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일곱 개의 꼬리별 (8)
“이름이 이도현 맞죠? 화양연화 스튜디오 대표 정은주예요. 거짓말이 아니라, 카메라로 찍고 싶어지는 모델이네요. 오늘 작업은 정말 즐거울 것 같아요.”
서혜나와 이장혁은 정은주의 성격을 알았다. 그녀는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확고해서 빈말을 하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이렇게 먼저 칭찬을 건네는 경우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 피사체를 만난 경우뿐이었다.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 박하준 스타일리스트도 안에 있어요.”
안으로 들어가니 한 남성이 도현을 반겼다.
도현을 바라보는 표정이 묘한 낯을 띠었다. 타인을 관찰하는 데 능숙했던 도현은 쉬이 그 감정을 눈치챘다.
박하준은 도현을 동정하고 있었다.
‘내 얘기를 아는 걸까?’
잠깐 의아했던 도현은, 곧 수긍했다. 여기 있는 두 사람은 Marine와 오랫동안 같이 일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도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썩 유쾌하지는 않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약한 불쾌함도 곧 사라졌다.
도현에게 보이는 동정이 우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순수한 걱정에서 비롯된 감정임을 느낀 탓이었다.
그걸 알기는 매우 쉬웠다.
“뭐 마실래? 응? 단 거 좋아해?”
도현에게 무한한 관심을 보이며 자꾸만 잘 대해주려고 하고 사소한 몸짓에도 안절부절못했다.
정은주는 그런 박하준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원체 사람 자체가 깨끗하고 착하지만, 그만큼 눈치가 조금 부족하고 호들갑이 많았다. 혹시 이럴까 봐서 미리 말해둔 건데… 소용이 없었다.
정은주는 두 대표를 흘긋 보았다.
걱정과 달리 두 사람은 그저 흐뭇한 표정만 짓고 있어서, 마음을 편히 먹었다.
“메이크업하기 전에 잠깐 이리 와 봐요. 오늘 촬영할 세트장을 보여줄게요.”
도현은 조금 기대하며 정은주를 따라갔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세트장은 아주 심플했다.
새하얀 배경 한가운데에 조금 높아 보이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조명과 반사판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별거 없죠?”
정은주가 도현을 보며 웃었다.
“음… 깔끔하네요.”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도현에, 정은주가 유쾌하게 웃었다.
“원래 오디션용 프로필은 이렇게 배경을 간단하게 하고, 모델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찍어요. 모델이 어떤 매력과 분위기를 가졌는지 드러내기 위해서요.”
설명하던 정은주가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스튜디오에서 사진 찍어본 경험 있어요?”
“처음이에요.”
“사진 찍히는 건 익숙하고요?”
도현은 잠시 고민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사진이란 자신과 거리가 멀었으나… 최근 시도 때도 없이 사진을 찍는 엄마에 슬슬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무서운 것도 아니고요. 정 힘들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편하게 생각해요.”
도현의 대답이 늦어지는 걸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정은주가 부드럽게 달랬다.
딱히 부정할 필요는 없어서 도현은 고맙다고 대답했다.
잠깐 스튜디오를 둘러보고 나자, 박하준이 도현을 불렀다.
“흰옷을 입을 거라 착장부터 하고 메이크업할 거야. 자, 뭐가 어울리나 보자.”
이 옷 저 옷을 도현의 몸에 대보던 박하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무언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도현이 물어보려는데, 박하준이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 다 어울리는데?”
박하준의 진지한 눈과 마주친 도현은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부모님에게 단련된 도현에게 이제 이 정도는 아주 여유로웠다.
“뭐야, 왜 웃는 거야! 귀엽게!”
…아직 조금 더 내공이 쌓여야 할 것 같긴 했다.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이더라도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치면 서로에게 웃어주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웃을 때마다 박하준이 온갖 칭찬을 늘어놓아서, 도현은 얼굴을 가만히 두기로 했다.
박하준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표정으로 한 옷을 도현에게 건넸다.
“주름지지 않게 조심해서 입어야 해!”
“알겠어요!”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도현이 밖에서 들린 목소리에 대답했다.
입고 나서 보니, 아주 단정한 흰색 반팔 와이셔츠였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했고, 여름옷치고 두께가 꽤 있어서 각이 잘 살았다.
하의는 무릎까지 오는 남색의 오부 바지였다. 흰 양말과 단화까지 신고 나가자 탈의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네 어른을 발견할 수 있었다.
“Perfect!”
박하준이 박수 치며 외쳤다. 정은주도 썩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었다.
도현은 콧바람을 부는 박하준을 따라 화장대 앞에 앉았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일단, 어른스러운 분위기랬으니까 머리카락은 차분하게 갈 거고 메이크업은 피부 보정… 보정이 필요한가?”
박하준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어 말했다.
“일단 피부 톤만 조금 고르게 하고, 카메라에서 잘 나올 수 있도록 아주 약간만 음영을 줄 거야. 그리고 눈썹을 조금만 다듬고 입술 색만 조금 칠하면 될 것 같네.”
“잘 부탁드려요.”
“하하. 그렇게 말하니까 꼭 살롱 손님들 같다. 아니, 지금 네가 손님이 아니란 소리가 아니라, 어른들 말이야. 되게 어른스럽네, 도현이는!”
박하준은 말을 많이 했는데, 도현이 어색해할까 봐 배려해준 것 같았다.
도현은 처음에 입술을 움직이면 메이크업에 방해가 될까 봐 조심조심 말하다가, 편히 말해도 된다는 말을 듣고는 조금 민망해했다.
“자, 다 됐다!”
도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메이크업을 받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 촬영을 하면서 숱하게 한 게 메이크업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도현의 피부 톤을 낮추고, 좀 더 거친 이미지를 주기 위한 메이크업이었다.
이렇게 외모의 미적인 부분에 집중한 메이크업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별로 건든 건 없는 것 같은데, 한결 더 깔끔하고 보기 좋았다. 그의 말대로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도 같았다.
* * *
“일단 이렇게 단정하게 정면 사진부터 한번 찍고, 다음번에는 콘셉트 사진을 찍을 거예요.”
조명을 이리 저리 움직이던 정은주가 도현에게 물었다.
“조명 때문에 눈이 부시지는 않고?”
“네. 괜찮아요.”
“그래. 된 것 같네요, 그럼.”
정은주는 카메라 뒤로 가서 섰다.
“정면 사진부터 찍을게요. 카메라 살짝 아래쪽으로 시선을 보고, 응, 좋네요. 아, 살짝만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볼까요? 그건 너무 갔고. 조금만 다시 왼쪽으로 틀어봐요.”
한참이나 이런저런 지시를 한 정은주는 마음에 들었는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선 말했다.
“딱 좋아요.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네. 찍습니다.”
도현은 카메라를 응시하며, 현재 시선의 위치와 턱의 각도, 어깨와 가슴의 방향과 높이를 모두 기억했다.
찰칵!
다들 촬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했기 때문에, 넓은 스튜디오에서는 카메라의 촬영 음만 울렸다.
“좋아요. 조금만 웃어볼까요? 아, 어쩜, 예쁘다. 완벽해요. 다시 찍습니다.”
찰칵. 찰칵.
모니터에 뜨는 사진을 보고 있던 서혜나와 이장혁이 감탄했다. 워낙 완벽해서 뭘 해도 완벽 그 자체지만, 서혜나가 찍은 사진과 전문가의 솜씨는 다르긴 달랐다.
사진에서 반짝반짝한 광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정면 사진은 금방 끝났다.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끝나서 조금 어리벙벙했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잘 웃네요. 카메라 앞에서 어색하지 않게 웃는 게 쉽진 않은데.”
정은주의 칭찬에 도현은 어색하지 않게 찍힌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다음 촬영은 배역에 맞춘 콘셉트 사진이었다. 정은주는 반신과 전신사진을 찍을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찍는 건, 도현이가 맡은 배역 있죠? 그 배역이 도현이라면 어떨까, 생각하면서 찍는 거예요. 영상은 아니지만, 사진도 연기가 필요한 거죠.”
정은주의 설명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 사진을 찍을 때보다는 긴장이 풀렸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기는 했다. 도현은 정은주가 한 말을 되새겼다.
- 이것도 연기가 필요한 거죠.
연기.
그래, 지금 도현은 연기하는 거였다.
그리 생각하니 마법처럼 긴장이 사라졌다. 도현은 편하고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자유롭게 움직여요. 아까 말했듯이,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좋아요. 구도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도현은 완벽하게 정면을 향했던 아까와 다르게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았다.
살짝 왼쪽으로 몸을 튼 채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자세는 별달리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던 정은주의 손가락이 잠깐 느려졌다.
이쪽을 응시하는 아이는, 아까와 다른 게 없어 보임과 동시에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선명한 검은 눈에 미묘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일자로 다문 입술은 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정은주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찰칵.
셔터 음이 울렸다.
정은주는 문득, 도현이 나오는 드라마를 챙겨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아이가 가진 슬픔이, 아이를 아이답지 않게 만드는 인위적인 성숙함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해진 탓이었다.
이로써 아직 방영도 하지 않은 드라마는 시청자 한 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찰칵.
도현이 누군가를 보듯이 살짝 고개를 위로 향한 채로 환하게 웃었다.
찰칵.
셔터를 누른 건 거의 본능이었다.
도현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의자에 앉은 채로 양손으로 의자 바닥을 짚고 어깨를 살짝 높이 들었다.
그러고선 시선을 피하듯이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턱을 살짝 치켜올렸다.
차분하면서도 의아함이 담긴 사진이었다.
반신과 전신 촬영까지 모두 끝났다. 혹시 더 찍을 게 있을까 싶어서 모니터링을 한 정은주는 입을 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정은주는 다시 한번 첫 사진으로 돌아가서, 끝까지 돌려 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변함없었다.
단 하나도, 버릴 구도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는가?
모델이 움직이다 보면 중심을 조금 벗어나거나, 쓰기는 부족한 B컷이 나오곤 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각도와 구도를 고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진을 찍는 거였다.
그러나 도현의 사진은 놀랍게도, 모든 컷이 A컷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마치 도현이 자신이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자세를 취한 것 같았다.
“잘 나왔다!”
같이 보고 있던 서혜나가 굉장히 좋아했다. 그녀를 보던 정은주가 약간 신기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사진을 보는 도현을 보다가 물었다.
“혹시 카메라에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었니?”
세 사람은 정은주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일하게 도현만이 그 질문을 이해했다.
“처음에 정면 사진을 찍었잖아요.”
정은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게 뭐 어떻다는 걸까?
의문을 품는데, 도현이 말했다.
“그 자세를 기억해서, 그걸 기준으로 자세를 바꿨어요.”
“!”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정은주가 경악과 의심이 반반 섞인 시선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러나 도현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죠?”
“대단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긴가…?”
“우리 애가 좀 똑똑해요.”
“똑똑한 수준을 넘어섰어요! 잠깐 찍은 걸로 시선 처리와 고개와 몸의 미묘한 방향까지 모두 기억했다는 소리라고요!”
정은주는 드물게 흥분했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그런 정은주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들도 가끔은 도현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도현이라서 그래요.”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