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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76)화 (77/582)

제76화. 일곱 개의 꼬리별 (1)

오늘따라 한적한 도로에 차가 시원하게 쌩쌩 달렸다. 창문을 조금 열자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르륵 흩어졌다.

“창밖으로 고개는 내밀지 말고.”

걱정 어린 당부에 도현이 얌전히 몸을 뒤로 물렸다.

망설임 없이 도로 위를 달리던 차는, 공항의 주차장에 들어서 멈췄다.

처음 와본 공항은 넓고 깨끗했다. 자칫하면 서혜나를 놓칠 것 같아 도현은 한눈팔지 않고 뒤를 쫓아갔다.

수속 절차는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형은 틈만 나면 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낯설기만 할 뿐 익숙했다.

서혜나는 허둥지둥대지 않는 도현을 조금 신기하게 보았다.

“친구들이랑 인사하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전 괜찮아요.”

진과 니콜라스는 도현을 배웅하길 원했지만, 공교롭게도 일이 겹쳤다.

니콜라스는 나르샤가 바빠서 직접 오지 못했고, 진은 오래전에 예약해 두었던 음악회 일정을 취소하고 오려고 한 것을 도현이 말렸다.

맥은 여름 방학 시기에 특히 가게가 바빠서 가게 일을 돕는다는 것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 길은 조금 휑했지만.

징, 징, 지잉-

[진 레이시 : 도리! 한국에 가서도 꼭 연락해야 해!]

[니콜라스 가비 : 야, 어디냐?]

[니콜라스 가비 : 비행기 탔어?]

[진 레이시 : 도착하면 바로 문자 줘! 알았지?]

[진 레이시 : 사진도!]

도현이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스 가비 : 대답 안 해?]

[니콜라스 가비 : 야야야야야.]

[맥 버클러 : 잊지 마라.]

[맥 버클러 : 내 선물.]

[할리 하펜 : 오늘 여행 간다며!]

[할리 하펜 : 잘 갔다 와!]

[할리 하펜 : (브로콜리가 웃고 있는 사진)]

[니콜라스 가비 : 캠프에 사람 엄청 많아!]

쏟아지는 문자 폭격에 허전함을 느낄 틈도 없었다. 문자를 동시에 답해주느라 눈이 핑핑 돌았다.

“도현아, 이제 가야 해.”

“아, 네!”

도현은 핸드폰을 닫았다. 계속 진동이 울려서 서혜나가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보았다.

두 사람은 길게 이어진 통로를 지나, 좌석에 착석했다.

안내 방송에 맞춰 안전벨트를 맨 도현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타보는 건 처음이지?”

“네.”

“혹시 속 안 좋으면 말해. 알았지?”

“그럴게요.”

이륙을 기다리고 있자, 조금 두근거렸다. 알고 있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이륙하겠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좌석 벨트를 매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선반을 제자리로 해주십시오. 또한, 가지고 계신 짐은 선반 위나 좌석 아래에 보관해 주시고 지금부터 안전을 위해 모든 전자기기의 전원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별거 아닌 안내 방송이 괜히 뱃속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도현이 조금 상기된 낯으로 핸드폰 버튼을 두드렸다.

[나 비행기 탔어.]

마지막으로 전체 문자를 보낸 도현은 핸드폰을 껐다.

두두두두.

바람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의 거대한 몸체가 앞으로 나아갔다.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도현의 모습을 보면서 서혜나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비행기가 하늘을 나는 원리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비행기 내부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이렇게 커다란 물건이 하늘에 뜬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가 하늘로 올라섰다.

“와아….”

난생처음 겪는 기이한 감각에 도현의 입이 벌어졌다.

끝도 없이 높게 높게 날아오른 비행기에 샌프란시스코가 점차 작게 보이다가, 이내 작은 장난감 같은 크기로 변했다.

그렇게 한국행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 * *

이장혁은 떨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왔다 갔다 움직였다.

‘이제 나올 때가 됐는데….’

그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이내.

사람들의 시선이 묘하게 쏠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 이장혁의 두 눈이 커졌다.

“여보! 도현아!”

이장혁이 외친 소리에 여성과 남자아이가 이장혁을 돌아보았다.

이장혁은 체면도 잊고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걸어오는 남편의 모습에 서혜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몇 개월간 떨어져 있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대로인 사람이었다.

서혜나와 도현의 앞까지 다가온 이장혁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6개월 만에 다시 본 도현은, 6개월 전과 너무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창백했던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작고 여위어서 아파 보였던 그때와 달리 키도 크고 살도 붙어서 건강해 보였다.

어린아이들이 눈 깜짝할 새에 커버린다지만, 그가 모르는 새에 도현이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왜 멍하니 있어. 안 반겨줘? 나랑 도현이 안 보고 싶었어?”

“당연히 보고 싶었지!”

이장혁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정색했다. 그 격렬한 반응에 서혜나가 유쾌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서 서혜나가 느끼는 행복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도현은 부모님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손가락을 움찔거리는데, 이장혁이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약간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이는 그동안 정말 많이 컸네. 너무 달라져서 깜짝 놀랐어.”

“그렇지? 도현이 참 많이 컸어.”

서혜나가 긍정했다.

지난 6개월간 도현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더는 육체가 붕괴의 위험을 느끼지 않으니 몸이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항상 같이 있었던 서혜나도 느낄 만큼 자라 있었다.

“비행기는 괜찮았니? 어지럽지는 않고?”

“네. 괜찮았어요. 오히려 재밌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는 도현의 모습에, 이장혁은 감격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보고 웃어주는 도현이라니.

얼음이 된 남편의 모습에 서혜나가 이장혁의 팔을 툭- 건드렸다.

“여보.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그건 뭐야?”

“아. 아! 맞다!”

이장혁이 허둥지둥 손에 들린 꽃다발 중 하나를 도현에게 내밀었다.

“퇴원 축하 선물이야. 너무 늦었지만, 퇴원 축하해. 도현아. 이렇게 건강하게 아빠가 있는 곳으로 와줘서 고마워.”

도현은 눈앞에 들어찬 화려한 꽃다발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받아 들었다.

귀여운 꽃봉오리 사이에서 부드러운 꽃내음이 코를 스쳤다.

“그리고 이건 당신 거.”

“나도?”

서혜나가 기쁜 기색으로 꽃다발을 건네받았다.

“이러니까 무슨 기념일 같다.”

“기념일 할까? 도현이가 한국 온 기념으로!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고.”

“그 전에 정리부터 해야지. 짐 엄청 많아. 꽃다발 안 뭉개지게 조심해야겠네.”

“…내가 짐을 늘린 거야?”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진 이장혁에 서혜나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정말. 이래서 내가 당신이랑 결혼했지. 반응이 너무 재밌다니까.”

어깨를 치며 웃는 얼굴은 장난기를 담고 있었다.

도현은 한없이 어른스러웠던 엄마의 낯선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빠의 곁에 있는 엄마는 확연한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갑자기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설렜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들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한국의 집은 샌디에고에 있던 집과 다른 듯 비슷했다.

주택형 집은 샌디에고의 집보단 작은 앞마당이 있었고, 내부는 좀 더 넓었다.

부모님이 잔뜩 기대한 눈치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의식적으로 신기해하며 간간이 감탄사도 냈다.

그에 이장혁은 뿌듯한 기색이었다.

집 내부는 샌디에고의 집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샌디에고는 좀 더 아늑한 느낌이라면, 이곳은 현대적이고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도현의 방은 이곳에서도 이 층이었다. 도현은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며 싱숭생숭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현의 방이 항상 집에 있었다는 서혜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도현은 의아했다.

불안정한 영혼을 가진 도현이 꺼림칙하고 불편해서 먼 타지에 있는 병원에 홀로 입원하게 하고선, 정작 집에는 방을 만들어 놓는다.

도현은 순간 심장이 지끈- 눌리는 감각을 받았다.

지난 시간은 공허 그 자체였다.

모든 게 하얗게 탈색된 세상만이 전부라 책에 빠져들 만큼, 도현은 공허하고 외로웠다.

혹시, 정말 혹시 어쩌면.

부모님도 그랬던 게 아닐까.

마음이 너무 공허하고 텅 비어서, 방을 만들어놓고 이것저것 채워갔던 게 아닐까.

퇴원 날 보였던 눈물에 진심이 섞여 있던 건 아니었을까.

도현은 처음으로 부모님의 입장에서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어쩌면 이 익숙하고도 낯선 환경이 도현에게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몰랐다.

이장혁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9살 아이가 쓰기에는 많이 넓은 방이 도현을 반겼다.

도현의 방도 색감은 샌디에고의 방과 같았지만, 훨씬 깨끗하고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외식을… 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세 사람은 소파에 물에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다. 짐을 정리하고 나니 다들 지쳐서 노곤해진 상태였다.

“시켜 먹을까? 도현아, 혹시 시켜 먹는 건 싫어?”

“괜찮아요.”

도현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비행기에서 장시간을 보낸 데다가 짐 정리까지 했으니, 지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럼 뭐 시켜 먹지.”

“흠. 이것도 나름 이사 아니야? 이사한 날엔 역시.”

“짜장면이지!”

둘은 죽이 척척 맞았다.

“도현이는 짜장면 먹어본 적 없지? 이번에 먹어보자.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기분 내는 데는 짜장면이지.”

그리해서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짜장면에 탕수육까지 해치웠다.

왜 이사하고 짜장면을 먹는지 알 것 같았다. 잔뜩 배가 고픈 상태로 먹으니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저녁밥까지 먹고 나자 하늘은 컴컴해져 있었다.

도현은 피곤한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 꾸물꾸물 들어갔다.

새로 빨았는지, 좋은 냄새가 나는 포근한 이불이 기분 좋았다.

엄마 아빠는 도현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기고 불을 끄고 나갔다.

한국에 처음 온 감상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도현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서혜나와 이장혁은.

애틋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결혼한 이래로 이토록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처음이었다.

다시 만나니, 그제야 반절로 나뉘었던 것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피곤한 눈을 애써 들어 올리며, 밤이 깊어지도록 단란한 대화를 나눴다.

그동안 무얼 했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즐거운 일은 많았는지. 서로에 대한 것을 묻다가 귀결되는 것은 결국 도현이었다.

“저 방에서 우리 아들이 자고 있어.”

이장혁의 말에 서혜나가 침묵하다가, 간신히 대꾸했다.

“그러게.”

두 사람은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어지러움과 격한 기쁨, 한없는 슬픔, 애상.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싶기도 하고, 아이처럼 소리 내며 엉엉 울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구멍이 뚫린 항아리처럼 물을 붓고 부어도 결국 텅 빈 속만 남았다. 아주 오랜 기간 텅 비어 있던 영혼이 그제야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이거였구나.

두 사람은 동시에 깨달았다.

그들의 삶에서 빠져나갔던 조각이 드디어 자리를 찾았음을, 비틀어져 궤도를 이탈했던 행성이 본래 궤도로 되돌아왔음을.

이제야 지구가 제대로 도는 것 같았다.

서혜나가 손을 들어 이장혁의 뺨을 훑었다. 축축한 물기가 묻어났다.

이장혁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현을 행복하게 해주자며, 서로에게 맹세하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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