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79)화 (80/582)

제79화. 일곱 개의 꼬리별 (4)

세 가족은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 다녔다.

어린이 대공원부터 여의도 호수공원, 여수의 바닷가, 남산타워까지.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던 분위기도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

모든 게 잘되어 가는 것 같았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전 일곱 시.

두 사람은 걱정과 미안함이 담긴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정말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놀거리도 많이 가져다주셨잖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서혜나는 굉장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실컷 한국까지 데리고 왔건만, 부부의 휴가 기간이 끝난 것이었다.

서혜나가 미국까지 사업을 확장한 게 발단이었다. 한창 브랜드가 커가는 시기에 두 대표가 모두 자리를 비우니, 곤란한 일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결국 두 사람은 급할 때는 회사로 가서 일하고 여유가 생길 때 도현과 같이 놀러 가기로 했다.

서혜나는 먼 한국까지 데려와 집을 혼자 보게 만든 게 못내 미안했다.

도현이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하고 오늘 보려고 계획했던 영화가 기대된다며 밝은 표정을 보여주고 나서야 간신히 자리를 떴다.

도현은 커다란 집에 혼자 남았다.

잠깐 부모님이 나간 현관문을 보다가, 털레털레 걸어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영화를 틀어놓은 채로 도현은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부모님은 미안해하셨지만.

‘이편이 더 나아.’

도현이 짙은 한숨을 쉬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마냥 평탄할 줄 알았는데….

도현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바로 불시에, 그리고 시시때때로 도현을 찾아오는 기억이었다.

어린이 대공원에서는 초등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갔던 기억이, 한강에서는 치킨을 먹었던 기억이, 남산타워에서는 멍하니 하늘을 보았던 기억이….

사실, 인천 공항에 도착했던 순간부터 그랬다.

도현은 점점 형의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개중에는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분노한 일도, 슬퍼한 일도, 괴로워한 일도, 권태로워한 일도 있었다.

한국에 오고 나서야 도현은 깨달았다.

영혼을 넘겨준다는 선택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내어주고 전부를 보여주는 것이란 사실을.

도현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있었다. 모순적이지만, 그가 곁에 있었을 때보다 없는 지금에서야 도현은 형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그 부분은 몹시 만족스러웠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잦아짐에 따라 종종 형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이 겹쳐지는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였다.

- 어때? 예쁘지?

밤바다는 도시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황홀한 물결을 바라보며 도현은 자연스럽게 ‘아, 저기서 연주했었지.’라고 생각했다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감정과 기억의 주체를 자연스럽게 ‘나’로 인식한 탓이었다.

바다는 아름다웠지만, 도현은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없었다. 꽤 익숙한 감각을 느낀 탓이었다.

‘과몰입으로 자아가 흔들렸을 때.’

그때와 아주 흡사했다.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도현은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다. 한 번 겪은 데다가, 어느 정도 극복한 문제였으니 괜찮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내 착각이었지만....’

애초에 연기로 인해 만들어낸 자아와 정말 기억과 경험을 가진 자아는 그 본질부터가 달랐다.

연기를 중단함으로써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일상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마음대로 중단할 수 없다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흥미진진한 장면이 지나가고 있는데, 도현은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텔레비전을 끄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문득 샌디에고에 놓고 온 바다사자 인형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휙휙 저으며 털어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야.’

도현은 이 사실을 나름 확신했다.

거기에는 나름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었는데.

‘심각한 상황이었으면 덩어리 님이 나타나셨겠지.’

믿는 구석이 있는 탓이었다. 도현은 뻔뻔히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보다 견딜 만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버티기 수월해진 것 같았다.

그래도 부담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라, 날이 갈수록 피로가 쌓였다.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가서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집에 있는 게 도현의 입장에서는 훨씬 편했다.

물론, 한국까지 와서 집에만 있는다는 건 조금 괴로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도현을 가장 괴롭게 하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하아.”

도현이 피곤한 눈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이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비겁하고 못난 생각이었지만, 샌디에고에 남아야 할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생긴 탓에 죄책감이 조금 옅어졌다.

도현은 자신의 이기심에 미약한 조소를 흘리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바보 같았다.

* * *

도현의 생활은 자유로웠고, 그만큼 단조로웠다.

기상 후에는 부모님과 아침 식사를 한다.

부모님이 출근하고 나면 정원에 나가 잠시 아침 공기를 즐겼다.

그 후 집 안으로 들어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집으로 들어왔다고 별다른 할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따뜻하거나 차가운 코코아를 한 잔 타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침 뉴스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그러다가 무료해지면 영화를 보거나, 브라운이 추천해준 게임을 했다.

친구들이랑 할 때는 분명 재밌었는데 혼자 하려니 따분했다. 도현은 금방 혼자서 점수를 갱신하는 것에 흥미를 잃었고 게임기는 며칠 못 가 서랍장에 수납되었다.

한 번 더 영화를 보고 시간이 남으면 바닥에 드러누워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부드러운 카펫에 배를 대고 뒹굴거리며 낙서를 하다 보면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거실 창문으로 비치는 하늘이 어둑해질 때쯤, 부모님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나른한 기분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나 부모님을 반겼다.

매번 퇴근할 때마다 맞아주는 아들에 서혜나와 이장혁이 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며 웃으면, 도현도 짧게 웃기도 했다.

그 후에는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잠시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었다.

‘연기하고 싶다.’

도현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도현은 의식적으로 연기와 바이올린 연주를 삼가는 중이었다.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심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야 하는데….

날이 지날수록, 조금씩 무료함이 차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볼 때면 파자마 파티를 했던 밤이 생각났고, 책을 읽을 때면 형과의 시간이 생각났으며, 게임을 하자 할리와 브라운이 생각났다.

그래서 무얼 해도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잉-

핸드폰에 뜬 이름에 도현의 얼굴이 전구가 켜진 듯 밝아졌다. 미약하게 상기된 뺨에 설렘이 느껴졌다.

“진!”

- 도리토스!

겨우 일주일 조금 넘게 떨어져 있었으면서, 몇 달은 못 본 사람처럼 목소리에서 반가움과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

도현은 이제 곧 점심을 먹을 시간인데, 진은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둘은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다. 진은 음악회를 계기로 흥미가 생겨서 악기 학원에 등록했다고 말했다.

- 근데 그 학원에 다비도 다니는 거 있지! 난 걔가 악기를 다루는 줄 몰랐어!

다비가 악기를?

‘진에게 잘 보이려고 익히려던 게 아니었을까?’

도현이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도현은 점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샌디에고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진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샌디에고 특유의 유쾌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생각났다.

두 아이는 조금 더 떠들다가, 도현이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자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기자 수다 소리로 가득 채워졌던 집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자 다시 아직 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통화는 정신을 가다듬는 면에서는 탁월했지만, 샌디에고에 대한 그리움을 짙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어서 빨리 샌디에고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만 나날이 강해졌다.

* * *

“도현이가 많이 심심해하는 것 같지?”

이장혁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할 게 한정적이니까.”

서혜나도 긍정했다.

두 사람의 최근 고민거리는 도현이었다. 물론 항상 그랬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도현이 아닌, ‘심심해하는 도현’이었다.

도현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었다.

게임도 잘 하지 않고 그 좋아하는 연기도 안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그러나 놀러 가자고 말을 해봐도.

- 저번 주 내내 돌아다녀서 아직 조금 피곤한 것 같아요

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부부는 별다른 말을 얹지 않고 수긍했다.

“주말에라도 짧게 여행하면 좋을 텐데.”

“도현이 퇴원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피곤한데 무리할 순 없지.”

“그건 그렇지만….”

부부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가 생긴 것은 다음 날이었다.

회사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탄 때였다.

띠리링-

이장혁의 바지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

“어… 음? 가현이가 웬일로 전화했지?”

“가현이?”

“어, 내가 저번에 말했던 대학 동기. 잠깐만.”

이장혁이 양해를 구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아, 받았네.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너는?”

- 나도 뭐, 평소랑 똑같지.

잠깐의 안부 인사를 나눈 후에 이장혁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 아, 그게 말인데.

이어지는 설명을 듣던 이장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어, 어, 그래. …어.”

이장혁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내가 한번 물어볼게. 언제까지 답을 주면 돼?”

- 빠를수록 좋지. 인원 파악은 해야 하니까. 일정 조정도 해야 하고.

“그래, 최대한 빨리 결정해볼게. 고맙다.”

- 그냥 이미지 맞는 사람을 찾은 거뿐이야. 나는 기회만 주는 거고, 기회를 잡는 건 도현이가 해야지.

“그래도. 진짜, 진짜 고맙다, 가현아.”

- 아,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야. 됐어. 나중에 술이나 사.

“그래, 그래. 알았어.”

술 약속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이장혁이 핸드폰을 든 손을 내렸다.

옆에서 아내가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이장혁은 서혜나를 보다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도현이, 드라마에 관심이 있던가?”

(다음 편에서 계속)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