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일곱 개의 꼬리별 (6)
도현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가 생각에 잠겼다.
도현이 혼자 고민하길 원하는 것을 알았는지, 서혜나와 이장혁은 도현을 방해하지 않고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도현은 지난 촬영을 떠올렸다.
영화 촬영은 힘들지만 즐거웠다.
도현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주었고 정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다음엔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한 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도현이 계속 연기 활동을 할 거라 믿는 눈치였지만, 정작 도현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영화를 찍는 것은 몹시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촬영이 끝난 후에 친구들과 보냈던 시간도 그 못지않게 행복했다.
그렇다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책의 한 페이지를 펴놓고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그러나 욕심이 불쑥 머리를 치켜들었다.
혼자 하는 것보단 상대 배우가 있는 게 더 즐겁지 않았어? 너 처음으로 연기한 순간 엄청 기뻤잖아?
그 속삭임에 도현은 홀라당 넘어갈 뻔했지만, 간신히 균형을 찾았다.
고개를 휙휙 저은 도현이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두 달의 시간 동안 도현은 최선을 다했고, 감정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격렬하게 몰아쳤던 것들을 아직 채 소화하지 못했다. 여기서 무언가를 더 시도한다는 건 책임감 없는 행동일지도 몰랐다.
아니.
감정적으로 큰 변화를 겪긴 했지만, 그건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의 변화였다.
그리고 도현은 격렬한 감정의 홍수에 익숙했다.
소화하는 중이라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게 도현의 선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으아….”
도현이 머리를 쥐었다.
오디션을 지원하면 안 될 이유를 떠올리려는데, 자꾸만 반사적으로 제 생각에 반박하고 있었다.
이래선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너무 투명하지 않나.
도현은 자신의 단순함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다.
마지막 이유가 남아 있었다.
도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모든 이유는 반박할 수 있었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도현의 연기 방식은 다소 독특했다.
로잔나는 메소드 방식, 즉, 배역과 자신의 싱크로율을 최대한으로 올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퇴원하기 전까지 도현의 실제 세상은 하얗고 네모난 병실이 전부였다. 그 공간에서 도현이 겪을 수 있는 감정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도현은 공원에서 다른 이들의 감정을 모방했고 그것을 책에 나온 인물의 감정에 대입했다.
그럼에도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에는 모방 내지 흉내로만 만들어진 속 빈 강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도현이 그토록 진짜 같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건, 도현이 연기할 때 자신의 ‘자아’를 최대한 배제하고 새로운 인물을 그려내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을 겪었고, 도현은 모르는 감정을 알고 있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도현이 가진 연기적 재능과 특출 난 상상력, 그리고 간절함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도현이 연기하는 순간이면, ‘도현’은 사라졌다. 오로지 도현이 연기하는 배역만 남았다. 같은 건 겉껍질뿐이었다.
이 탓에 영화를 찍을 때 형의 자아뿐만 아니라 도현의 안에 내재해 있는 유의 자아까지 섞여 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이번에 드라마 오디션을 보게 된다면, 또다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내고자 할 텐데….
평소라면 괜찮았을지 몰라도 최근에 불쑥 찾아오는 형의 기억에 곤란을 겪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니 연기가 현재 상황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선물받는 장면에서, 두 번째는 살인을 고해하는 장면에서.
두 번까지는 실수라고 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때는 이미 선택을 무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 번째부터는 실수라고 할 수 없다.
도현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무턱대고 하고 싶다고 덤벼들 수 없었다.
없는데…. 불나방 같은 성격이 어디 가지 않는지, 자꾸만 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는 자신이었다.
도현이 조금 우울한 표정이 되어 의자를 빙빙 돌리다가, 뚝 멈췄다.
“어떡하죠?”
누군가 본다면 허공에 혼잣말하는 도현을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도현은 혼자 중얼거린 게 아니었다.
도현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이렇게 물으면.
【내가 없었으면 어쩌려고 허공에 대고 묻냐?】
대답해줄 존재가 있었으니까.
도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반가움과 친애가 묻어나는 미소였다.
도현이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덩어리 님이 제 곁에 없을 리가 없잖아요.”
【조율자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인간 한 명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게?】
덩어리가 혀를 찼지만, 도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언제나 위험한 순간마다 도현을 끌어 올려준 존재가 있었다.
어떤 대가를 원하지 않고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에 도현의 곁에 있는 존재였다.
몇 번, 덩어리의 도움으로 고비의 순간을 넘으면서 도현은 점점 이 이상하면서도 경이로운 존재에게 마음을 열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존재는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도현이 완전히 행복해지기 전까지는.
어딜 가도 자신을 지켜보고, 함께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었다. 생명체처럼 죽음을 겪을 일도 없는 존재가 함께라는 것은 도현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렇게 나타나 주셨잖아요.”
도현이 실없이 웃자 덩어리가 타박했다.
【또 삽질이나 할까 봐 그러지. 아무튼, 오디션은 볼 거냐?】
“역시 다 보고 있었잖아요.”
【…큼! 이건 업무의 연장선상이라 그런다.】
업무의 연장선이든 무엇이든 좋았다. 그게 덩어리를 도현의 곁에 잡아두는 요소라면 뭐든 나쁘지 않았다.
절대적인 존재는, 사소한 것에 휘둘리는 인간에게 기묘한 안식과 충만함을 가져다주었다. 도현은 그리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디션을 봐도 좋을지 모르겠어요. 지금도 혼란스러운데, 또 다른 배역을 연기하면…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흠.】
“또 자아가 뒤엉키면 어쩌죠?”
도현의 물음에 덩어리가 대답 없이 둥둥 떠다녔다.
고민하는 걸까?
도현이 덩어리를 주시하는데, 덩어리가 딱! 하는 약한 정전기를 일으켰다.
도현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냐고 항변하려는데, 덩어리가 한 박자 더 빨랐다.
【너무 한 가지 생각에만 붙잡혀 있는 거 아니냐?】
“네?”
도현이 이마를 문지르며 반문했다.
【방법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건 너야. 나는 네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해. 그나마 이 문제는 네 영혼과 관련이 있으니 이 정도 말할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일상을 벗어난 존재가 익숙해지는 건 좋은 현상이 아니야. 생명체는 생명체와 어울리는 게 순리고, 맞는 일이니까.】
“덩어리 님은 생명체가 아니에요?”
【아니기도 하고, 맞기도 하지.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어. 네 영혼이 안정되면 나는 네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나에게 너무 익숙해지지 마. 현실을 벗어난 존재 말고 네 주위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
도현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이었다.
인연이 닿은 사람이 많았던 샌디에고와 달리, 한국에서는 부모님이 전부였다. 아니, 부모님과 덩어리 님이 전부였다.
자연스럽게 덩어리 님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몸집을 불려갔다.
도현은 그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의미 없음을 알지만, 발개진 얼굴을 숨기려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어설픈 원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왜 그렇게 떠날 듯이 말해요.
이제 도현은 덩어리가 사라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상상하기 싫었다. 덩어리는 이미 도현의 삶을 이루는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겉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덩어리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너는 아직 어리고,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좀 더 유연하게 생각해봐.】
“…네. 조언 고마워요, 덩어리 님.”
【그래도 밖에 안 나가고 집에만 있는 건 잘하고 있다. 아직 영혼이 완전히 섞인 게 아니라서, 조심하는 게 좋아. 물론 정신력만 좋다면 그다지 상관없겠지만… 지금 네 정신력이 그걸 감당할 만큼 단단하지는 않아.】
덩어리의 말에 도현은 홀로 생각했던 것을 물었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버티기 수월해진 것 같은데, 맞나요?”
【맞아. 예전에 네 정신력이 묽은 수프 정도 되었다면, 지금은 뭉친 수프는 되거든. 네 정신력이 완전히 단단해지고, 네가 정체성을 완전히 확립하게 되면 그때는 한국에 와도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아.”
도현은 기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정신력이 여물고, 정체성이 확립되는 날.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심이 한소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에 대한 힐난과 혐오 몇 스푼, 그리고.
“그런 날이 올까요?”
아직은 막연하고 아득한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한 컵.
불신과 기대가 어지럽게 얽혀 있어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도현의 질문에 침묵하던 덩어리는.
【올 거다.】
단호하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아주 멋진 어른으로 클 거야, 넌. 내가 장담하마.】
잠들기 직전에, 혹은 낮잠을 자다가 문득 정신이 수면 위로 올라왔을 때 느끼는 아득한 편안함과 따스함이 있었다.
도현은 이 순간 그러한 감각을 느꼈다.
도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네.”
어렴풋한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 * *
덩어리는 할 말을 끝냈다는 듯, 불시에 사라졌다.
도현은 덩어리가 사라진 곳을 한참이나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도현의 눈이 창가를 향했다. 정말 창밖을 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시선을 둘 곳을 찾았을 뿐이었다.
도현은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확한 방법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 수확은 있었다.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지금 내가 모르는 것 중에 방법이 있다는 거야.’
그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오디션을 볼 수 있어.’
그 사실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해서, 도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덩어리 님이 힌트를 주었으니 이제 자신이 문제를 풀어야 할 때였다.
내가 모르는 게 뭘까?
도현은 자문했다.
덩어리가 했던 말을 계속 곱씹기도 했다.
이 끝에 답이 존재함을 알았기에, 고민하는 게 아까처럼 괴롭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도현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생각에 집중했다.
좀 더 유연하게.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다….
‘뭘까? 내가 당연하게 한 가지만을 생각했던 게….’
모르겠다.
도현이 짝! 양손으로 뺨을 치곤 다시 심기일전했다.
‘다시 처음부터 생각을 정리해보자.’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하나하나 떠올렸다.
오디션을 지원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아로 인한 혼란의 발생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어?”
도현이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새로운 자아를 상상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도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랬다.
도현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
도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의 연기 방식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면, 다른 방법으로 연기하면 될 일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해답에 도현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알고 보니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해결법이었다.
도현은 지금까지의 방법을 잠시 동안 쓰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서 자아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고….
도현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방법을 강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