰라.”
“바다사자?”
“응.”
도현이 니콜라스를 돌아보았다.
니콜라스가 맹한 표정을 짓자 도현이 ‘정말 모르겠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며 표정으로 대화할 때였다.
“아! 혹시!”
니콜라스의 얼굴에 느낌표가 떴다. 도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새끼 바다사….”
“그 멍청한 새끼 바다사자!”
니콜라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멍청한 새끼 바다사자?”
모래 바닥에 누워 있던 맥이 상체를 들며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니콜라스가 도현과 해변에서 만났던 날 있었던 일을 흥분한 기색으로 떠들었다.
얘기를 다 들은 맥이 묘한 눈길로 도현을 보았다.
알면 알수록 처음에 느꼈던 첫인상과 많이 달랐다.
재미없는 얘기만 하고 제대로 웃을 줄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장난기도 있고 웃음도 많았다.
게다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행동도 자주 했다.
‘어쩌겠어. 내가 간수해야지.’
제일 연장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니콜라스의 얘기에 어른들도 호기심을 보였다. 그들은 바다사자가 모여 있는 바위 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니콜라스가 신난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말했다.
“얼마나 컸을까?”
“글쎄, 바다사자는 빨리 크나?”
그들이 도란도란 걷고 있을 때였다. 형용할 수 없는 비린내가 점점 더 강해졌다.
“냄새가 난다는 건 가까워진단 소리야!”
그들은 빵 냄새가 아닌 비린내를 따라 걸었다.
도현은 서서히 가까워지는 풍경에 살짝 입을 벌렸다.
‘…뭐가 저렇게 많아?’
단란한 바다사자 소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방이 바다사자 천지였다.
일광욕을 즐기는 건지 수많은 바다사자가 자기랑 똑같은 색의 바위 위에 늘어져 꼼질대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가와 구경을 해도 꼬리 하나 흔들지 않는 게, 아주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누군지 알겠어?”
진이 기대에 가득 찬 시선으로 도현과 니콜라스를 보았다.
“…여기서?”
“응!”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그 바다사자가 그 바다사자고 저 바다사자가 저 바다사자같이 생겼다.
도저히 미욱한 인간의 안목으로는 구분해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우억!”
쓱- 쓰윽
한쪽에서 통통한 뱃살을 하늘을 향해 내밀고 있던 바다사자가 갑자기 그들 쪽으로 움직였다.
“오. 움직일 줄도 알았네.”
맥이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억! 오억!”
쓱- 스슥-
그들의 앞으로 양팔을 팔딱거리며 기어 온 바다사자가 무어라고 말을 걸었다.
“도리도리. 뭐라고 하는 거냐?”
“…글쎄?”
그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늘어져 있는 다른 바다사자와 달리,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온 바다사자는 상당히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정확히는, 도현에게 관심이 많아 보였다.
도현은 자꾸만 자신을 보고 우억,오억, 으아우아억 말을 거는 바다사자에 난감해졌다.
말을 거는 것 같긴 한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탓이었다.
‘덩어리 님이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까?’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맞닥뜨리자 자연스럽게 비현실적인 존재가 생각났다.
끊임없이 말을 거는 바다사자와 당황해 눈을 굴리는 아들에 서혜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했다.
“이 애가 혹시 그 바다사자가 아닐까?”
그에 나르샤가 박수치며 좋아했다.
“그러네요! 그런 얘기들도 많잖아요! 구해줬더니 따라왔다던 상어 이야기라든가!”
엄밀히 말하면 구해준 건 아니었다. 산책 나온 바다사자가 알아서 돌아갔을 뿐이었다.
도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바다사자를 보았다.
바다사자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니콜라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다사자를 쳐다보았다.
“정말 걘가?”
자신을 아는 척도 안 하는 건 괘씸하지만, 이 바다사자가 그 바다사자가 아니라면 도현에게 치대는 걸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 새끼 바다사자가 이렇게나 커졌다고?”
도현이 신기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때는 멀리서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새끼였는데, 지금은 달려들면 그대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러게. 정말 잘 먹고 지낸 것 같네.”
니콜라스가 조금 찡한 표정으로 바다사자를 보았다.
괘씸한 건 괘씸한 거고, 기특한 건 기특한 거였다.
멍청해서 홀로 다른 해변으로 떠내려 왔던 바다사자가 이렇게나 커지다니.
눈을 깜빡한 사이 커버린 자식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어쩐지 조금 감개무량해졌다.
그때였다.
도현에게 치근거리는 바다사자 옆에 누워 있던 바다사자 한 마리가 ‘쟤 뭐 하냐’ 하는 표정으로 구경하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엑!”
무언가 도현의 다리를 툭, 쳤다.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었다.
바다사자의 보은 이야기에 동심에 젖어 있던 나르샤가 눈썹을 움찔했다.
우억! 오엑! 우어억!
와오아억! 우어으아엑!
나르샤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양쪽에서 말을 거네?”
로테도, 밀턴도, 서혜나도.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이 광경을 신기한 눈초리로 보았다.
두 마리 사이에 낀 도현만이 고통받고 있었다.
아니, 그래.
귀엽긴 하다.
귀엽긴 한데… 뭐라 하는지 전혀, 하나도 모르겠을 뿐더러.
우어억!
양쪽에서 울어대니 눈이 빙빙 돌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우리 아들은 바다사자가 봐도 예쁜가 보네! 보는 눈들은 있어가지고.”
서혜나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주접을 떨었고.
“살다 살다 바다사자한테 인기 있는 인간은 처음 보네.”
13년이나 산 맥도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으며.
“줄리엣이 아니라 스노우화이트였네!”
진이 감탄을 담아 말했다.
‘왜 항상 공주일까?’
도현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진 않았다.
썩 영양가 있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바다사자 울음소리에서 해방된 때는, 니콜라스가 배고프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도현은 그 순간 니콜라스의 먹성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 * *
바다사자를 구경하고 사진도 몇 장 찍어서 남긴 후, 그들은 다운타운으로 내려가 밥을 먹었다.
신나게 놀고 배부르게 먹자, 아이들은 노곤해졌다.
그 후 분위기가 좋은 카페에 가서 음료수까지 마신 후 그들은 헤어졌다.
이제 두 달 넘게 못 보게 되니 진과 니콜라스가 서운해했지만, 꾸준히 연락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만족해했다.
맥 또한 도현의 한국행 소식에 놀라다가, 맛있는 것을 사 오라고 말했다.
“꼭 사 와라, 꼭!”
아니, 강조했다.
도현은 알겠다고 말하며 멀어지는 이들을 향해 살랑살랑 손을 저었다.
다시 만날 것을 아는 이별은 신기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조금 서운할 뿐, 슬픔은 없었다.
인사는 가벼웠고 마음은 평온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