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8)화 (89/582)

제88화. 일곱 개의 꼬리별 (13)

프로필을 넘기던 정가현이 멈칫했다.

‘도현이 차례네.’

그때 어디선가 감탄사가 들렸다.

“이 친구 이미지가 정말 좋은데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누굴 말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기실 이 자리에 있는 심사위원 모두가 단번에 알아들었다.

“28번 지원자 말이죠?”

노하얀 캐스팅 디렉터가 프로필을 살피며 되물었다.

자신이 직접 찾아낸 아이가 아니라 정가현 AD가 추천한 아이였다.

아무래도 나름 유명 에이전시와 연기 학원의 기대주들을 고르고 골라 선별해 추천했는데 웬 다크호스가 떡하니 껴 있어서 신경 쓰였던 참이었다.

듣기로는 어디 미국에서 독립 영화를 찍었다는데, 개봉도 안 했다고 하니 진실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정가현이 도현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다.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정면 사진이 하나, 웃음기가 빠진 묘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이 하나, 마지막으로 캐주얼하게 꾸민 채로 수줍은 듯이 웃는 사진까지.

이렇게 단역으로 출연할 게 아니라, 어디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 아역으로 등장해야 할 것 같은 비주얼이었다.

정가현의 시선이 특히 두 번째 사진에 고정되었다.

울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입꼬리가 내려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슬퍼 보였다.

마치, 눈빛으로 연기라도 한 것처럼….

‘허, 그럴 리가.’

정가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26번부터 30번까지의 참가자였다.

28번이 들어온 순간, 노하얀의 얼굴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방송계에서 짬밥 좀 먹은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저 빛나는 원석을!

다섯 명의 아이들이 들어왔는데, 28번만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단순히 외모가 뛰어난 문제가 아니었다.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이쪽 업계 사람들은 보통 그걸 ‘스타성’이라고 불렀다.

일단, 오디션을 진행해야 했기에 노하얀은 시선을 떼며 입을 열었다.

“다들 긴장할 것 없어요. 그냥 여러분들이 준비해 온 걸 보여주면 돼요. 왼쪽부터 시작할 건데, 지정 연기 먼저 하고 그다음에 자유 연기를 볼 거예요. 혹시 시간 더 필요한 사람 있어요?”

손을 드는 아이는 없었다. 아이들은 쭈뼛대며 주변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있었다.

도현은 더는 준비 시간이 필요치 않았기에 가만히 있었다.

“좋아요. 그러면 왼쪽 끝에, 26번부터 시작할게요. 26번 박우경 지원자, 준비됐어요?”

“네, 네! 주, 준비됐습니다핫!”

묘한 삑사리가 났다.

몇몇 아이들이 풉, 웃음을 터트렸지만, 도현의 표정은 고요했다.

“그럼 지정 연기부터 볼게요. 여기 있는 지원자들은 다 B 장면으로 볼 거고, 저기 계신 스태프분이 상대 역할을 해주실 거예요.”

역시 상대해 주시는 분이 있었다. 도현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26번 지원자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도현은 그 연기를 보기보단,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카메라는 심사위원석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도현은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어떤 각도로 몸을 틀어야 상대역을 보면서도 카메라에 모습이 잘 담길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런 도현을 주시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바로 정가현 AD였다.

‘호.’

정가현은 꽤 의외로운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아역들은 오디션장에 오면 긴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도현은, 긴장은커녕 여유롭게 카메라의 위치를 살피며 무언갈 가늠하고 있었다.

연기 실력은 둘째 치고 확실히 배짱은 두둑한 것 같았다.

‘이건 이장혁을 안 닮았네.’

짧게 생각한 정가현이 도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26번 지원자의 연기에 집중했다.

“좋아요, 잘 봤어요. 열심히 준비해 왔네요.”

노하얀이 의례적인 칭찬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기쁜지 박우경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감사합니다!”

정가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발음이 좋네. 또박또박하고.”

칭찬도 잊지 않았다.

이어 27번 차례도 순조롭게 지나가고.

도현의 차례가 왔다.

도현은 두어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28번 지원자 이도현입니다.”

깔끔하게 인사한 도현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심사위원과 한 명씩 눈을 마주쳤다.

‘감회가 새롭네.’

도현이 살짝 웃었다.

저번엔 심사위원으로 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이번에는 지원자의 입장에서 서 있었다.

그건 굉장히 즐겁고 신선한 기분이 들게끔 만들었다.

도현이 가볍게 숨을 마셨다가 내쉬었다.

몸을 둘러싼 가벼운 긴장감이 기분 좋은 고조감이 일도록 만들었다.

“그럼 지정 연기부터 볼게요. 장면은 B 장면으로 볼 거예요.”

“네.”

도현이 상대역을 맡아주시는 스태프를 향해 섰다. 완전히 몸을 틀지 않고 미묘하게 비스듬하게 선 자세였다.

“잘 부탁드려요.”

“어? 응, 그래.”

오디션을 시작한 이후, 처음 들어보는 인사에 잠깐 당황하는 듯했던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태프가 입을 열었다.

“꼬마야,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국어책 읽기를 간신히 면한 수준의 연기.

몰입이 되레 깨질 것 같은 어색함이었으나.

대사가 끝난 순간, 도현의 어깨가 미묘하게 움츠러들었다.

차분하다 못해 여유로워 보였던 분위기가 금세 뒤바뀌었다.

아이는 살짝 들린 오른쪽 손을 꽉 쥐었다.

‘저건….’

정가현은 도현의 행동을 금방 눈치챘다. 도현은 제 옆에 있는 어린 동생의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팔이 조금 뒤로 향한다.

아마 어린 동생은, 오빠의 작은 등 뒤로 숨겨졌을 것이다.

“엄마 잃어버렸어? 길 잃은 거야?”

정가현이 귀를 기울였다.

드디어 도현의 첫 대사였다.

도현이 스태프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내리깔았다. 입술이 몇 번 우물거리다가, 열렸다.

“아뇨, 길 안 잃었어요.”

아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다. 그 속에 있는 불안함을, 지켜보는 이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연기는 상호 작용이다. 누군가 끌어 올리면, 상대방은 끌어 올려진다.

대사를 받아주던 스태프는 어느새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28번 반복한 연기 중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대사를 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엄마 아빠가 혹시 꼬마 친구를 아야, 하게 해?”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불안해하던 아이가 눈을 치켜올렸다. 내려갔던 눈이 올라가며 크고 맑은 눈이 비쳤다.

아이의 굳어 있는 볼은 여전히 불안과 걱정에 감싸여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애써 또박또박 말해온다.

“아뇨. 엄마 아빠는 저 안 때려요.”

크지는 않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거기엔 일종의 단호함까지 느껴졌다.

“그럼 왜 여기 동생이랑 둘이 있는 건데? 어린애 둘이 돌아다니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부모님 연락처 알아?”

“안 돼요!”

도현이 다급히 스태프의 옷소매를 잡았다.

“엄마 아빠한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경찰 아저씨. 제발요!”

목소리에서 당황과 초조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앞에 뱉은 단어에 집중한 강은 성질을 낸다.

“누가 아저씨야, 아저씨는? 나 아직 이십 대거든?”

도현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올려다보는 얼굴은 마치 ‘이 아저씨는 뭐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죄, 죄송해요.”

도현이 움츠러들었다.

정가현은 저도 모르게 나잇값 못 하는 강을 향해 혀를 차고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내, 차분해진 낯으로 돌아와 상대역을 맡아준 스태프에게 다시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심사위원석 쪽을 돌아보았다.

정가현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까 손동작, 동생을 숨긴 거야?”

“네. 대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송하라면 송아의 손을 잡고 있을 것 같아서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공원에서 은혜랑 소꿉, 아니, 연기 연습을 하다가 떠올린 부분이었다.

“A 장면에서 송하가 송아를 굉장히 아끼는 모습을 보여서요. 송아를 집에 두고 혼자 나가진 않았을 것 같았어요.”

정가현이 작게 감탄했다.

대본에는 송하와 강만 쓰여 있지만, 실제 촬영 장면에서는 송아도 같이 등장한다.

연기 실력도 범상치 않은데, 캐릭터 해석도 성실하게 해 왔다.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오히려 내가 장혁이한테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은데.’

그러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대본을 굉장히 꼼꼼하게 봐 왔네. 자유 연기는 어떤 걸로 준비했어?”

“창작 대본으로 준비했어요.”

“창작 대본?”

정가현의 얼굴에 호기심과 흥미가 어렸다.

“얼른 해봐. 어떻게 하는지 보자.”

그 말에 부담을 느낄 법한데도, 도현은 그저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가볍게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도현은 이번에는 카메라를 정확히 응시했다.

자유 연기를 창작하면서,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가’였다.

만약 도현이 지원하는 역할이 일회성으로 등장하는 단역이 아닌 조금 더 분량이 있는 역할이었다면, 지정 연기와 다른 스타일의 연기를 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회성 단역은 짧은 시간 내에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도현은, 이 캐릭터와 자신이 잘 어울린다는 걸 한 번 더 어필하는 쪽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도현이 최종적으로 보여주고자 결정한 것은 ‘도현이 해석한 송하’였다.

대본에 나온 것보다 실제로는 조금 더 어리고, 애정이 필요한 어린아이.

도현의 표정이 변했다.

살짝 튀어나온 입술과 시선을 피하는 눈동자, 뚱한 볼이 아이의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음을 드러내었다.

도현이 홱 고개를 틀었다.

“집에 가기 싫어요.”

반쯤 우울함에 잠긴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아이의 눈이 힐끔, 카메라를 봤다가.

“집에 가도 엄마 아빠는 저한테 관심도 없는걸요. 엄마 아빠는 절 사랑하지 않나 봐요. 제가 안 들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 더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투정을 부리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울먹이는 건지, 애매한 투였다.

안쓰럽긴 한데….

불쌍하기도 한데….

“크흠, 큼.”

정가현이 입꼬리를 내리려 노력하며 헛기침을 했다.

분명 안타까운 상황인데, 귀여웠다.

‘누가 우리 귀염둥이 슬프게 했어!’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가현은 이장혁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혀를 찼다.

저런 아들이라면 매일 업고 다니면서 어화둥둥 할 텐데, 복에 겨운 줄 모르고, 쯧쯧.

어느새 완벽하게 상황에 몰입한 정가현이었다.

아이는 누군가 달래고 있는 듯 입을 삐죽삐죽 내밀었다.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끄윽, 엄마 아빠는… 맨날 싸우기만 하고…. 어, 어제 종이꽃도 접어서 줬는데 관심도 없고… 끅, 끄읍.”

도현이 급기야 울먹였다.

“아이고….”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해지자 어디선가 안타까움이 섞인 탄식이 들렸다.

정가현은 제가 낸 소린 줄 알고 흠칫했지만, 범인은 예뻐 죽겠다는 얼굴로 도현을 보고 있는 노하얀이었다.

그 음성에도 조금의 흔들림 없이 도현은 마지막 대사까지 읊었다.

“나, 난 주워 온 자식이 분명해요….”

맑고 큰 눈동자와 불쌍하게 처진 눈, 머리카락조차 분위기를 눈치채고 기운 없이 늘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절로 떠올랐다.

어디선가 크리티컬 사운드가 울린 느낌이었다.

“허.”

이건 뭐, 다음 차례는 볼 것도 없었다.

“잘 봤어. 아주 잘하네, 잘해!”

정가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러게요, 정말 잘하네요. 아우, 아역 오디션에서 이렇게 몰입한 게 얼마 만인가 몰라.”

진실성이 묻어나는 어투였다. 그들의 칭찬에 도현은 옅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만약 이 오디션이 한 명씩 따로 보는 거였다면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을 퍼부었을 테지만, 아직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다음 차례 아이가 기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가현은 적당히 잘라내어서 다음 차례로 넘겼다.

그러나 아이라고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29번 아이는 이미 주눅 든 기색이었다.

나름 연기력이 괜찮은 아이였는데, 기가 죽었을 뿐더러, 도현의 연기를 먼저 본 탓에 굉장히 밋밋하고 밍밍해 보여서 노하얀은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윽고 30번까지 연기를 모두 마치고 스태프의 인도에 따라 방을 나갔다.

“28번이죠?”

누군가 꺼낸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 연기를 봤는데, 대체 저 애 말고 누구를 쓰라는 건가?

노하얀도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리스트를 뽑은 노하얀은 알고 있었다. 이다음에 들어올 아이 중에서도, 저 정도의 수준을 갖춘 아이는 없었으니까.

정가현이 도현의 프로필에 동그란 표시를 그려 넣었다.

눈이 달렸다면 이번 오디션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밖에 없었다.

정가현은 프로필에서 흐드러지게 웃고 있는 도현과 눈이 마주치고 문득 생각했다.

‘나도 결혼이나 할까?’

비혼주의자면서, 처음으로 결혼에 마음이 끌린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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