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일곱 개의 꼬리별 (14)
“도, 도, 도현아! 자, 잘 봤니? 아, 아니지. 못 들은 걸로 해줘!”
보호자 대기실을 찾아온 도현을 보고 벌떡 일어난 이장혁이 말을 더듬었다.
도현은 얕게 웃으며 대답했다.
“준비한 대로 했어요.”
‘잘했어요’와 같은 대답은 아니었지만, 도현의 준비 과정을 아는 이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이장혁은 깨달았다.
‘우리 아들이 합격하겠구나!’
이장혁이 볼 때, 참가자 사이에 국장 아들이라도 섞여 있지 않는 한 합격자는 도현일 게 분명했다.
폭죽 좀 터트리고 케이크라도 사 들고 가고 싶었지만, 괜히 앞서 나갔다가 도현이 불안해할까 봐 꾹 눌러 참았다.
“고생 많았어, 도현아. 엄마 회사 끝나서 이리로 오고 있대. 엄마 도착하면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도현은 조금 고민하다가 답했다.
“저번에 가자고 하신 곳 있잖아요. 거기 가봐요.”
“아, 그래. 좋은 생각이네!”
이장혁이 골라 놓은 음식점 중에서 일식 전문점이 있었는데, 가려던 날 때마침 휴일이라 못 간 적이 있었다.
이장혁은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쉬는 날이 아니라는 걸 꼼꼼히 확인했다.
도현은 아빠와 방송국을 나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람이는 잘하고 있을까?’
- 약속 어기면 바늘 천 개 삼키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 배짱이면,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아빠와 같이 방송국을 나오니, 문 앞에 서 있는 엄마가 보였다.
하얀색의 고급스러운 점프 슈트에 굽 높은 하얀 샌들, 선글라스를 끼고 핸드백을 든 서혜나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연예인 아니야?”
“근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길을 지나가는 이들이 그런 서혜나를 보며 긴가민가했다.
방송국 건물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서혜나의 표정이 확 펴졌다.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순식간에 밝게 변했다.
행인들은 자연히 서혜나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벌렸다.
키가 크고 비율이 좋은 남성은 옷맵시가 무척이나 좋았는데, 그보다 남성의 옆에 서 있는 아이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볼과 까만 눈동자, 눈꺼풀이 움직일 때마다 팔락이는 긴 속눈썹. 하얀 뺨에 살짝 올라온 생기는 명화 속 아기 천사 같았다.
“대박….”
행인들의 시선이 모였으나, 세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시선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만을 보며 오순도순 대화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서혜나가 운전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맸다.
“내가 할게.”
“됐어. 당신 오늘 또 하루 종일 긴장하고 있었잖아.”
서혜나가 이장혁을 보조석으로 밀며 운전대를 잡았다. 그에 이장혁이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일식집으로 간다고 했지?”
“응. 저번에 가려던 곳.”
부르릉.
차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오늘 재미있었어?”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곧 옅은 호선을 그렸다.
“네, 재밌었어요.”
확실히, 오랜만에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즐거움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대기 시간이 조금 길었던 것 같은데, 피곤하진 않았고?”
“사실 조금 졸리긴 했어요.”
도현의 솔직한 대답에 부부가 웃음을 터트렸다.
“식당 도착해서 오디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줘. 궁금하다.”
“그럴게요.”
“그러고 보니 도현이 일식은 처음이지?”
그들은 저녁 메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도현에게 음식을 설명해주던 이장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가…. 되게 배고프네.”
“차가 밀려서 도착하려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차에 뭐 먹을 거 없나?”
그들의 대화를 듣던 도현이 손을 불쑥 내밀고, 조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탕 좋아하세요?”
“아침에 챙겼던 거네. 다 안 먹었구나.”
“네. 딸기 맛이랑 오렌지 맛, 파인애플 맛 남았어요.”
“딱 세 개네? 나눠 먹으면 되겠다. 도현이는 무슨 맛 먹고 싶어?”
“저는 다 좋아해서 상관없어요.”
“으음… 그럼 아빠는 파인애플 맛.”
대체로 신 걸 좋아하는 이장혁이었다.
“엄마는요?”
“그럼 엄마는 딸기 맛 먹을래.”
세 사람은 나란히 사탕을 한 개씩 입에 물었다.
‘식당에 가면 오디션에서 만난 친구랑 사탕 나눠 먹은 얘기도 할까?’
도현은 사탕을 굴리며 부모님께 무슨 이야기를 들려드릴지 생각했다.
상큼한 오렌지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세 가족이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각.
정가현과 박민호는 화면 속의 작은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단역 오디션을 이처럼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에이전시에서 따로 오디션을 진행하여 데려오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단역의 경우, 영화가 아닌 이상 메인급 피디는 누가 됐는지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일단 송하 역할은 1화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나 다름없다.
비록 단역이지만, 1화에서만큼은 다른 배역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괜찮은 신인을 걸러내기 위해 방송국에서 직접 오디션을 진행했다.
그리고 지금.
결정을 내리기 전 총괄 프로듀서인 박민호에게 가장 유력한 후보인 도현의 영상을 보여주는 중이었다.
“잘하는데?”
영상을 본 박민호가 뱉은 말이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진짜 잘하는데? 이런 애는 어떻게 찾았어?”
단순히 이미지 때문에 컨택했던 정가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화면 속에서 도현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허어, 박민호가 탄식했다.
“방금 연기하면서 상대역을 끌어당겼잖아. 봤지? 이렇게 어린 아역 중에서 저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잘해. 아주 잘해.”
유명 배우들한테도 칭찬을 남발하지 않는 박민호 PD였다. 촬영장에서 독사 같다고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 고작 드라마 단역 오디션에 지원한 무경력(?)의 아역에게 칭찬을 쏟아내고 있었다.
“자유 연기도 한번 보세요. 창작 대본으로 준비해 왔는데, 괜찮더라고요.”
“그래? 한번 보자.”
이번에는 자유 연기 영상이 재생되었다.
영상이 끝난 후.
“어디서 저런 보석이 굴러들어 왔어?”
박민호가 감탄을 내뱉었다.
원석도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자신만의 빛을 내는 보석이었다.
“정 조감 친구 아들이랬나?”
“네. 저도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모르고 있었어요.”
“아까 자유 연기 뭔지 느꼈어?”
“네?”
“캐릭터 설명이 분명 어른스럽고 의젓하다고 되어 있는데, 쟤는 어린애다운 연기를 준비해 왔잖아. 어? 귀엽고, 짠하고.”
정가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내가 봤을 땐 28번이 연기한 게, 송하 같거든.”
“네? 송하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정가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자, 박민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놈 참 맹랑하네. 지금 자기가 해석한 송하를 들고 온 거 같은데?”
정가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박민호의 말뜻을 이해한 탓이었다.
아역들은 감정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그건 아역들의 잘못이 아니라, 뇌가 성숙하지 못한 탓에 어쩔 수 없는 생물학적 한계이며, 살아온 경험의 차이였다.
그래서 아역들이 캐릭터를 분석해 오는 걸 보면 단편적이거나, 혹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말해준 대로 머릿속에 주입하고선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흉내 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런 이유 탓에 같은 학원이나 에이전시 출신 지원자들의 연기는 비슷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뭐… 이건 아역의 문제만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정가현이 다시 화면 속 도현을 보는데, 박민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얜 달라.’
박민호가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저건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두 눈에 담긴 총기 어린 빛을 보자니 확신이 더해갔다.
‘제 나름대로 분석하고 결과를 냈다라….’
저 어린아이가, 배우다운 태도로 연기를 한 것이다.
“어이없기도 하고, 거참.”
박민호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영상을 몇 번 돌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송하 역은 쟤야. 쟤 아니면 안 돼.”
확고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 * *
- 그럴 줄 알았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대사였다.
“하하.”
도현이 유쾌하게 웃었다.
오디션 합격 소식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일주일이 채 안 돼서 연락이 왔으니, 정말 빠르게 결정 난 편이었다.
- 그럼 이제 드라마 찍는 거야?
“그렇겠죠.”
- 넌 무슨 드라마를 산책 나가듯이 찍냐? 이상한 자식.
자신과 찍었던 영화가 도현의 마지막 연기일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도가 있지.
부모님의 나라로 여행을 간다더니, 갑자기 드라마 오디션을 본다고 하고, 그걸 덜컥 합격해 왔다.
맥의 눈에는 신기하다 못해 기이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 여기서도 그 드라마 볼 수 있냐?
“어… 글쎄요?”
- 어디 따로 안 올라오려나?
두 사람은 샌디에고에서 드라마를 볼 방법에 대해서 떠들다가, 영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리암에게선 아직 연락 없죠?”
- 너한테도 안 갔는데, 나한테 왔겠어?
“맥도 주연이잖아요. 저랑 다르게 가까운 곳에 있고.”
- 뭐… 그렇긴 한데. 나도 아무런 연락을 못 받았어.
영화를 만드는 게 꽤 오래 걸리는 일이구나.
느긋하게 기다려야 함을 알면서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때 되면 연락 주겠지.
쿨한 어조였지만.
“맥. 다리 떠는 건 멈추고서 말해요.”
- …그게 들려?
“네.”
- 그으… 그래! 솔직히 속이 탄다. 속이 타!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어? 매일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다고!
거리낄 게 없어진 맥이 폭주했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부터 연다니까? 너도 그렇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맥이 한참 불만을 토해내는데, 멀리서 맥을 부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맥. 엄마가 부르시는 거 아니에요?”
- 아, 귀찮은데…. 암튼, 축하한다. 다른 애들은 뭐래?
“맥이 처음이에요.”
- 뭐?
맥의 목소리의 의아함이 깃들었다.
- 아니, 왜? 너 걔네랑 친하잖아.
“맥이 도와줬잖아요. 가장 먼저 말하는 게 맞죠.”
- 크흠, 큼. 뭐 별거 했다고.
그리 말하면서도 목소리에는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 아씨, 엄마가 계속 부른다. 야. 난 이만 간다.
“네. 다음에 봐요.”
도현이 전화를 끊었다.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었다.
보통이면 도현 혼자 먹었겠으나….
- 도현이가 합격했는데 바로 집에 가야지!
엄마 아빠를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도현은 흘끔, 시계를 보았다.
진이나 니콜라스에게 전화할까 싶었는데, 시간이 모자랄 것도 같았다.
도현은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다음 날에 연락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띡띡띡띡띡!
조급함이 느껴지는 소리가 울리고.
“도현아! 축하해!”
“오디션 합격 축하해, 아들!”
두 사람이 둑 터진 물처럼 쏟아지듯이 들어왔다.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을 정도였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실제로 많이 흥분한 상태였다.
지난번에 영화를 찍었다고는 하나, 독립 영화였다.
유명한 독립 영화 두어 개 정도 본 경험이 전부인 두 사람에게는 생소한 분야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드라마, 그것도 공중파 드라마 촬영이 아니던가!
아들이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온갖 감정이 다 들었다.
도현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부모님을 보니 푸슬푸슬 웃음이 나왔다.
아빠가 전화로 합격을 알려주었을 때만 해도 기쁘긴 했지만, 동요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도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이제야 실감이 나는 건지도 몰랐다.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좋아요!”
도현이 환한 웃음을 얼굴에 매달며,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심장이 기분 좋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