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90)화 (91/582)

제90화. 샌디에이고의 하루 (1)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황망히 뜨였다.

‘어째서?’

니콜라스는 제 앞에 곱게 펼쳐진 것을 보았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이것은.

“니키. 왜 안 읽고 있니? 혹시 다른 책 가져다줄까?”

“…아뇨.”

그렇다.

니콜라스는 지금 도서관에서, 책을 펴놓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니콜라스의 두 눈이 주위를 훑자, 저마다 책을 한 권씩 들고선 읽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용 도서관이라 그런지, 노란색과 주황색이 잔뜩 쓰인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는 광경은 퍽 평화로웠다.

‘어째서…!’

다만, 니콜라스의 심정만 평화롭지 못했을 뿐이었다.

니콜라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습기가 차올랐다.

때는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니콜라스는 수영 캠프에 갈 생각에 신이 났다.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내일이면 캠프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하루 내내 수영을 할 생각을 하니, 잠을 자려고 누워도 풉풉, 웃음이 새어 나왔을 정도였다.

그리고 대망의 아침.

“나눠준 공책 모두 받았죠? 앞으로 여기에 매일 일기를 써 오는 거예요!”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자, 우리 노래에 맞춰 춤 춰볼까요?”

쿵쿵. 쿵.

신나는 비트가 크게 울렸다.

잔디밭에서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춤을 추는 건 나름 재미있었다. 수영장에 들어가기 전 몸풀기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몸도 다 풀었으니 수영을 하겠지!’

니콜라스의 두 눈에 기대와 설렘이 서렸다.

“자! 이동합시다!”

“네!”

니콜라스가 크게 대답했다.

그러나 캠프 선생님을 따라간 곳엔, 수영장이 아닌 도서관이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니콜라스는 깨달았다.

나르샤의 묘한 웃음을, 부모님의 어색했던 표정을!

속았구나!

니콜라스의 얼굴에 배신감이 차올랐다. 책을 집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 여러분. 독후감 쓸 종이는 여기 있어요! 부족하면 가져다 쓰면 돼요!”

니콜라스는 눈물을 머금고 책을 읽었다. 독후감을 제출하려면 바지런히 읽어야 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야!’

니콜라스의 마음속에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그러나 잠시 후.

우르르-

“춤도 열심히 추고, 독후감도 썼으니까 잠깐 쉬는 시간이에요! 자, 자. 다들 간식 먹자!”

오색의 젤리가 영롱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한쪽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나눠주고 있었다.

독후감을 쓰며 생겼던 분노가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탱글탱글 쫄깃쫄깃 맛있는 젤리를 씹자, 아까 그 고생이 이거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노동 후에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더니, 딱 그 모양이었다.

니콜라스가 맛있게 냠냠 뇸뇸 하던 때였다.

“니키!”

잘못 들었나?

여기서 니콜라스를 반갑게 부를 이는 없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젤리를 한가득 털어 먹는데 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니이키!”

이번엔 확실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돌리자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할리 하펜이 보였다.

“어? 너?”

니콜라스의 눈이 커졌다. 할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보네! 너도 캠프에 참가했구나!”

“우와, 아는 애랑 만날 줄 몰랐어!”

두 아이는 서로를 보며 방방 뛰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은 이상하게도 반가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두 아이는 한참이나 서로를 보며 신기해하다가, 곧장 붙어서 어울려 다녔다.

“콜라 맛 젤리 먹어봤어? 진짜 맛있던데.”

“뭐? 콜라 맛도 있었어?”

니콜라스가 크게 놀라며 젤리가 쌓인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젤리 앞에 서서, 온갖 맛을 하나씩 먹어보며 진지한 낯으로 순위를 매겼다.

몇 번 의견이 갈리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영광의 1등 자리를 차지한 건 콜라 맛이었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수영을 못 하는 건 아쉽지만, 친구도 만났고 간식도 많아서 나쁘진 않았다.

니콜라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자, 친구들! 모여봐요! 수영하러 갑시다!”

벌떡!

니콜라스의 몸이 자동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모조리 치워버린 니콜라스가 신난 얼굴로 달려갔다.

“니키! 같이 가!”

그 뒤를 할리가 따랐다.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도착한 곳은 야외 수영장이었다.

매의 눈으로 수영장을 훑은 니콜라스는, 수면의 깊이가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쉽긴 했지만,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물을 보니 그런 아쉬움도 쏙 들어갔다.

“선생님 따라서 준비 운동 합시다! 자아, 원, 투!”

“원, 투!”

니콜라스가 씩씩하게 따라 했다. 니콜라스 옆에 자리한 할리도 재밌다는 표정으로 준비 운동을 따라 했다.

마침내.

풍덩!

니콜라스의 몸이 물속으로 빠졌다.

깊게 들어가 바닥을 한번 찍고 올라온 니콜라스가 물 밖으로 고개를 빼내어 머리를 털었다.

“푸하! 살 것 같네!”

“으악! 물 튀겨! 너 콜리 같아!”

“콜리?”

“응. 브로콜리! 내 가족이야!”

“가족 이름이 브로콜리야?”

도리토스 같은 애가 또 있었네.

자신이 붙여준 별명인 건 생각도 안 하고 니콜라스가 킥킥 웃을 때였다.

할리가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개거든!”

“아, 개구나. 개… 야!”

니콜라스가 할리에게 달려들었다. 할리가 꺄악, 하는 가녀린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녔다.

그러나 물속에서 니콜라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리가 만무했고.

“악! 항복! 항복!”

할리는 니콜라스의 손에 한참이나 탈탈 털린 후에야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물장구도 치고, 서로 빠트리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며 정답게(?) 놀다가.

조금 진정한 후, 본격적으로 수영을 시작했다.

“우와, 너 수영 되게 잘한다.”

할리가 튜브에 양팔과 턱을 올린 채로 그런 니콜라스를 구경했다.

평영을 하다가, 유연하게 배영으로 자세를 바꾼 니콜라스가 흥이 나서 온갖 묘기를 보여주었다.

물속에서 한 바퀴 돌기, 물속에서 바닥에 앉기, 물속에서 물구나무서기 등등.

할리가 물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너무 신나 하길래, 뭐 하나 구경 온 캠프 선생님도 신기해하며 박수쳤다.

“뭐 이 정도야.”

니콜라스가 콧대를 높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물이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구나.”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수영 선수가 될 거거든요!”

“어머, 정말이니? 제이도 수영 선수가 꿈이라던데. 둘이 친해지면 되겠네!”

“제이요?”

“응. 저기, 저기서 수영하고 있는 친구.”

니콜라스의 시선이 선생님의 손가락을 따라 한 곳으로 향했다.

촤악!

팔의 움직임에 따라 물살이 밀려났다. 유연한 발놀림 탓에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모습이, 마치 물이 뒤에서 미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제이!”

선생님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수영하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제이, 이리로 와볼래?”

“네!”

제이라고 불린 아이가 능숙하게 수영하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제이, 이쪽은 니키야. 니키도 수영 선수가 꿈이래.”

“어? 정말요?”

제이가 눈을 반짝, 빛내며 니콜라스를 보았다.

“안녕! 나는 제이스 테일러야!”

“니콜라스 가비.”

니콜라스가 짧게 답했다.

두 눈에는 미묘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니키구나! 난 제이라고 불러줘.”

“난 할리야! 할리 하펜!”

제이는 어느새 할리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 광경을 불퉁한 표정으로 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도 수영 좋아해?”

제이가 니콜라스를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

니콜라스가 뭐 그런 걸 묻냐는 듯이 답했다.

“그래? 나도! 난 5살 때부터 수영 배웠어!”

“다, 다섯 살?”

니콜라스가 수영을 시작한 건 6살이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에 미약한 패배감과 분함이 떠올랐다.

“응! 넌 언제 시작했어?”

“…난 4살 때부터!”

“정말? 나보다 빨리 시작했구나!”

“그 정도야 기본이지.”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

할리가 해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둘 중에 누가 더 수영 잘해?”

그러나 그 궁금증은 니콜라스를 자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니콜라스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화르륵 타올랐다.

“으응?”

따갑게 쏟아지는 눈빛에 제이스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이상한 애인가?’

애써 시선을 회피한 제이스가 할리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하려던 순간이었다.

“겨뤄보면 알겠지!”

니콜라스의 말에 두 사람이 니콜라스를 쳐다보았다.

“저기부터 저기까지. 누가 더 빠르게 찍고 돌아오는지 보면 되는 거 아냐?”

호승심에 활활 불타는 얼굴을 한 채였다.

“난 그렇게까진….”

“너!”

“어?”

“잘 들어! 세상에 최고는 하나야! 둘은 없어!”

니콜라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나보다 수영 잘하는 놈이 있다는 걸 용납 못 해!”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지만, 수영에 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수영 선수가 되겠다고 한 날, 나르샤는 이렇게 말했다.

- 할 거면 최고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알겠어?

잔소리쟁이 괴물이지만, 그 말만큼은 잔소리로 넘기지 않았다. 넘길 수 없었다.

최고라는 말이 너무 멋있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해하던 제이가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애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오해한 것 같았다.

“최고… 그렇구나! 너 정말 멋진 놈이네! 그래! 하자!”

그는 니콜라스의 말에 무척이나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참가자가 모두 동의를 표하니, 시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판은 할리 하펜.

참가자는 제이스 테일러, 니콜라스 가비.

두 사람이 시작 지점에 가서 서는데, 한 아이가 다가왔다.

“저… 시합한다고 들은 것 같은데. 나도 구경해도 돼?”

“구경? 좋아! 시합에는 관객이 있어야지!”

제이가 선선히 수락했다. 아까와 다르게 무척이나 적극적인 자세였다.

‘질 수 없지!’

“구경하고 싶은 애들 다 하라 그래!”

니콜라스가 호탕하게 외쳤다.

작게 시작했던 시합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시합한다고? 나도! 나도 참여할래!”

관객뿐만 아니라, 새로운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달려왔던 캠프 선생님들도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흥미로워했다.

딱히 해가 될 일이 아닐 뿐더러, 아이들이 수영에 재미를 붙이기에 딱 좋은 이벤트라 그들도 말리지 않았다.

심판이 할리라는 것을 듣고는 보조 진행 요원을 자처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여섯의 참가자가 모였다.

대체 언제 빌렸는지, 호루라기와 선글라스를 낀 할리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외쳤다.

“수영 방식은 자유! 맞은편에 손바닥을 찍고 가장 먼저 되돌아오는 사람이 승리! 제대로 안 찍으면 실격이야!”

어린이를 위한 수영장에 스타팅 블록 같은 건 없었기에, 모두 물속에 둥둥 떠 있는 채였다. 있어도 위험을 이유로 선생님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자, 그럼 준비….”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아이들이 숨을 죽였다.

팽팽한 긴장감이 수영장을 가로지른 순간.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니콜라스는 본능적으로 팔을 곧장 내뻗었다. 놀라운 반사 신경이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아니, 어쩌면 니콜라스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일 뿐인지도 몰랐다.

니콜라스의 눈에 보이는 건 물과 자신의 팔이 전부였다. 보이는 건 그걸로 충분했다.

촤아악!

수영은 온몸을 쓰는 활동이었다. 온몸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때, 몸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간다.

니콜라스는 손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져 있다고 상상했다.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아, 2번 선수가 먼저 터치합니다! 그다음 곧바로 1번 선수!”

2번이면 제이였다.

수영장 벽을 박차며, 니콜라스가 숨을 가라앉혔다.

니콜라스는 섣불리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아직 승부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어! 어! 1번 선수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2번 선수를 따라잡, 아니! 추월, 추월합니다!”

막판에는 인정사정 가릴 게 없었다. 그저 뻗는다! 할 수 있는 만큼, 최고의 빠르기로!

니콜라스의 후반 대시는, 수영 코치조차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다.

“거리가 점점 벌어집니다! 빨라요! 엄청 빨라요!”

심판이면서 중계를 보는 할리가 신이 나서 외쳤다. 할리의 목소리가 커진 순간, 니콜라스의 손끝에 딱딱한 게 닿았다.

할리가 흥분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1등, 1등이 정해졌습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관객들도, 선생님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보고 있었다.

“이어서 2번 도착!”

할리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니콜라스는 개의치 않았다.

왜?

우승은 자신이 했으니까!

니콜라스가 두 팔로 바닥을 짚어 물속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속속들이 다른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엄지를 척 들어 올리는 할리를 보던 니콜라스가 환하게 웃었다.

“워후! 내가 이겼다!”

신이 나서 방방 뜨는 건 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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