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2)화 (83/582)

제82화. 일곱 개의 꼬리별 (7)

-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도현이 보낸 문자를 보자마자 전화를 건 맥이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심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조금 멋쩍게 웃었다.

“그냥 오디션만 보기로 한 거예요. 떨어질지도 모르,”

- 며칠 후에 내가 똑같은 말을 할 거라고 백 퍼센트 장담한다.

맥이 단언했다.

오디션 참가를 결정한 후.

도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맥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었다.

맥은 메시지를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고, 다음과 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 뭐라고 했었지? 연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영화를 찍을 필욘 없다고 했었나?

맥이 도현을 놀렸다.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 아! 그럼, 영화’만’ 찍을 필요 없다는 소리였어? 영화는 찍었으니 됐고 이제 드라마를 찍겠다는 소리였나 보네!

자꾸만 깐족거리는 맥에 도현의 입이 조금 튀어나왔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 있는 맥은 그런 도현의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도현이 조용히 있자, 한참을 실컷 놀리던 맥이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야, 도리토스. 삐진 거 아니지?

“제가 왜 삐져요?”

- …진짜 삐진 거야?

맥의 목소리엔 당황이 담겨 있었다. 본인이 놀리고선 정말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니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 야야, 장난이었어! 그냥 심술 좀 부린 거야! 정말 화난 거 아니지? 어?

누군가를 달래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맥은 호통을 치는 건지 사과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맥이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다가, 도현은 참지 못하고 입매를 파르르 떨었다.

“푸흡.”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맥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 나 속은 거냐…?

음산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아뇨, 푸흐, 제가 맥을 어떻게 놀려요?”

- 웃음소리라도 감추고 말하든가!

그 성의 없는 변명에 맥이 기가 차다는 듯이 소리쳤다. 도현이 이제 대놓고 끅, 끅 소리를 내며 웃었다.

영화 촬영 때부터 느낀 건데, 맥은 반응이 너무 재밌었다. 스스로 연상이라고 생각해 바들바들 떨며 참는 것도 재밌고 귀여웠다.

도현은 한참을 웃다가, 큼큼, 헛기침했다.

맥이 심통이 난 목소리로 물었다.

- 다 웃었냐?

“더 웃을까요?”

맹랑한 말에 맥은 할 말을 잃었다. 뒤늦게 뒤통수가 아림을 느끼며 무어라 하려던 찰나.

“저 연기를 조금 다르게 해보려고요.”

- 뭐?

도현이 꺼낸 말에 하려던 말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 다르게? 어떻게 다르게?

“전에 촬영장에서 제가 연기하는 방식 얘기한 거 기억나요?”

- 아, 그 하얀 배경에 인물을 그려 넣는다던 거?

“네, 그거요.”

한 박자 쉰 도현이 이어 말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서 제게 덧입히려고 하지 않고, 제가 직접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고 연기해 보려고요.”

- …그게 뭐가 다른데?

확실히 남들이 듣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긴 했다. 애초에 도현의 원래 방식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었으니까.

“음. 그냥…. 이전에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고자 했다면, 지금은 제가 다른 인물은 연기한다는 정도요?”

- …어, 어. 그래. 알아들었어.

썩 믿음직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굳이 걸고넘어지지는 않았다. 도현의 이야기를 듣던 맥이 궁금한 점을 물었다.

- 그런데 갑자기 왜? 너 연기 잘했잖아. 바꿀 이유가 있어?

“맥도 알겠지만, 촬영할 때 곤란한 상황이 몇 번 생겼잖아요.”

도현의 말에 맥이 아, 하는 탄성을 뱉었다.

그거 때문이구나,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걱정을 담은 것도 같았다.

“촬영 도중에는 연기 방식을 바꾸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요. 그리고 꼭 한 가지 방법으로만 연기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 으음… 확실히.

맥은 도현의 말에 긍정했다.

- 괜찮은 생각이네, 그래. 아, 아냐.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은 생각이야.

맥은 납득을 넘어 안도하고 있었다.

영화 촬영 때는 자신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바로 조치했지만, 한국에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면?

가정만으로도 섬뜩했다.

- 응, 맞아. 잘 생각했어.

맥이 고개를 주억이다가, 입을 열었다.

- 그럼 오디션이 언제인데?

“일주일 뒤요. 음, 다음 주 화요일이네요. 아, 맥 기준으로는 월요일이요.”

- 얼마 안 남았네. 연습은?

“어제 결정한 거라서 아직 대본이 안 왔어요. 지금은 자유 연기만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에요. 캐릭터가 어른스럽고 의젓한 가출 어린이인데, 어울리는 독백 연기를 찾는 중이라서요.”

- 꼭 진짜 작품에 등장한 독백이여야 해?

“그건 아니에요.”

- 그럼 찾아볼 필요 없이, 그냥 네가 쓰면 되겠는데.

“네? 제가요?”

- 어. 네가 가출하면 어떻게 행동할지 쓰면 프리패스다, 프리패스.

“제가 어른스럽고 의젓하다고 생각했어요?”

- 허, 뭔 소리야. 그냥 애늙은이지!

맥이 너무 정색하고 반박해서, 도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후, 맥이 도움 될 만한 영화 두어 개를 추천해 주었다.

그들은 오디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일상적인 주제로 넘어갔다.

“맥은 어떻게 지냈어요?”

- 나야 뭐 똑같지. 맨날 밀가루 반죽만 하고 있어. 이러다가 팔만 근육맨 될 것 같다니까.

맥이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 넌 좋겠다. 여행도 가고 오디션도 보고. 곧 드라마도 찍을 거잖아.

“그건 모르는 일,”

- 너만 빼고 다 알아.

세상에 일어나기 전까지 확신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맥은 왜 이리 확고한지 모를 일이었다.

하긴, 촬영 때부터 유독 맥은 도현을 찰떡같이 믿는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잘 속는 건가?’

도현은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도현과 맥은 그 후로도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맥은 자기가 핫도그를 땅에 떨어트려 놓고 되레 성을 내며 환불해 달라던 진상 손님 얘기부터, 은근히 또 촬영은 안 하냐고 묻는 케이시의 얘기를 했고.

도현은 자신이 한국어를 쓰자 놀라서 뒤집개를 떨어트린 아빠 얘기와 한국에 있는 집에서도 이 층을 쓴다는 얘기, 최근에 본 영화에 등장한 배우의 연기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도현은 슬슬 전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맥, 그럼 오디션 결과 나오면 다시 연락 줄게요.”

도현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통화를 마무리했다.

전화를 끊은 도현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고여 있었다.

방금 맥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도현은 생각했다.

‘맥의 말처럼, 직접 자유 연기를 준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

당시엔 맥이 놀린다고 여겨 그냥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괜찮은 생각 같았다.

정말 마땅한 독백을 찾지 못하면 직접 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주말이 되기 전까지 도현은 오랜만에 바쁘게 움직였다.

자유 연기에 쓸 만한 독백 대본과 처음으로 찍는 프로필용 사진 촬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쉬이 풀리지 않았다.

자유 연기의 경우.

서혜나와 이장혁이 각자 많은 대본을 뽑아다 주었지만, 정작 도현의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은 없었다.

일단, 지정 대본이 도착하지 않아 캐릭터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점도 한몫했다.

프로필용 사진 촬영의 경우.

찰칵!

“어쩜, 이 사진도 좋아!”

…부모님과 연습하는 건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또한, 이 역시 지정 대본이 없어서 배역과 어울리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콘셉트 사진을 준비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래도 도현은 ‘어른스럽고 의젓한’, ‘가출 소년’, ‘무겁지 않은 드라마’라는 요소들을 최대한 참고하여 콘셉트를 준비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도현은 덩어리가 말했던 ‘넌 연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을 조금 이해했다.

연기하게 되니, 언제 무료함을 느꼈냐는 듯 하루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냥 눈을 몇 번 깜빡였는데 다음 날이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세 가족이 찾은 곳은 조금 특별했다.

오디션용 프로필을 위해서 스튜디오를 방문한 것이다.

* * *

화양연화 스튜디오.

스튜디오의 대표 사진작가, 정은주는 넓은 스튜디오에 홀로 나와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카메라를 점검했다.

그 후엔 전날에 Marine 쪽에서 보낸 옷들을 한쪽 행거에 정렬했다. 그렇게 정리하고 있자니,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일찍 왔네요?”

그녀처럼 프로필 촬영을 위해 출근한 스타일리스트 박하준이 미리 와서 세팅을 마친 정은주를 보며 말했다.

“미리 와서 점검해 놓으면 좋잖아요.”

“이런 모습 볼 때면 진짜 프로구나 싶다니까요.”

“평소엔 프로 같지 않다는 소리예요?”

“에이, 그냥 말이 그런 거죠.”

두 사람이 가벼운 스몰토크를 하면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린아이니만큼 성분이 순한 베이스 제품 몇 개를 챙겨 와 정리 중이었던 박하준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대표님 아들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그는 살짝 의아한 기색이었다.

Marine와 박하준이 속한 살롱에서 협력을 맺고 같이 일한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대표님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은주는 그의 질문에 카메라를 만지던 손을 멈칫했다.

“…음, 모르세요?”

“네? 뭐가요? 저만 또 모르고 있었나요?”

“그게… 좋은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정은주가 가볍게 한숨을 한번 쉬고는 손짓을 했다.

박하준이 의아해하며 가까이 다가가자 조심스럽게 문 쪽을 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준 씨가 혹시나 대표님한테 물어볼까 봐 미리 말해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듣고,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잊어버려요.”

“알겠어요.”

“두 분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아팠다나 봐요. 그런데 치료법이 없는 희귀병이라 아들만 미국에 있는 센터에 입원해 있었다는 걸로 알아요.”

“그런….”

박하준은 많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에는 그런 쪽 이야기만 나와도 두 분 분위기가… 어우, 장난 아니었죠.”

“그럼 이제는 다 나은 건가요?”

“하준 씨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서혜나 대표가 미국에 간 게 아이가 퇴원해서 그런 거예요. 서혜나 대표는 아이랑 미국에서 살고, 이장혁 대표는 한국에 있고 그런가 봐요. 근데 이번에 여름 방학이라 한국에 같이 왔나 보네.”

“정말… 하나도 모르고 있었네요.”

두 사람은 가볍게 침묵했다.

잠시 후, 박하준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이가 건강해져서 정말 다행인 일이네요.”

“정말요. 요즘 두 분 안색이 얼마나 피었는지 몰라요. 몇 년은 젊어진 것 같다니까.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그랬을까….”

정은주는 조금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도어 벨 소리가 울리면서 자연스럽게 멈췄다.

정은주는 박하준에게 눈짓했다. 박하준은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서 함구하겠단 뜻이었다.

정은주가 문을 열며 세 사람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오는 데 힘드시진 않았어요?”

“오늘따라 길도 안 막히더라고요. 편하게 왔어요.”

“서 대표님은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너무 완벽하게 잘 지냈죠.”

서혜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우아하게 웃는 얼굴의 표본이 이런 거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미소였다.

‘여전하시네.’

그리 생각하던 정은주가 그들 사이에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가 그….

“어머.”

정은주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까까지 아이에게 느꼈던 안쓰러움과 동정은 어느새 까맣게 잊은 채였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진흙 속에 있어도 지나치지 못할 만큼 스스로 빛을 발하는 진주가 보였다.

단순한 외적인 미를 넘어선 것. 누군가는 카리스마라고 하고, 누군가는 매력이라고 하며, 누군가는 분위기라고 하는 것을 가진 이에게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절 찍어주신다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하얀 두 뺨에 아기 같았던 인상이, 입을 열자 조금 더 성숙하게 변했다. 그 나이대 같지 않은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 탓이었다.

정은주는 전달받았던 콘셉트를 떠올렸다.

‘어른스러운 아이 이미지라고 했나?’

콘셉트를 잡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정은주는 이 나이대 아이가 이렇게까지 깊은 눈빛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저 검은 눈동자를 카메라 너머로 보면 어떨까?

정은주는 오랜만에, 열정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끔 가다 아주 마음에 드는 뮤즈를 만날 때만 느꼈던 감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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