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7)화 (88/582)

제87화. 일곱 개의 꼬리별 (12)

오디션 날이 밝았다.

오디션 장소는 NMC 방송국이었다. 방송국에 도착한 도현은 아빠와 함께 1층 라운지에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이 대본을 만지작거리면서 입 속으로 대사를 되뇌는데, 누군가 이장혁의 어깨를 툭 쳤다.

이장혁이 놀라서 돌아보자, 단정한 셔츠 차림에 짧게 자른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성이 서 있었다.

“정가현!”

“먼저 와 있었네.”

“그럼 먼저 와야지. 아무튼, 고맙다, 가현아.”

“이미지가 맞아서 혹시나 하고 지원서 하나 끼운 건데 뭐. 친구 아들이라고 점수 좋게 주고 그런 거 없으니까 기대하진 마. 오디션 시작하는 순간 남남인 거야.”

정가현은 부러 단호한 말투로 말하자, 이장혁이 그보다 더 단호한 투로 말했다.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그래. 이런 데서 칼 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외모와 다르게 물렁물렁한 성격을 지녔으면서도, 조별 과제 때만큼은 누구보다 단호해졌던 이장혁이었다.

정가현은 잠깐, ‘이런 애였지’하는 생각에 웃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 이쪽이 도현이지? 도현아, 안녕?”

“안녕하세요.”

도현은 처음 보는 부모님의 지인에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가현은 도현의 긴 속눈썹이 팔랑이는 것을 보다가 생각했다.

‘포토샵은 무슨.’

연예인 중에서도 유독 이목구비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넘어서, 모종의 분위기를 가진 이들은 사진에 그 매력이 채 담기지 않기도 했다.

도현도 그 경우였다.

“그래, 반갑다. 도현이 아빠 친구야. 그냥 이모라고 불러.”

“네, 이모.”

“애가 참 얌전하네. 차분하고.”

사진으로 봤을 때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실제로 본 도현은 생각보다 좀 더 차분해 보였다.

아역 배우를 뽑을 때 연기력만큼이나 중요하게 보는 요소가 바로 타고난 신체적 특징과 분위기였다.

배우가 어릴수록 이런 경향은 강해지는 편이었다.

어린아이가 성인 배우처럼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보이는 경우는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성인보다 신체적 특징에 크게 구애받기 때문이었다.

그 예로는 목소리 톤과 신체 발달 정도를 볼 수 있었다.

도현은 그 나이대 아이치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 특유의 쨍한 목소리가 아니라서, 차분한 분위기가 더욱 배가 되었다.

‘연기만 잘하면 대박인데.’

정가현이 입맛을 다셨다.

단역, 혹은 조단역 정도의 역할에는 눈에 띄는 외모가 독이라지만, 아역의 경우에는 좀 달랐다.

예쁘고 귀여운 아역이 등장하는 건 적당한 연기력만 받쳐준다면 잠깐의 귀여움, 그리고 소소한 화제로 오히려 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들어가는 드라마가 후반부로 갈수록 진지하고 무거워지지만, 초반에는 가볍고 유머러스한 분위기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연기는 많이 연습했어?”

“네.”

자질구레한 말 없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무언가 더 말이 이어질 거라 기대했던 정가현이 조금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래. 자신감이 넘치나 보네.”

“주어진 시간 내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요.”

도현은 사실만을 말했다. 그러나 정가현의 귀에는 꽤 맹랑하게 들렸다.

‘이거 꽤 물건이네.’

아역 배우 중에 유독 제 나이보다 성숙하고 똑똑한 애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도현은 유독 인상적일 만큼 똑 부러지고 야무져 보였다.

아무리 독립 영화를 찍은 경험이 있다지만, 솔직히 사진만 보고 부른 거라 별 기대는 없었는데… 점점 기대감이 쌓여갔다.

‘아니, 안되지.’

괜히 기대감을 높였다가, 실망만 커질 수도 있었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선 중립인 마음 상태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정가현은 잡념을 치우고 두 사람을 오디션을 볼 장소로 안내했다.

세 사람은 안내 데스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자, 여기로 가면 돼. 여기 가면 스태프가 안내해줄 거야.”

정가현이 한 회의실 앞에 서서 말했다.

“아, 보호자는 다른 대기실에 가 있어야 해.”

“보호자 대기실은 따로구나….”

“안에 스태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도현이도 잘할 수 있지?”

“네.”

도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 자신감 좋네. 그렇게만 해. 자신감이 반절이야.”

정가현이 도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곤 문을 열어주었다.

도현은 힘내라며 주먹을 꽉 쥔 아빠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송하 역 지원자니?”

스태프 네임 택을 단 여성이 물었다. 도현이 그렇다고 답하자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다.

“이도현이요.”

“이도현, 이도현…. 아, 28번이네. 자, 이거 가슴팍에 붙이고 빈자리에 가서 준비하고 있어. 부르기 전까지 대본을 보면서 연습을 해도 되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면 돼.”

“네, 알겠습니다.”

도현은 여성의 말대로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도현은 잠시 가볍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당연히 남자애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남자애들이 반, 여자애들이 반이었다.

‘송아 역 지원자랑 같이 보는 건가?’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 관심을 끊고는, 대본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데, 대화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쟤, <무화과 식당>에 나온 걔 아니야? 은아람?”

“그러게. 아름 학원 애들이 쟤도 오디션 본다던데 진짜였나 봐.”

아이들의 시선이 유독 한 곳을 향했다. 거기에는 둥근 칼라가 달린 반팔 와이셔츠에 멜빵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럼 송아 역은 쟤가 될까?”

“그럴 거면 오디션을 안 열었겠지! <무화과 식당>에서도 잠깐만 등장한 것뿐이잖아. 엄마가 쟤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다고 했어.”

대화하다 보니 신경 쓰지 못한 것인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도현에게도 들릴 정도로 선명한 목소리였다.

‘다 들릴 것 같은데.’

도현은 잠시 책상에 얼굴을 고정한 여자아이를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대기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최근 들어 항상 낮잠을 자던 시간이 가까워지자, 생활 습관이 몸에 뱄는지 몸에 힘이 풀리고 눈꺼풀이 나른해졌다.

‘긴장이 너무 풀리면 안 되는데.’

도현은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많이 한산해진 대기실을 둘러보다가 시계를 한번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무슨 일이니?”

“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요.”

“아, 보자, 번호가…. 아직 괜찮겠네. 이리로 와.”

도현은 스태프를 따라 걸었다. 스태프가 복도에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있지? 저기 화장실이 있거든.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다녀와.”

“네.”

도현은 감사하다고 인사한 후 화장실에 들어갔다.

도현은 곧장 세면대로 가서 수돗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수도 하면 좋을 텐데, 엄마가 아침에 선크림을 발라줬던 기억이 나서 포기했다. 고개를 몇 번 터는 것으로 대신한 후 거울을 응시했다.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내린 차분한 남자아이가 거울 속에서 도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송하라면….”

도현이 주문을 외듯이 습관적으로 중얼거리고선 두꺼운 휴지를 뽑았다. 물기를 깨끗하게 닦고선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은 복도 끝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옆에는 바로 비상계단이 있었다.

의미 없이 비상계단을 훑듯이 지나치던 도현이 멈칫했다.

살짝 열린 비상계단 문 사이로 노란 치맛자락이 보였다.

동글동글한 정수리가 시선 한참 아래에 있었다.

도현은 다시 복도에 있는 스태프를 보다가, 계단을 보았다.

도현이 고개를 젓고선 복도로 발을 디뎠다.

터벅, 터벅.

몇 걸음 더 걸어가다가.

우뚝.

도중에 멈춰 섰다.

“하아….”

도현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지나치자, 그냥 가자 생각해도 발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제 발인데 왜 말을 듣지 않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괜한 참견일 텐데….’

그런데 작은 정수리가 은혜랑 겹쳐 보여서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결국, 도현은 다시 복도 끝으로 되돌아갔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도현이 문을 살짝 밀었다.

끼익-

경첩이 마찰하며 나는 소리에 쭈그려 앉아 있던 아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댕그랗게 뜬 눈이 얼굴의 반은 될 것같이 커다랬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갈까.

강렬한 유혹이 들었지만,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에 도현은 결국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안녕. 여기서 뭐 해?”

아람은 깃털 같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부드럽고 섬세한 목소리에 경계심이 푸스스 흩어졌다.

대기실에 있던 다른 애들처럼 눈에 호기심을 담고 있으면 그냥 가라고 했을 텐데, 검은 눈에는 약간의 걱정과 온기만이 담겨 있었다.

“송아 역 오디션 보러온 거지? 난 송하 역 오디션 보러 왔어.”

“알아. 대기실에서 봤어.”

“근데 왜 여기 있어? 대기실로 안 돌아가고.”

아람이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숙였다. 웅크린 자세를 하고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기 싫어서.”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왜?”

물어도 되는 건가, 긴가민가해하며 묻자 아람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메라는 무섭고,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어. 애들이 내 얘기 하는 것도 싫고…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아람이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를 하나로 예쁘게 모아 묶은 방울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않아?”

“그러면 엄마가 싫어하는걸.”

돌아온 대답에 도현은 할 말을 잃었다.

아람은 연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서 연기하는 것 같았다. 홀로 문제집을 들여다보던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아람도 무언가 넘어가고 싶은 벽이 있는 걸까?

도현은 이런 일에 그다지 말주변이 없었다. 적절한 말을 해서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말들은 모두 형편없는 것뿐이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저 수긍했다.

혹여나 성의 없는 대답이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스레 아람의 안색을 살폈으나,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내심 안도하기도 했다.

도현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스락거리는 봉지가 손에 잡혔다.

아람은 제 눈앞에 불쑥 내밀어진 손에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하얀 손바닥 위에는 낱개로 포장된 사탕 몇 알이 있었다.

“사탕 좋아해?”

“…응.”

“나도 사탕 좋아해. 너는 무슨 맛이 좋은데?”

“난 포도 맛.”

다행히 포도 맛이 있었다. 도현이 포도 맛 사탕을 아람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선 계단에 걸터앉았다.

아람이 동글동글한 눈으로 쳐다보자, 도현이 먼저 사탕 껍질 하나를 깠다.

“나는 너무 긴장돼서 사탕 하나 먹고 들어가려고. 너도 같이 있어줄래?”

“…응.”

아람이 주섬주섬 도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합.

포도 맛 사탕을 입에 쏙 넣은 아람의 표정이 점점 누그러졌다. 도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당분을 충전하는 계획이 들어맞은 것 같았다.

달그락. 달그락.

아이들이 입 속에서 알사탕을 굴리는 소리만 계단에 퍼졌다.

그렇게 한참을 사탕을 녹여 먹고 있는데, 아람이 문득 말을 꺼냈다.

“오빠가 합격하면 좋겠다.”

갑작스러운 말에 도현이 사탕을 몇 번 더 굴리다가, 물었다.

“너는?”

그러자 아람이 눈을 댕그랗게 뜨곤.

“나는 당연히 합격이지.”

하고 말했다.

도현이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아람을 보았다.

“학원에서도 내가 항상 1등인걸. 선생님도 내가 될 거라고 그러셨어. 내가 제일 잘한대.”

아람이 팔짱을 끼더니 콧방귀를 흥, 끼었다.

도현은 아람에 대한 이미지가 순식간에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오빠도 합격해.”

아람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도현이 가만히 있자 ‘빨리’ 하면서 재촉하기도 했다.

도현이 어색하게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엄지로 도장까지 찍게 한 후 아람이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약속한 거야. 불합격하면 바늘 천 개 삼키기!”

생명이 달린 약속이었다.

도현도 덩달아 진지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혀 위를 굴러다니던 사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 혀 파래?”

베- 혀를 내민 아람에 도현이 괜찮다고 답하며 일러주었다.

“이거 천연 사탕이야.”

“…! 그렇구나!”

아람이 안심했다.

두 사람은 계단을 나와, 대기실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스태프의 잔소리가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차례가 오지 않은 상태였다.

몇 분 뒤.

스태프가 번호를 호명하고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도현이 스태프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람이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하라는 뜻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스태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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