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6)화 (87/582)

제86화. 일곱 개의 꼬리별 (11)

도현은 상쾌한 꽃향기를 마시며 강과 송하가 처음 만나는 부분을 떠올렸다.

도현이 현재 있는 장소는 공원, 그것도 돗자리에 편히 앉은 채였다.

도현이 연기 연습 삼매경에 빠지면서, 세 가족의 동선은 집 앞 공원으로 고정되었다.

이건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결과물이었는데, 도현은 연기 연습에 시간을 쏟길 원했고 서혜나와 이장혁은 도현이 바깥바람을 쐬기를 원했다.

그러다 찾은 합의점이 바로 ‘집 앞 공원에서 연기 연습하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장혁은.

‘도와주고 싶다!’

아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첫 번째 시도 이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도현의 완벽한 방어(?)로 인해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이번엔 꼭…!’

이장혁이 알 수 없는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데.

“어?”

서혜나가 어딘가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서혜나의 시선을 받은 여성도 반가움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옆에는 엄마 손을 꼭 쥔 어린 여자애가 서 있었다.

전에 공원에서 만났던 모녀였다.

우연스러운 만남에 도현의 얼굴에도 반가움이 스쳤다.

“안녕?”

도현이 손을 흔들자, 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외쳤다.

“토끼 왕댜!”

“응…?”

도현이 의아해할 새도 없이, 다다다 뛰어오는 은혜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은혜야! 뛰다가 다쳐! 조심, 조심!”

다행히 은혜는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도현의 앞까지 도착했다.

쭈욱.

은혜가 도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윤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은혜가 공원 올 때마다 토끼 왕자님을 그렇게 찾았거든. 토끼 왕자, 토끼 왕자 하길래 뭔가 했더니, 도현이를 말하는 거였구나. 어쩜.”

그녀는 딸이 귀여운 기색이었다. 서혜나와 이장혁도 웃음을 참고 있는지, 얼굴이 조금 발개져 있었다.

도현이 은은한 미소를 띠웠다.

‘이번엔 적어도 공주가 아니라 왕자네.’

어쩌다가 이런 것에 기꺼움을 느끼게 됐을까.

도현이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돌아보는데 은혜가 끙끙거리며 도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도현이 눈만 깜빡이며 움직이지 않자 급기야 칭얼댔다.

“나랑 노라!”

“은혜야, 그게 아니라, 같이 놀자~ 라고 해야지.”

“가치 노라!”

어떻게 말해도 명령문처럼 변하는 놀라운 화법이었다.

도현은 조금 곤란함을 느꼈다.

‘오디션이 금방인데….’

은혜가 귀엽긴 했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이었다.

도현이 이러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때다!’

이장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소꿉놀이하면서 놀면 어때?”

“소꿉놀이요?”

“응. 도현이가 송하, 은혜가 송아, 그리고 아빠가 강 역할을 맡는 거지. 어때?”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 넣는 이장혁이었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도현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완벽한 인선이었다.

더불어.

초롱초롱.

토끼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은혜와 놀아줄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도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윤경희가 얼굴에 물음표를 띠었다. 이장혁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기색이었다.

“은혜를 놀아주는 건 고마운데… 송하랑 송아? 그건 누군가요?”

윤경희의 질문에 서혜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도현이가 이번에 드라마 오디션을 하나 보거든요. 배역 이름이 송하고, 송하의 동생 이름이 송아고, 송하와 송아와 대화하는 경찰 이름이 강이에요.”

“세상에, 오디션이요?”

윤경희는 잠시 ‘세상에’를 반복해서 말했다. 그녀는 상당히 흥미로운 기색이었다.

“내가 저번에 알아봤다니까요. 딱 보니까, 연예인 할 상이었어.”

“하하,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고, 1화에 등장하는 단역이에요.”

“그게 어디예요? 요즘 단역도 경쟁률이 그렇게 치열하다는데. 텔레비전에 얼굴 십 초 비추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한다잖아요. 세상에, 너무 잘 생각했다.”

겸손에는 두 배의 칭찬이 되돌아왔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도현보다 신이 나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이 진정할 때까지, 도현과 은혜는 멀뚱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의 수다가 끝난 후.

이장혁이 은혜의 눈높이에 맞춰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은혜는 소꿉놀이 좋아해?”

“소꾹노리?”

“응. 은혜가 동생 역할! 오빠가 오빠 역할! 그리고 아저씨는 경찰 아저씨 역할!”

팩.

은혜가 고개를 돌렸다.

“어?”

이장혁이 당황해서 목 뒤를 쓰는데, 윤경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은혜는 소꿉놀이할 때 공주 역할이 아니면 안 해서….”

벌써부터 주관이 뚜렷한 은혜였다.

윤경희도 은혜를 꼬시는 데 동참했다.

“은혜야. 토끼 왕자님 찾았잖아. 토끼 왕자님이랑 같이 놀 기횐데, 싫어?”

돌아간 고개는 원위치로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육아로 단련된 엄마는 대단했다.

“왕자님 동생은 공주님인데…. 은혜가 싫다고 하니까, 공주님 역할을 누가 맡지?”

도현이 작게 감탄했다.

전시회 감시감독위원회 반장 자리를 맡았다면 훌륭하게 해내었을 법한 능청스러움이었다.

은혜를 흘깃 보자, 아닌 척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도현은 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도현이 눈을 한번 감았다 뜨고는 천연덕스레 중얼거렸다.

“토끼 왕자님은 토끼 공주님 역할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하고 나니 생각보다 더 창피해서, 볼이 조금 붉어졌다. 도현의 충격적인 귀여움에 잠시 떨던 서혜나가 지원 사격에 나섰다.

“엄마도 공주님 역할 좋아하는데. 엄마가 맡을까?”

“푸흡, 큼!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토끼 공주님 역할은 엄마가….”

“시러!”

은혜가 도현의 옷자락을 주욱 잡아당겼다.

“나가 하꺼야!”

얼마나 급히 말했는지, 문법도 발음도 모두 엉망이었다. 그러나 은혜의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도현이 문득 든 호기심에 흠,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은혜의 볼이 퉁퉁 부어올랐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양 뺨에, 도현이 더 버티지 못하고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럼 은혜가 토끼 공주님 할까?”

“웅!”

“좋아. 그럼 은혜가 공주님, 내가 왕자님, 저기 음… 아저씨가 기사님이야.”

잠깐 이장혁을 무어라 칭해야 할지 고민했던 도현이, 아까 전 이장혁이 했던 말을 따라 했다.

‘아저씨….’

금쪽같은 아들에게 아저씨 소리를 들은 이장혁은 조금 타격을 받았지만….

‘도현이가 아저씨라면 아저씨인 거지!’

금방 회복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연기 연습은 어렵지 않나?’

은혜를 달래다 보니 너무 산으로 가게 되어버렸다. 이장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도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전시회 감리감독위원회 반장이라는 자리는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 경험은 돌발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과 기상천외한 사건을 해결하는 창의성을 기르도록 해주었다.

도현이 여유롭게 웃으며 은혜를 보았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왕국에, 토끼 왕자님이랑 공주님이 살았어. 성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 공주님과 왕자님은 왕님 몰래 마을로 놀러 나가게 돼. 그런데 공주님이랑 왕자님이 사라진 걸 들켜서, 왕님이 기사님을 보내서 잡아 오려는 거지!”

“헉! 잡히면 안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잡히면 안 돼. 그러니까 토끼 공주님은 왕자님 옆에 잘 붙어 있어야 해. 잘할 수 있지?”

“응!”

그렇게, 가출한 왕자와 공주,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잡으러 온 무시무시한 기사님이 등장하는 역할 놀이가 시작되었다.

도현이 은혜의 손을 잡았다.

소꿉놀이라지만, 허투루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도 도현에겐 연기 연습의 일종이었다.

도현이 손에 힘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두 명의 어른이 돗자리에 앉아 있었고 기사(?)님이 대기를 타는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도현의 눈에는 텅 빈 공원이었다.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잠시 후.

이장혁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 우리 아들이 천재였어, 여보.”

“그걸 이제 알았어?”

서혜나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서혜나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상태였다. 서혜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번에는 엄마랑 하자! 엄마가 기사님 할래!”

강렬한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는 아줌마도….”

윤경희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은혜를 놀아주는 거, 아니, 연기 연습을 하는 건데, 이상하게 어른들을 놀아주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사님이 여러 번 바뀌었다가, 동시에 세 명의 기사님도 나타났다가, 이후에는 완전히 응용 편으로 변해서 기사님으로부터 도망도 치고 기사님을 물리쳐도 보고 온갖 상황을 상정해서 연기했다.

‘이게 연기 연습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새 본래의 목적과는 조금 달라졌다.

“에잇! 이 나쁜 배신자!”

어쩌다가 기사님이 배신자가 되었던 건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다양한 상황을 즉흥적으로 설정해서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으나, 정신을 차려봤을 땐 도현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 * *

“잘 가! 토끼 왕댜님!”

“안녕.”

은혜가 총총 멀어졌다.

세 사람은 진이 다 빠져서 집에 도착했다.

“아, 자유 연기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마음에 드는 대본은 찾았어?”

“아니요. 아직 못 찾았어요.”

“그래? 그럼 엄마 아빠가 같이 찾아줄까?”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써볼까 싶어요.”

“직접?”

서혜나가 의외의 대답에 놀라워하다가, 아!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도현이 영화 시나리오에도 공동 저자로 이름 올렸지!”

“헉,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도현이를 쳐다보았다. ‘우리 애는 못 하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쓰인 표정이었다.

이장혁이 몹시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놨어?”

“어떤 장면이 좋을지 정도는요. 아직 대사는 생각해보지 않았고요.”

“궁금하다! 다 만들면 아빠도 보여줄 수 있을까?”

“네. 완성하면 보여 드릴게요.”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세 가족이 나들이를 마치고, 사이좋게 집으로 돌아갔다.

* * *

“별로인가요…?”

도현의 낯빛이 안 좋아졌다. 자유 연기를 본 서혜나와 이장혁의 반응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냐, 대본이랑 연기는 좋았어.”

엄마가 그리 말했지만,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함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꿀까요?”

시간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현의 물음에 서혜나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좋아. 저번에 말한 해석이랑도 잘 어울리고. 엄마는 괜찮은 것 같아.”

“아빠도.”

이렇게까지 말하니 더 말을 얹기도 뭣했다.

조금 불안하고 찝찝하긴 했지만, 괜찮다고 했으니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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