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한 여름, 폭풍 (1)
매앰. 맴.
매미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날이 많이 덥네.”
이장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도현의 이마에도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에어컨 틀어야겠다. 괜찮아?”
“네.”
창문이 닫히고, 시원한 공기가 다리를 스쳐 지나갔다. 차 안은 금방 서늘해졌다.
그들은 지금 드라마 촬영을 위해 이동하는 중이었다.
“촬영 장소가 여긴가? 여기 맞나?”
이장혁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촬영은 방송국 세트장이 아닌, 실제 주거 공간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우글우글하게 모여 있는 인원이 보였다. 그제야 이장혁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저긴가 보네. 잘 왔나 보다!”
도현은 아빠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가까이 가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 가현아!”
“이장혁?”
정가현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야, 오디션 이후로 처음이네. 술 산다면서 사지도 않고.”
“그게 내 탓이야? 네가 바쁜 탓이지.”
“음, 그건 그렇지.”
실제로 이장혁이 몇 번 연락했으나 일이 바빠서 거절한 정가현이었다.
정가현이 멋쩍게 웃다가 시선을 낮추어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는 준비 잘해 왔어?”
“네!”
“그래. 오디션처럼만 하면 돼.”
툭툭.
도현의 어깨를 두들겼다.
“여기 송하 역 배우 왔어요!”
“벌써요? 아, 옷! 누가 옷 좀 가져와!”
“여기 있어요!”
누군가 헐레벌떡 다가와 도현의 손에 옷이 든 바구니를 주었다.
“이거 가지고 저기 가서 갈아입고 오면 돼!”
“네!”
얼마나 바쁜지, 금방 사라져버린 스태프였다.
도현은 스태프가 말해준 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흰 반팔에 반바지였다.
그때였다.
“송하 역? 송하 역이 왔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따라간 곳에는 한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박민호 감독님이야. 우리 드라마 총괄 프로듀서. 가자, 인사드리러.”
정가현이 도현을 재촉했다.
“인사요?”
“응. 감독님 얼굴 한번 봐야지.”
“아, 네!”
도현은 정가현이 이끄는 대로 쫄래쫄래 따라갔다.
“안녕하세요. 송하 역을 맡은 이도현입니다.”
도현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려다가, 아차하며 물렸다.
미국이 아닌데, 미국에서처럼 행동할 뻔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상관이 없는지, 박민호는 그저 도현을 보며 눈을 빛냈다.
영상을 봤을 때도 프로필 사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놀랐는데… 실제로 보니 더했다.
연예인에 익숙한 스태프들이 이쪽을 흘끔흘끔 보는 게 느껴졌다.
‘싹수가 아주 파릇파릇하네.’
어디서 이런 게 굴러온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 나는 박민호 감독이고, 박 감독님 아니면 감독님이라고 불러. 불편하면 아저씨라고 해도 되고.”
“감독님이라고 부를게요.”
도현이 싱긋 웃었다.
제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나, 촬영장에서 감독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가당키나 한가.
정가현이 그런 박민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아이한테 하는 짓이 짓궂기 그지없었다.
“오디션 영상 보니까 아주 끝내주게 잘하던데. 오늘도 그렇게 할 수 있어?”
“아니요.”
“…뭐?”
“그때보다 시간이 지났는데, 더 잘해야죠.”
도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허!”
헛웃음을 치던 박민호가 이내 크게 웃었다.
“흐하하하! 그래! 그렇지! 더 잘해야지! 맞는 말이네, 맞는 말이야!”
촬영장에서 잘 웃지 않는 박민호 감독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모였다.
“이거 완전 물건이네! 기백 한번 좋구나.”
도현은 그저 옅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자신하니까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해지네. 실망시키는 일은 없겠지?”
정가현의 표정이 조금 불편해졌다. 정가현이 이장혁을 슬쩍 보았다.
도현이 당돌하다곤 하나, 아인데. 너무 몰아붙이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 끼어들려던 때였다.
“저한테 어느 정도 기대하시는지를 몰라서…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게요.”
도현의 의도와는 달리 건방지거나 버릇없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박민호는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유쾌했다.
만날 눈치만 보며 제 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이들보다야, 제가 할 말 다 하고 당당한 모습이 훨씬 그의 성격에 맞았다.
“그래, 그럼 기대하고 있으마.”
박민호는 마지막으로, 이장혁과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떴다.
“야, 이장혁.”
“응?”
“네 아들 장난 아니네. 배짱이 아주… 너랑 반대다, 반대야.”
“음…. 우리 아들은 나보단 혜나를 더 닮았긴 하지.”
이장혁이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그들은 정가현이 이끄는 곳에 가서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대기했다.
도현은 대본을 보고, 이장혁은 그런 도현을 보고 있던 때였다.
“오빠!”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고개를 들자,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얌전하게 내린 머리카락이 어깨 부근에서 살랑였다.
도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람이었다.
“저 애가 혹시….”
“맞아요.”
도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아람을 반겼다.
“역시 합격할 줄 알았어!”
바늘 천 개를 삼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도현은 속내를 삼키곤 아람을 향해 웃었다.
“너도 합격했네.”
“내가 말했잖아! 나 말고 합격할 사람 없다고.”
아람이 자연스럽게 도현의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아람의 뒤를 따라온 사람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어머, 얘는 송하 역할인가요?”
“하하, 네. 맞아요. 어머니신가요?”
“네. 제가 매니저 대신 따라다니거든요. 혹시 그쪽도…?”
“네. 도현이 아빠예요.”
“이름이 도현이구나! 안녕? 아람이 엄마야.”
“안녕하세요.”
도현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어쩜 애가 예의 바르기도 하지. 아람아. 아람이도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하하, 그래. 안녕.”
이장혁은 아람이 귀여운 눈치였다.
도현은 흘긋, 스스로 아람의 엄마라고 설명한 여성을 보았다.
도현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상당히 평범한 중년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현이는 어디 학원 다녀요?”
“아, 도현이는 학원 안 다녀요.”
“그럼 벌써 에이전시에 소속된 거예요?”
여성이 놀라며 물었다. 그에 이장혁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 그게 아니고, 도현이는 아직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예요.”
“그럼 이번 촬영이 처음…?”
“처음은 아니고, 독립 영화도 한 번 찍었어요.”
“아아, 그렇구나.”
여성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우리 아람이는 드라마랑 CF에 몇 번 출연한 적 있어요. 혹시, <무화과 식당> 아세요?”
“아, 제가 드라마를 잘 안 봐서….”
“거기서 우리 아람이가 등장했는데, 귀엽다고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요. 그 후로 CF 요청도 들어왔고.”
“정말요? 대단하시네요.”
“아휴, 뭐 별거라고요. 도현이도 금방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예요. 호호호!”
“하하하.”
이장혁도 마주 웃었다.
“도현이가 학원에 안 다닌다고 했죠? 아름 학원은 어때요? 우리 아람이가 다니는 곳인데. 여기 선생님들이 다 잘 가르치고, 또 인프라가 잘되어 있거든요. 이쪽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그거잖아요, 인프라.”
“그렇죠.”
이장혁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학원에서도 잘하는 애들은 정말 열심히 밀어주더라고요.”
도현은 그 오묘한 화법에 감탄했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우리 애는 잘해서 학원에서 밀어준다’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게 또 부담으로 느껴지면 힘들 수도 있긴 한데… 그렇지 않으면 여기만 한 곳이 없어요. 다만, 애들 수준별로 반을 나누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람이가 조금 나이 많은 친구들이랑 같은 반이라서 그건 좀 힘들어하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아람이 수준 높은 반임을 자랑했다.
“아람이가 연기를 정말 잘하나 보네요.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주변에서 그런 말을 자주 하긴 해요.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죠.”
그리 말하면서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다.
도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다른 이라면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도현은 오히려 반대였다.
아람이를 자랑하면서 눈에 묻어난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온기를 본 탓이었다. 그걸 본 순간 미묘한 불안함과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어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아무튼 학원에 관심 있으면 저한테 물어봐요. 자, 아람아. 이리와.”
“…나 여기 있으면 안 돼?”
“얘는. 엄마랑 같이 연습하기로 했잖아.”
“여기서 할래.”
“아람이 자꾸 떼쓸래? 엄마가 촬영장에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어른스럽게 굴어야 한다고.”
“그래! 잘 기억하고 있네!”
“그치마안….”
아람이 소 같은 눈망울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에 움찔한 도현이 슬쩍 입을 열었다.
“아람이 저랑 연습하면 안 될까요?”
“으응? 어머, 착하기도 하지. 동생을 챙겨 주는구나. 그래도 아람이는 아줌마랑 약속한 게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데 더 말을 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현이 안타까운 눈으로 아람을 보았다. 아람은 그런 도현을 보다가, 결국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럼 아람이랑 잠깐 연습 좀 하고 올게요. 자, 가자.”
“응.”
졸졸 엄마를 따라가던 아람이 뒤를 돌았다.
“오빠 이따 봐.”
“그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멀어지고.
“하하…. 폭풍 같은 분이시구나.”
이장혁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음. 그런데 도현이는 정말 학원에 다닐 생각 없어? 미국에서라도.”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연기법이 워낙 특이했기에 학원에 가기를 꺼렸다. 학원에 가서 다른 인물을 만들어내어 옷 입듯이 입는다면, 누가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 것인가?
그리고 지금은.
철없는 생각이거나 오만한 생각일지도 몰랐지만, 도현은 자유롭게 연기하는 게 좋았다.
어쩌면 도현이 원하는 게 아니라 형이 원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면, 그저 형의 마음을 도현이 제멋대로 재단하는 건지도 몰랐다. 갈수록 경계는 무의미해졌기에 구분은 덧없는 행위였다.
도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형은 바이올린을 사랑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했는가 묻는다면, 아니었다.
오히려….
굳은살을 파고들던 줄, 손가락에서 터져 나오는 피. 수없이 많은 상처가 새겨진 손에 또 하나의 상처가 생겼다.
뚝, 뚝 떨어지는 피에도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다시.
대충 피를 훔친 손으로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다.
그건 애정이 아니었다. 서릿발처럼 심장을 식히는 그것은 집착이고 광기였으며, 오히려 증오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덧없지만 또 한번 생각해본다.
어쩌면, 형에게 주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도현이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검고 맑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이 좋아요.”
“그래, 그러면 천천히 생각하자.”
부모님은 도현을 재촉하는 법이 없었다.
묻기는 하지만, 답은 온전히 도현에게 맡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어린 날도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해야 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거였다면. 그 누구도 강요하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도현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