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93)화 (94/582)

제93화. 한 여름, 폭풍 (2)

“송하 역이랑 송아 역!”

스태프가 다급히 찾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여기 있다고 말하며 걸어갔다.

“이제 촬영 시작할 건데, 저기, 저기 보이지? 저기에 가서 서 있으면 돼.”

도현은 알겠다고 말하며 걸어갔다. 먼저 와서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송하와 송아의 부모님 역할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송하 역에 이도현이에요.”

“네가 우리 아들이구나!”

두 사람은 허허 웃으며 도현을 반겼다. 조금 이따가 펼칠 연기와 다르게, 아주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도현이 제자리를 찾자 아람이도 달려왔다. 가던 길에 잠깐 멈추고 뒤돌아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엄마가 하는 말에 대답한 것 같았다.

아람이도 두 배우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도현에게로 걸어왔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아이 방.

거기서도 조금 열린 문 옆에 있는 벽이었다.

“연습 잘했어?”

도현이 가볍게 물었다.

그런데.

도현의 눈매가 좁혀졌다. 도현이 아람의 낯을 샅샅이 살폈다.

“너 괜찮아?”

아람의 안색이 창백했다.

“응, 괜찮아.”

애써 태연한 척 답했지만, 잘게 떨리는 목소리 끝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디 아픈 거야?”

도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활짝 웃던 애가, 순식간에 환자처럼 하얗게 질렸다.

“아, 아냐 괜찮아.”

“아람아. 솔직히 말해도 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아무한테도?”

“응. 아무한테도.”

도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람이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카메라가 무서워.”

그러고 보니, 오디션 때도 계단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단순히 싫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정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두려워하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개를 슬쩍 비트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는 여성이 보였다.

도현은 아까 엄마랑 한다던 연습이 이와 관련된 일이었음을 짐작했다.

“…촬영할 거지?”

“응. 할 거야. 해야 해.”

도현이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메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 그냥 나랑 노는 거야.”

“논다고?”

“응. 나는 오빠 역할. 너는 동생 역할. 소꿉놀이하는 거야.”

“그게 뭐야. 바보 같아.”

아람이 작게 웃었다.

그때였다.

“조명 다 됐어?”

“네! 이쪽은 됐습니다!”

“그럼 촬영 시작합시다!”

손이 긴장으로 굳어진 게 느껴졌다.

“배우들도 준비 다 됐죠?”

“네.”

도현과 아람이 대답했다.

조명, 반사판, 마이크 붐, 수많은 스태프들이 눈에 들어오자 아람의 숨결이 떨렸다.

도현이 아람과 눈을 맞추고, 입 모양으로 천천히 말했다.

소꿉놀이야.

아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꿉놀이하는 거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자, 자, 다들 조용히 하고.”

촬영장이 금방 고요해졌다.

도현이 아람의 안색을 확인했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게 보였다.

“시작합니다. 레디, 액션!”

슬레이트가 내려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아람은 떨리는 몸을 애써 내리눌렀다.

무서웠다.

소꿉놀이라고는 했지만, 그 한마디에 두려움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왜 매번 나한테만 난리야! 어? 당신은 뭐, 잘한 거 있어? 당신이 애들한테 조금이라도 신경 썼어?”

거실에서 두 배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점점 격해지고, 아람의 낯빛도 더욱 하얘졌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답답해.’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아람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오빠….”

연기가 아니었다.

아람은 도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거실에서 고성을 지르는 배우들도, 눈부신 조명도,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붐 마이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도현과 아람만.

아니, 송하와 송아만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온기를 품은 손가락이 엮어졌다.

“괜찮아.”

자신도 떨고 있으면서, 어떻게든 태연한 척 말한다. 떨리는 입술을 끌어 올려 애써 옅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세상에서 제일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면, 이상한 걸까.

“괜찮아, 송아야. 이리 와.”

도현이 아람을 잡아당겨 귀를 막아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귀를 감싸자 고성 소리가 작아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연기인데, 연기에 불과할 텐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다 괜찮을 거야.”

정말 다 괜찮을 것 같았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 * *

박민호는 굳은 눈으로 연기를 지켜보았다.

잘한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아역 배우 수준에서 잘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카메라가 돌아가자마자 표정이 싹 변하더니, 순식간에 겁먹은 낯빛을 만들어냈다.

그냥 겁먹은 낯빛이었다면, ‘재능 있네’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도현은 달랐다.

슬픈 감정을 우는 얼굴로 표현하는 것과 무표정한 얼굴로 표현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렵겠는가? 더 나아가 웃는 얼굴이라면?

감정과 표현이 모순되면 모순될수록, 연기자에게 더 높은 난도의 연기력을 요구하는 게 보통이었다.

박민호는 그걸 한 겹 숨긴 감정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저 어린애가 감정을 한 겹 숨기고서 연기하고 있었다.

웃는 낯으로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함을 나타낸다. 분명 미소 짓고 있건만, 아이가 느끼는 짙은 슬픔이 전해져 왔다.

박민호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함을 느꼈다.

그 박민호가, 이제 겨우 브라운관 데뷔를 하는 아역을 상대로!

“이럴 거면 이혼하든가!”

여성의 째지는 목소리가 울렸다.

도현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동생이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재빨리 손에 힘을 주어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다.

그리고 동생은 볼 수 없는 얼굴은.

한 껍질 벗겨진, 날것의 표정이었다.

“컷! 좋아!”

박민호가 손뼉을 한번 쳤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올라온 채였다.

촬영 감독은 그런 박민호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박민호 감독이 누구던가.

방송국에서 가장 유명한 실력 신봉자였다. 실력만 있으면 제 싸대기를 때려도 웃을 양반이었지만, 눈이 하늘에 달려서 그만큼 만족시키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다.

그런 양반이 이까지 드러내고 웃고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 아주 좋아! 클로즈업 샷 갈 건데 방금처럼만 해!”

박민호 감독의 입에서 칭찬이 쏟아졌다.

이어서 클로즈업 샷이 진행되었다.

도현의 얼굴을 근접 거리에서 촬영한 촬영 감독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사가 많은 연기보다, 대사가 없는 연기가 더욱 어렵다. 오롯이 표정으로만 감정과 스토리를 전달해야 하니, 한층 더 섬세한 연기가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그게 클로즈업 샷이라면 더했다.

몸짓으로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샷과 달리, 오직 표정. 얼굴 근육으로만 감정과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확 티가 나서, 컷 자체를 들어낼 수밖에 없는 게 클로즈업 샷이었다.

그런데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오히려, 아이의 눈빛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것 같을 정도로 몰입력 있는 연기였다.

아이의 표정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다음에 일어날 일에 대해 궁금해할 수밖에 없으리라.

“컷!”

촬영 감독은 당연히 오케이 사인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보다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자, 다시 갑시다!”

박민호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잘했다. 그도 놀랄 정도로 아주 잘했다.

그러나 욕심이 생겼다.

때론 어떤 배우들은 촬영 중에 성장하기도 한다.

긴장이 풀리면서 점점 제 실력을 내는 경우도 있고, 정말로 제 부족한 점을 조금씩 찾아내며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저 아이는, 이게 첫 촬영이었다.

확신하건대, 몇 번 더 기회를 주면 더 나은 장면이 뽑힐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웬만한 아이 같았으면 그냥 넘겼겠으나.

- 그때보다 시간이 지났는데, 더 잘해야죠.

눈을 똑바로 뜨고 당돌하게 말하던 애가 아니던가?

그 말을 듣고 그냥 넘기면 박민호가 아니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할 수 있지?”

박민호 감독의 갑작스러운 말에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도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네, 할 수 있어요.”

“하하! 그래, 그래! 좋아! 아주 좋아!”

박민호는 흥이 올랐다.

“자, 그럼 다시 간다! 레디, 액션!”

그 후로도.

“레디, 액션!”

몇 번이나 더.

“다시!”

같은 장면 촬영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감독과 배우가 펼치는 기백에 밀려 말도 꺼내기 어려웠을 뿐더러.

“괜찮아…. 괜찮아, 송아야.”

놀랍게도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전보다 더 나은 장면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발전을 보이는 건 도현뿐만이 아니었다.

하얗게 질린 연기는 인상적이었지만, 은근히 굳어서 어색해 보였던 송아 역 배우도, 갈수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긴장이 풀려 제 실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좋아! 오케이!”

드디어 감독의 입에서 오케이 소리가 떨어졌다.

도현은 땀이 조금 배어 나온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곤 환히 웃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도현은 여기저기에 인사했다.

급해서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던 아침과 달리, 사람들은 호의 섞인 시선으로 마주 인사해 주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박민호 감독은 업계에서 깐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그에게 걸리면 아역이고 뭐고 없었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촬영, 또 촬영!

그렇다고 눈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아역이 박민호의 눈에 통과되는 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촬영이 길어질 것을 각오했건만.

길어지기는 무슨, 박민호 감독이 욕심을 부려 재촬영을 했음에도 예상보다 빠르게 끝났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쏘냐.

도현과 아람을 보는 눈에서도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 장면이 오늘 찍는 장면 중 마지막 장면이었다. 그 말은, 퇴근 시간을 앞당긴 공신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도현과 아람은 스태프들에게 온정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진짜 너 아들 참 잘 낳았다.”

정가현이 이장혁을 보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장혁은 아직도 넋이 나간 기색이었다.

도현과 몇 번 연기 연습을 하며, 충분히 놀랐다고 생각했는데 더 놀랄 게 남아 있었다.

이장혁은 그제야 아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도현이는 바이올린도, 그림도 잘 그리지만, 연기만큼은 아니야.

왜 그리 확언했는지.

- 연기하려고 태어났다 싶었다니까.

가벼운 웃음과 함께 뱉은 말이라 농담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젠 알았다.

그녀가 진심이었음을.

단순히 재능과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연기하는 도현은 사람을 빨아들였다. 붉다 못해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박 감독님이 도현이가 아주 마음에 들었나 봐. 나 이 방송국에 온 이래로 저렇게 웃으시는 건 몇 번 못 봤거든.”

도현의 촬영분이 끝나자,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처럼 허허 웃으며 다가온 박민호는 도현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들기며 칭찬했다.

도현의 아빠인 이장혁한테 와서까지 칭찬을 해주었을 정도였다.

이장혁의 시선이 아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현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엄청난 모습을 보이고선,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떠드는 도현의 모습에 이장혁은 결국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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