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0)화 (81/582)

제80화. 일곱 개의 꼬리별 (5)

띡. 띡. 띡.

띠리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거실 카펫 위에서 선잠이 들었던 도현이 눈을 질끈 감으며 하품을 했다.

부르르.

팔을 쭉 올려 몸을 늘린 도현이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졸음기가 전부 가시지 않아 눈이 삼분의 일쯤 감겨 있는 상태였다.

“엄마, 아빠 잘 다녀오셨….”

“도현아!”

흥분이 담긴 목소리에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소와 달리 기대와 설렘으로 반짝반짝한 부모님의 얼굴을 본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도현아, 혹시 드라마 오디션 한번 볼래?”

훅 들어온 질문에 도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충격요법으로 잠이 완전히 달아난 도현이 큰 눈을 끔뻑였다.

‘내가 뭘 들은 거지?’ 하며 혼란에 빠졌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가, 여러 개로 증식했다가, 이내 느낌표로 변했다.

“드, 드라마요?”

도현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한동안 잔잔했던 도현의 얼굴에 인 동요에, 이장혁은 뿌듯한 마음이 되어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드라마! 어때, 하고 싶니?”

기대가 가득 담긴 눈에 도현이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가볍게 웃은 서혜나가 구두를 벗으며 말했다.

“당신 설명부터 해야지. 도현이가 당황할 만도 하네.”

“아, 음.”

이장혁은 뒤늦게 당황이 가득한 도현의 얼굴을 발견하고선, 민망한 기색으로 하하, 웃었다.

“흠, 흠. 아빠가 너무 들떴나 보다.”

겸연쩍어하는 이장혁의 모습에, 도현은 도리어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쿵, 쿵 뛰고 있던 심장은 여전했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계속 여기 서 있을 수는 없으니까.”

서혜나의 말을 따라 세 사람은 거실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깐, 하며 손을 든 서혜나가 마실 것을 가져오겠다며 주방으로 갔다.

이장혁이 자기가 하겠다며 일어났지만, 돌아오는 말은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말이었다.

결국 이장혁은 도로 자리에 앉아, 도현과 함께 서혜나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탁.

오 분이 채 되지 않아 돌아온 서혜나가 쟁반을 내려놓았다.

이장혁의 앞에는 자몽청을 탄 탄산수를, 자신의 앞에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도현의 앞에는 아이스 초코를 내려놓은 서혜나가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얼음이 많아서 싱거울 수도 있어. 한번 마셔봐.”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아이스 초코를 한입 마셨다.

얼음이 녹아 섞이며, 과하지 않게 단맛이 나는 음료는 시원하게 들이켜기에 딱 좋았다.

“맛있어요!”

도현이 진심으로 감탄하자, 서혜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 온 후, 코코아를 마시고는 싶지만 더워서 고민하는 도현에게 서혜나가 아이스 초코라는 신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처음에는 불경스럽게도 그 조합을 의심했으나, 한 번 마신 뒤부터 얼음과 초코라는 조합에 완전히 빠져버린 도현이었다.

이장혁도 자몽 탄산수를 마시곤 엄지를 치켜올렸다.

잠깐 목을 축이고, 이장혁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아빠가 말주변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조금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하자 도현이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 이야기 듣는 거 잘해요. 또 좋아하고요.”

도현은 말을 하기보다는 듣는 쪽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도현의 말에 조금 용기를 얻은 이장혁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점은 이장혁이 홀로 한국으로 돌아온 순간 부터였다.

아내와 아들을 미국에 두고 한국에 온 이장혁은 타지에서 생활하는 아내와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아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게 많은데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그렇게 시름시름 고민하던 중.

어느 날 엄청난 소식을 들었다.

바로, 도현의 영화 촬영 소식이었다.

“그때 정말 기뻤지. 도현이가 기운을 차리고 무언갈 하려는 것도 너무 기뻤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게 기뻤거든.”

이 대목에서 도현은 잠시 말문이 막히는 기분을 경험했다.

도현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와 떨어져 홀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원망이나 미움은커녕 오히려 본인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현은 이것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도현이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이장혁은 말을 이어갔다.

“연예인이나 드라마 협찬하면서 조금 알아보고 있었는데, NMC 방송국 쪽에서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동기랑 우연히 연이 닿았어. 원래 미술 하던 친구였는데, 몇 년 전부터 연출 쪽으로 틀었다고 하더라고. 도현이 얘기를 하니까 사진 한번 보내보라는 거야. 그래서 냉큼 보냈지.”

여기서 잠깐 도현은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냐는 물음에, 이장혁이 서혜나를 보았다.

“아.”

도현이 수긍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질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이장혁이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보냈다며 안심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계속 얘기해 주세요.”

“아, 그래. 그런데 오늘 전화가 왔어. 이번에 NMC에서 새로 제작하는 드라마에 아역 배우가 필요한데, 도현이랑 이미지가 정말 딱 맞는다는 거야.”

“어떤 이미지인데요?”

“부유한 중산층 집에서 자란 어른스럽고 의젓한 아이라더라. 정말 우리 도현이랑 딱 맞지.”

서혜나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였으나, 도현은 다르게 생각했다.

도현이 보기에 정말 ‘어른스럽다’에 어울리는 성격은 진이었다. 진은 그저 천진한 것 같다가도, 깜짝 놀랄 만큼 깊은 심계를 보일 때가 있었다.

반면, 자신은 그저 생각이 많고 조심스러운 것뿐이었다.

모든 어른이 차분한 성정을 지니지 않았듯이, 단순히 차분함과 침착함 혹은 얌전함 따위가 ‘어른스러움’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른들은 이상하게도 얌전한 아이를 보고 어른스럽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스스로 어른스럽다고 여긴 적 없던 도현은 부모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무튼, 잘된 일이지. 이쪽 업계가 대부분 지인을 통해서 연결되거든. 그래서 도현이가 한국에서도 연기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에이전시나 연기 학원에 등록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일이 풀리네.”

“오디션을 공개적으로 모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서 힘들다더라. 방송국 쪽에서도 검증된 아이들을 모아놓고 심사 보는 게 더 편하고 효율적이니까.”

도현은 무명 감독의 독립 영화인데도, 수없이 많이 몰렸던 지원자들을 떠올리곤 수긍했다. 독립 영화에서 그 정도였다면, 메이저 방송국의 공개 오디션이라면 훨씬 더 몰릴 게 분명했다.

“이게 또 대박인 게, 이연솔 작가랑 강이든이 참여하는 드라마래.”

“강이든? 강이든이 주인공을 맡는 거야?”

“응. 가현이가 완전히 픽스된 거라고 하더라고.”

“세상에!”

서혜나는 놀란 기색이었다. 도현이 눈만 멀뚱히 뜨고 있자, 조금 빠른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배우가 이십 대 배우 중에서는 제일 유명한 배우거든! 연기도 잘하고.”

“맞아. 인기 엄청 많더라.”

이장혁이 말을 덧붙이며 동의했다. 도현은 강이든이라는 배우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대체 어떤 배우이길래?

이런 생각도 잠시.

“대답을 빨리 줘야 한다는데 도현이는 어떻게 생각해? 오디션 보고 싶어?”

“어….”

도현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쉽사리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잠깐 하얘진 머릿속에 멍하니 있던 도현이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만약에, 촬영하게 되면 여름 방학 끝나기 전에 일정을 마칠 수 있나요?”

말을 뱉고 나서 보니 너무 적나라한 질문 같았다.

도현은 부모님의 눈치를 봤지만, 두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1화만 등장하는 단역이라서 촬영은 빨리 끝날 거야.”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좋네요, 따위의 대답을 할 수 없다 보니 애매한 대답이 나왔다.

평온한 공기 속에서 도현은 홀로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드라마 내용이 어떻게 돼요?”

던지고 보니 쓸 만한, 아니, 왜 이제껏 묻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었다.

도현의 얼굴이 금방 진지해졌다.

“대본 같은 경우는 비밀이라서 자세한 건 모르는데, 범죄 수사물이라고 하더라고. 강이든 배우가 경찰 역이니까 아마 경찰서를 배경으로 범인을 잡는 내용 같은데… 그리 어둡지 않고 밝은 분위기라던데?”

밝은 분위기의 범죄 수사물.

도현에게는 마치 얼음이 없는 아이스초코 정도로 들렸다.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그게 오히려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했다.

도현은 어느새 정도 이상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자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맡은 역할은요? 부유한 중산층에서 자란 어른스럽고 의젓한 아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없나요?”

도현의 적극적인 자세에 기억을 떠올리듯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이장혁이 기억이 난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가출한다고 했어!”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범죄 수사물이면서 어둡지 않은 분위기에다가, 가출했지만 어른스럽고 의젓한 어린아이.

도현의 얼굴에 물음표가 잔뜩 떴다.

다양한 상황을 상상해보던 도현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유에게도 가출한 과거사가 있었다.

‘혹시 유랑 비슷한 역할일까?’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어 말간 눈으로 무언의 재촉을 했다.

그러나 더 아는 것이 없던 이장혁이 멋쩍어하며 말했다.

“음. 그 이상은 오디션 지원하면 오디션용 대본을 보내준다네. 비관계자한테 드라마 내용을 발설할 수는 없으니까.”

“아, 그렇네요.”

도현은 아쉬움을 접으며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유와 비슷할까 싶었지만, ‘어른스럽고 의젓한’이라는 부분이 걸렸다.

유는 그보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혹은 ‘날카롭고 예민한’ 정도의 꾸밈이 어울렸으니까.

서혜나가 생각에 잠긴 도현을 응시했다.

얼굴에는 ‘나 궁금해요’라는 기색이 가득하면서, 하겠다는 말을 꺼내지는 않는다.

서혜나가 사뭇 가벼운 투로 말했다.

“영화 주인공만큼 부담스러운 역할은 아니니까, 여름 방학 동안 잠깐 조금 특별하게 논다고 생각하고 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내 조용히 맞장구를 치며 듣고 있다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서혜나는 자신의 말에 강요나 압박이 깃들지 않도록 특히 유의했다.

이장혁은 아직 모르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도현의 연기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리고 연기하는 도현이 얼마나 빛나는지.

그걸 알았을 때 서혜나가 느꼈던 감정은, 모순적이게도 기쁨이 아닌 걱정이었다.

‘나도 나이가 들었나.’

그리 생각하며 웃어 넘겼지만, 때때로 이 생각은 서혜나를 고민에 빠져들게 했다.

뛰어난 재능이 언제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서혜나는 도현이 가진 재능이 도현의 삶을 제멋대로 흔들고 휘두를까 봐 그게 걱정이 됐다.

그뿐 아니라 도현은 너무 어렸다.

혹여 일찍 시작한 일이, 아이의 선택지를 좁히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주변의 기대가 아이의 등을 떠밀게 되지는 않을까 온갖 걱정이 차올랐다.

그래서 서혜나는 모든 선택을 도현에게 맡기기로 했다.

자유롭게.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자신의 역할이었다.

무책임한 아이로 자라날 수도 있지만, 뭐 어떤가.

책임감 있는 것보다 아이가 행복한 게 몇 배는 더 중요했다. 책임은 자신이 지면 되니까.

“도현이가 원하는 대로 해. 일단 결정한다고 바로 확정되는 게 아니라 오디션을 보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는 말고.”

그리고 어디, 이리 말한다고 해서 도현이가 무책임하게 굴 아이던가.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했는데도 신중하게 고민하는 도현에 기특함과 안쓰러움, 양가감정이 느껴졌다.

한편, 도현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나가야 하는 주연이 아니라, 1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최근에 집에만 있었던 이유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혹시 언제까지 결정해야 할까요?”

“음. 최대한 빨리 알려달라고 하기도 했고,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하면 프로필 사진도 찍고 연습도 해야 하니까 내일까지는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보다 더 촉박했다.

“그럼 내일까지 생각해 볼게요.”

“그래, 생각해보고 도현이 마음이 끌리는 쪽으로 선택해서 알려줘. 엄마 아빠는 도현이가 좋은 쪽이 좋으니까.”

서혜나가 다시 한번 강조한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또다시 선택을 내려야 할 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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