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4)화 (85/582)

제84화. 일곱 개의 꼬리별 (9)

정은주는 조금 어이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때였다.

“음….”

도현이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시선이 향한 곳은 도현의 사진이 크게 뜬 모니터라서, 정은주는 의아해졌다.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조금요.”

“왜요? 이렇게 잘 나왔는데! 이렇게 모든 컷이 잘 나오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에요.”

“사실 구도를 고려하느라 자세를 소극적으로 취했거든요.”

“아…?”

정은주는 다시 사진을 보았다.

카메라 너머로 전해져 오는 감정이 압도적이라 인지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자세의 변화가 소극적이었다.

그러니까, 도현의 말이 진실이란 소리였다.

정은주는 굉장히 벙찐 표정을 짓다가, 지금 일을 하는 중임을 상기하며 정신을 차렸다.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찍을까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아주 좋아 보여요. 사실, 자세 변화가 적은 게 배역의 성격을 표현한 줄 알았거든요.”

“괜찮아요. 다시 찍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조금 아쉽긴 했지만, 정은주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적인 자세가 캐릭터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콘셉트 촬영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도현은 라운지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서 박하준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것도 먹어. 이게 우리 스튜디오에서 제일 잘 팔리는 과자야.”

누가 들으면 과자 판매점이라고 오해할 법한 소리였다.

도현은 우스운 생각을 하며 과자를 씹었다.

바삭-

부드럽게 부서져 내린 과자 안에 있는 사과 시나몬 잼이 씹혔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맛있었다.

잠깐 과자를 냠냠한 도현은 다시 화장대 앞으로 가서 메이크업 수정 과정을 거쳤다.

이번에도 박하준이 옷을 골라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도현에게 마음에 드는 옷을 몇 벌 골라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도현만의 매력과 분위기가 중요한 촬영이라, 도현의 취향이 반영되는 게 자연스러움을 살린다는 논지였다.

도현은 항상 옷을 고르는 데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냥 편하고 무난해 보이는 옷들을 골라 입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꾸민다 싶은 날에는 항상 엄마가 골라줬다.

막상 이렇게 골라야 하는 상황이 되자, 평소처럼 아무렇게나 선택하긴 꺼려졌다. 때문에 행거 앞에서 한참이나 헤매야 했다.

결국, 도현은 무언가 특별한 것을 고르길 포기하고 평소의 차림과 비슷한 것들을 골랐다.

무난한 흰 티에 검은색 반팔 후드 집업, 그리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청바지였다.

도현이 고른 옷을 유심히 보던 박하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표시를 보냈다.

뭔가 시험을 치른 듯한 느낌에 도현은 조금 힘이 빠졌다.

도현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오자, 박하준이 도현을 다시 화장대 앞으로 이끌었다.

“아까는 차분하게 했으니까, 지금은 좀 더 편안하고 캐주얼한 분위기로 가보자.”

그렇게 말한 박하준은 고데기와 드라이기를 이용해서 차분한 생머리였던 도현의 머리카락에 부드러운 컬을 넣었다. 항상 이마를 전부 덮었던 도현의 앞머리에 가르마가 생겼다.

이름도 가르마 펌이라고 해서, 도현은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스타일링이 끝나고 거울을 보니, 평소보다 조금 더 활기차고 동적이게 보이는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밝아 보이는 모습이 은근히 마음에 든 도현이 흡족해하고 있는데, 서혜나가 감탄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잘생겼다.”

끄덕끄덕.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차분하게 이마를 덮은 도현이 예쁨에 가까웠다면, 머리카락에 조금 컬을 넣은 지금은 잘생김이 조금 더 많이 느껴졌다.

아직 어린데도 이미 완성형인 미모였다.

정은주의 의욕 수치가 완전히 차올랐다.

도현이 다시 세트장에 섰을 때였다.

정은주가 아참, 하고 손바닥을 한 번 마주치고는 말했다.

“이번에는 구도는 신경 쓰지 말고 해요. 자연스럽게 찍히는 게 중요하니까요.”

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카메라에 어떻게 비칠지까지 모두 계산해서 자세를 잡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자유 촬영이 이어졌다.

도현은 아까보다 좀 더 편한 느낌으로 자세를 취했다.

사실,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움직였다에 가까웠다.

다만 표정은 다양하게 했다.

환하게 웃기도 하고, 멀뚱히 쳐다보기도 했으며, 재밌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기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했다.

방금 전 콘셉트 촬영과 달리 촬영 분위기는 굉장히 자유로워서 도현이 표정을 지을 때마다 한쪽에서 서혜나가 ‘아구, 예뻐라!’라고 외쳤고, 다른 쪽에서는 이장혁이 ‘시, 심장이….’라고 말하며 심장을 부여잡았으며, 박하준은 ‘잘한다! 잘한다!’ 하며 박수쳤다.

굉장히 산만한 환경이었지만, 편안하게 촬영하기엔 이쪽이 더 편했다.

다만 조금 민망하긴 해서 도현이 뺨을 조금 발갛게 물들며 눈을 내리까는데.

찰칵!

프로 중의 프로인 정은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모든 촬영이 끝났다.

같은 자리에서 촬영하느라 움직임이 많지는 않았는데, 도현은 어쩐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만큼 지친 느낌이었다.

“수고했어요. 사진은 월요일 날 보내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뭘요. 정말 재밌었는걸요. 어린 친구랑 작업하면서 이렇게 수월했던 것도 처음이고요. 다음에도 찍을 일 있으면 저랑 같이 작업해요.”

정은주의 말에 도현이 하하, 웃었다. 그러자 정은주도 웃다가.

“저 이거 진심이에요.”

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도현도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약속하는 거예요? 또 저랑 촬영해야 해요?”

정은주는 몇 번이나 도현에게 확답을 받고 나서야 만족했다. 정은주는 도현이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촬영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 * *

직장인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월요일.

정가현은 피곤한 숨을 삼키며 컴퓨터를 켰다. 가장 먼저 업무 메일을 확인하는데,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엉? 아, 맞다. 한다고 했지.”

딸칵.

첨부 파일을 열자, 흔하디흔한 오디션 프로필이 열렸다.

그러나 전혀 흔하지 않은 비주얼에 정가현은 잠이 확 깼다.

“와… 얘는 참.”

두 번 봐도 새로운 비주얼이었다. 분명 양쪽이 모두 한국인인 걸로 아는데, 묘하게 혼혈 같았다.

이장혁도 대학에서 미술학과 ‘걔’로 이름 좀 날렸지만, 그 아들은 몇 단계 더 진화한 완전체 같았다.

정가현은 프로필을 출력했다.

디익, 디익, 딕.

프로필이 조금씩 출력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여유롭게 믹스커피를 탔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나도 한 잔 줘.”

“아, 감독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그래. 좋은 아침.”

이번 드라마의 총감독을 맡은 박민호 PD였다. 정가현은 종이컵을 한 잔 더 꺼냈다.

“감독님은 블랙이죠?”

“믹스는 달아서 못 마시겠어. 어, 땡큐.”

후룩.

커피를 한 입 마신 박민호는 정가현의 손에 들린 종이에 관심을 보였다.

“그건 뭐야? 오디션 프로필?”

“아, 이송하 역할 오디션 있지 않습니까. 이송하랑 이미지가 딱 맞는 아역 배우가 한 명 있어서요.”

“배우? 지망생이 아니고? 전작이 있는 애야?”

“그게… 애매한 게, 미국에서 독립 영화를 하나 찍었다더라고요.”

“미국? 독립 영화?”

“네. 미국에서 사는 애라. 이번에 여름 방학 때 잠깐 한국에 왔습니다.”

흔치 않은 스펙에 감독이 흥미를 보였다.

“영화는 제목이 뭔데?”

“아직 촬영만 모두 끝내고 편집 중인 상황이라네요.”

“뭐어…. 개봉 안 했으면 아직 배우는 아니지.”

박민호는 조금 들었던 흥미가 다시 식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미지가 딱 맞다니까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 하는 마음에 프로필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정가현이 프로필을 건네고, 박민호는 별다른 기대 없이 눈을 내렸다가 멈칫했다.

“흠.”

프로필을 보는 눈이 조금 진지해졌다.

“마스크가 엄청 좋은데? 이거 포토샵 한 거 아니야?”

“오디션용 프로필에 포토샵을 했겠습니까. 아, 애 아빠가 옛날에 보냈던 사진도 있어요.”

“보여줘 봐.”

정가현이 핸드폰을 꺼내서 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촬영장으로 보이는 곳에, 프로필에서 웃고 있던 소년이 서 있었다.

“허, 어디서 이런 애를 찾았어? 이렇게 예쁘게 생긴 애는 또 처음 보네.”

박민호이 고민하는 기색으로 흐음,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마스크가 너무 튀어. 카메라에 잡히면 시선을 끌 텐데, 연기력이 안 좋으면 오히려 마이너스지.”

주조연이 극을 진행시킨다면, 단역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송하는 1화에만 등장하는 일회성 단역이었다.

이 정도 외모라면 어느 정도 화제성을 몰고 올 수 있어서 좋았지만, 만약 그게 발연기라면 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자칫하면 1화부터 극의 몰입감을 깨버릴 수 있었다.

“오디션이 언제라고 했지?”

박민호는 이 어린아이가 빛 좋은 개살구일지, 진짜 보석일지 궁금해졌다.

* * *

기다리던 대본이 도착했다. 도현은 떨리는 심정으로 대본을 읽어 내려갔다.

대본은 언뜻 보기에도 아주 짧았지만, 도현에게는 그 짧은 몇 줄의 글이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장면은 총 두 장면이었는데, 앞서 집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확인한 도현은 두 번째 장면을 읽었다.

[드라마] 불량경찰 – 강/이송하

강 :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이송하 :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 본다.)

강 : 엄마 잃어버렸어? 길 잃은 거야?

이송하 : (작게) 아뇨, 길 안 잃었어요.

강 : 그럼 왜 혼자 돌아다녀? (쭈그려 앉으며) 가출한 거야? 혹시 집에서 엄마 아빠랑 무슨 일 있어? 엄마 아빠가 혹시 꼬마 친구를 아야, 하게 해?

이송하 : 아뇨. 엄마 아빠는 저 안 때려요.

강 : 그럼 왜 여기 동생이랑 둘이 있는 건데? 어린애 둘이 돌아다니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부모님 연락처 알아?

이송하 : (다급히) 안 돼요! 엄마 아빠한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경찰 아저씨, 제발요!

강 : (발끈하며) 누가 아저씨야, 아저씨는? 나 아직 이십 대거든?

이송하 : 죄, 죄송해요.

지정 연기는 상대 배우가 필요한 이인극이었다.

이에 도현이 의아해하자, 이장혁은 오디션장에 가면 대사를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도현은 자유 연기에 대한 고민을 잠깐 미뤄두고 지정 연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본에 나온 장면 외에 ‘송하’라는 캐릭터가 처한 상황에 대한 주어진 정보는 이 정도였다.

송하의 부모님은 날마다 다투어 집안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 상태다.

동생과 방 안에서 늘 듣지 못한 척하지만, 송하는 모두 다 듣고 있었다.

그러나 송하가 집을 나온 전날, 부모님은 언성을 높이다 결국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에 송하는 집을 나온다.

송하는 왜 집을 나온 걸까?

도현은 근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했다.

‘내가 송하라면… 왜 집을 나가고 싶었을까?’

도현은 의식적으로 ‘내가 송하라면’을 붙여서 생각했다. 버릇처럼 송하라는 새로운 자아를 상상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송하는 어른스럽고 의젓한 성격이라고 했다.

대본을 보던 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른스럽고 의젓한’ 성격과 ‘가출’이라는 요소가 모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에 도현은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덩어리의 ‘한 가지 생각에만 빠져 있다’라는 말은 비단 연기 방식뿐만 아니라, 도현에게 전반적으로 큰 깨달음을 주었다.

도현은 ‘어른스럽고 의젓한’이라는 것을 완전무결한 전제로 여기지 않고, 보다 유동적이고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사고를 확장했다.

그리고 곧, 도현은 며칠 전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알았다.

송하와 자신의 공통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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