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샌디에이고의 하루 (2)
“하하. 역시 네 살 때부터 시작해서 그런가. 엄청 빠르잖아!”
니콜라스가 콧대를 높였다.
“난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해서… 에이, 조금만 더 일찍 시작할걸.”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던 니콜라스의 눈썹이 약간 꿈틀했다.
“거짓말인데?”
“응? 뭐가?”
“나 여섯 살에 시작했어.”
“…어?”
실력은 실력이었다!
일 년 더 늦게 시작했니 뭐니, 하면서 패배를 정당화하는 건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
니콜라스가 눈을 부라렸다.
“여섯 살!”
“그게 무슨….”
“넌 다섯 살! 난 여섯 살!”
“…….”
제이가 떫은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보았다.
흥! 코웃음을 치는데, 저기서 할리가 도도도 달려왔다.
“니키! 일등 축하해!”
“이 정도야 발장구 수준이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도 만면에 꽃핀 웃음은 도통 사라지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몇 차례 축하 인사를 더 받았다. 지나가는 선생님들도 어깨를 한 번씩 두드리고 갈 정도였다.
니콜라스의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수영 시간이 끝이 나고,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아이들은 니콜라스를 중심으로 모였다.
누가 뭐래도 오늘의 일약 스타는 니콜라스였으니까!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네.”
제이가 도시락에 담긴 햄을 포크로 쿡 찍어서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이길걸?”
니콜라스가 거드름을 부렸다. 그러자 제이가 눈매를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내가 이길 수도 있지!”
“그럴 일은 없어!”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한 번 더 해!”
“좋아, 딴소리 없기야!”
두 사람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도시락을 해치웠다.
누가 더 늦게 먹으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더 빨리 먹겠다는 듯 도시락에 아예 머리를 박았다.
“다 먹었다!”
한발 빠르게 도시락을 먼저 해치운 제이가 환하게 웃었다. 소시지 하나를 덜 먹은 니콜라스의 얼굴에 패배감이 깃들었다.
“버, 벌써 다 먹었어? 나도 기다려줘!”
할리가 울상인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음식을 열심히 씹었다.
잠시 후.
니콜라스는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들이 불타오른 것이 무색하게도.
“이번 시간에는 배드민턴을 할 거예요!”
“수, 수영은요?”
“수영은 오전에 한 번, 혹은 오후에 한 번 돌아가면서 할 예정이랍니다! 친구들이 더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캠프 일정이 짜여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표정을 짓던 제이가 니콜라스를 홱 돌아보았다.
“너! 내일 두고 보자!”
“흥, 패배자의 말은 안 들리는데?”
“이익!”
제이가 바들바들 떨었다.
“으하하! 재밌게 노네!”
할리만 신났다.
그러나 한번 달아오른 승부욕은 비단 수영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배드민턴 채를 든 두 아이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보듯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제이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배드민턴까지 질 수는 없어!’
멋진 애라고 생각했는데, 멋지긴 개뿔!
아주 속 좁은 애였다!
수영에서 이겼다고 저리 재수 없게 구는데, 배드민턴까지 이기면….
부르르.
제이가 몸을 떨었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것 같았다.
제이가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셔틀콕을 높게 던지고 곧바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스매시를 날렸다.
빠르게 날아가는 셔틀콕!
제이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건 못 받아칠….
“뭐, 뭐야!”
분명 왼쪽에 있었는데, 어느샌가 오른쪽에 나타나 있었다.
니콜라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라켓을 들어 올렸다.
통!
셔틀콕이 얕게 떠올랐다. 제이의 눈에 네트를 넘어가는 셔틀콕이 아주 천천히 보였다.
“안 돼!”
제이가 팔을 뻗었다.
그 아찔한 순간에 할리가 숨을 흡 들이켰다.
그러나.
톡. 토르르.
무정한 셔틀콕은 제이의 라켓이 닿기 전에 바닥을 굴렀다.
“으하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지롱!”
니콜라스가 얄밉게 약을 올렸다.
“으으… 한 판 더! 한 판 더 해!”
“좋아! 그러시든가!”
두 아이가 다시 라켓을 고쳐 쥐었다.
한 시간 후.
털썩! 털썩!
두 아이가 잔디밭에 쓰러졌다.
“무… 무승부야.”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제이가 힘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봤자… 수영은 내가 이겼어.”
마찬가지로 다 죽어가는 니콜라스가 허세를 부렸다. 옆에서 할리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로 늘어진 마시멜로가 되어버린 두 아이를 콕콕, 찔렀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캠프 첫날이 무사히(?) 끝이 났다.
* * *
“니키. 캠프 어땠어?”
니콜라스를 데리러 온 나르샤가 니콜라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물었다.
복수는 까맣게 잊어버린 니콜라스가 젠체하며 말했다.
“수영 시합했는데 내가 일등 했어!”
“정말? 잘했네!”
완전히 잊었구나!
하루 내내 수영만 하고 싶다는 걸, 조금 다양한 활동이 들어간 캠프로 집어넣는 만행(?)을 저지른 나르샤였다.
오늘 행패를 부려도 조금 봐주려 했건만….
귀여운 사고뭉치 머릿속에는 이미 그 문제가 지워져 버린 것 같았다.
물론, 나르샤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시합은 어쩌다가 하게 된 거야?”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이, 과장되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니콜라스의 어깨가 들썩였다.
니콜라스는 흥이 올라 신나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정말? 우와… 엄청나네!”
나르샤가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나르샤의 까만 속내를 모르는 니콜라스는 후헤헤헤,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니콜라스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건, 집에 도착한 때였다.
털썩!
니콜라스가 침대 위로 엎어졌다.
너무 격렬하게 놀아서 그런지 잠이 솔솔 몰려왔다.
그때였다.
띠리리- 띠리-
벨 소리가 울렸다.
“끙, 누구야.”
니콜라스의 손이 책상 위를 더듬었다.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이 없는데… 진인가?’
반쯤 풀린 눈으로 핸드폰을 연 니콜라스는 의외의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가락은 착실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도리토스!”
- 니키.
차분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흘러 들어왔다.
너무 차분해서 언뜻 차갑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였지만, 옅게 웃고 있을 도현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기에 개의치 않았다.
- 니키. 오늘 수영 캠프 첫날이지?
가까이에 사는 진도 기억하지 못하는-혹은 관심이 없는- 걸, 얘는 당연하다는 듯이 기억한다.
친구의 관심이 싫을 리가 없었다.
“응! 오늘 갔다 왔어!”
- 어땠어? 재미있었어?
“어, 맞아! 야야, 들어봐!”
아까까지 나르샤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았으면서, 다시 또 신이 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니콜라스였다.
나르샤처럼 커다란 리액션은 없었지만, 도현은 내 말을 상대가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청자였다.
이야기에 이렇게 집중해주니 기분이 좋아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기실, 니콜라스의 주변에는 이처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적었기에 더욱 그랬다.
니콜라스는 즐겁게 떠들었다.
- 정말? 할리를 만났다고?
이야기를 듣던 도현이 놀라워했다.
- 다음에 할리 집에 놀러 가봐. 할리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파이가 정말 맛있더라.
그뿐 아니라 파이 맛집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파이 맛집을 머릿속에 저장해 두기로 했다.
한참 자랑을 늘어놓던 니콜라스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오디션 봤잖아. 결과 나왔어?”
- 응. 합격했어.
“아, 합격했구… 뭐, 뭐라고?”
- 오디션 합격했어.
니콜라스는 말을 잃었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말한단 말인가? 그들이 통화한 게 벌써 오십 분째였다!
오십 분 동안 가만히 있다가, 무슨 파이 하나 사 먹은 듯이 가볍게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야! 왜 그걸 이제야 말해!”
- 하하하.
니콜라스의 분노 어린 외침에도 도현은 재밌다는 듯이 웃기만 했다.
하여튼.
니콜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주변인을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은 도리토스에게 속고 있었다. 도리토스는 생각보다, 정말로, 성격이 좋지 않았다.
한 번씩 꼭 태연한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놀려먹거나 속여먹곤 했다. 더 웃긴 건, 스스로도 자기가 그러는 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말해봐야 아무도 믿질 않으니… 샌디에고 바다에서 홀로 외로이 외치는 기분이었다.
“대체 언제 결과가 나온 건데?”
- 아, 어제 나왔어. 바로 연락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애매하더라고.
하긴, 도리토스가 있는 곳과 시간 차가 16시간이라고 했다.
응?
니콜라스가 시계를 보았다.
“너는 지금 몇 신데?”
- 일곱 시.
“오후?”
- 아니, 오전.
“미친놈.”
그럼 자신과 여섯 시부터 통화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미친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 오늘 캠프 첫날이었잖아. 그래서 시간 맞춰 전화했지.
“캠프가 뭐 별거라고.”
퉁명스레 말했지만, 감동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과자 주제에.
속으로 꿍얼거린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진은 알아?”
- 아니. 너한테 먼저 걸었어. 진은 이따가 점심쯤에 전화하려고.
“내가 먼저 안 거야?”
진을 놀릴 거리가 생겼다! 니콜라스가 음흉한 표정으로 히히덕거렸다.
그 이후로도 삼십 분 정도 더 통화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니콜라스는 이번에는 정말로 침대 위에 엎어졌다.
‘곧 저녁 먹어야 하는데….’
눈이 가물가물 감겨왔다.
결국, 니콜라스는 부드러운 이불에 뺨을 비비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니콜라스가 꿈나라로 떠난 그 시각.
“으아아아악!”
한 남자가 눈알을 번뜩이며 제 수염을 쥐어뜯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붉게 핏줄이 올라온 눈동자와 그 밑에 깊게 파인 다크서클이 흡사 광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제멋대로 삐죽삐죽 자라난 수염과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더욱 디테일을 살렸다.
손을 뻗어, 몇 잔째인지 모를 아메리카노를 원샷했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
“기는 무슨! 나는 멍청이야! 멍청한 놈! 멍청한 새끼!”
리암이 이번에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다 탈모 생겨요.”
리암처럼 어디 낭인 같은 행색은 아니었지만, 얼굴이 초췌하게 질린 로잔나가 말했다.
“머리 쥐어뜯을 시간 있으면 편집이나 해요.”
그 단호한 말에 리암이 눈물을 삼켰다.
한바탕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이곳은 바로, 리암의 작업실이었다.
잠을 언제 잤는지도 까마득했다.
아니, 그걸 잠이라고 부를 수 있던가?
한계의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어느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면 몇 시간이 지나간 뒤였다.
“그래도… 거의 끝나 가잖아요. 조금만 더 죽어봐요.”
힘내봐요가 아니었다.
“그래, 망할! 지금까지 한 게 있는데!”
리암이 몸을 쭉 폈다. 두 눈이 번들거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조금만 더 죽자!”
심기일전한 리암이 다시 달려들었다. 로잔나도 고개를 끄덕이곤, 컴퓨터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프로그래머의 사정으로, 정보 제공이 늦어져 출품 공식 일정이 늦춰진 건 천운이었다.
여전히 시간은 촉박했지만….
‘할 수 있겠어.’
로잔나의 시선이 달력에 닿았다.
그동안 죽은 게 보람이 있었는지, 어찌어찌 일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걸 해내기 위해 죽어갔던 시간을 떠올리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지만… 뭐 어떤가. 결과만 좋으면 됐지.
로잔나도 눈에 불을 켜고 마우스를 딸칵였다.
헛고생이 될지, 기적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주사위도 던져봐야 아는 것이 아니던가?
로잔나도 제 옆에 놓인 아메리카노를 꿀꺽꿀꺽 마셨다.
탁!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경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