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한 여름, 폭풍 (3)
“있잖아! 나, 마지막에 카메라가 무섭지 않았어!”
세트장을 나오는 길.
아람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진짜 마법 같았어! 오빠가 괜찮다고 말하니까 진짜 괜찮아진 거 있지!”
도현이 생각하는 연기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나아가, 보는 이에게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람이 괜찮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건넨 말이 큰 위로가 된 것 같았다.
“다행이네.”
“응!”
“갈수록 점점 더 잘하더라.”
도현의 칭찬에 아람이 굉장히 뿌듯해했다.
도현은 몇 번 더 대화를 나누다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람의 엄마를 보았다.
그녀를 보는 도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안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정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이 있을 터였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식은땀을 흘리며 떠는 아람의 모습과 피를 흘리며 연주하는 형의 모습이 겹쳐 보인 이상, 안다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현은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아람아! 오늘 정말 잘했어!”
“헤헤, 그치?”
“봐봐. 하면 된다니까? 엄마가 그랬지?”
김경아는 무척이나 따뜻한 손길로 아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도현아, 너도 정말 잘하더라. 아줌마가 보면서 엄청 놀랐잖아.”
김경아가 보기에도 도현의 연기는 심상치 않았다. 외모 덕에 뽑힌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뛰어난 외모에 빛나는 재능.
그 앞날이 한없이 밝아 보이는 도현이었기에, 김경아는 미리 다리를 놓아두는 게 좋을 것이라 판단했다.
얼굴에 더욱 친절한 미소가 들어찼다.
“아주머니.”
도현이 나지막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 아무한테도?
뒤늦게 아람과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도현이 시선을 돌렸다. 아람이 땡그란 눈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끝내 한숨을 삼켰다.
“아니에요. 칭찬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아람이가 도현이 덕분에 평소보다 더 잘한 것 같은데, 내가 고마워해야지!”
김경아가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다. 무엇이 맞는지. 지금 이 분노가 정당한지. 약속을 깨고서라도 입을 열었어야 했는지.
그러나 도현의 눈에 밝게 웃는 아람이 들어왔다.
엄마 품에 안겨 웃는 아람은 행복해 보였다.
도현은 깨달았다.
이 일을 결정할 건 도현이 아니라, 아람이라는 사실을.
이장혁과 김경아는 몇 마디 덕담을 나누었다.
“이제 가 봐야겠네요.”
“그렇죠. 다음 촬영이 내일이니까 곧 다시 보겠네요. 아람아, 아저씨랑 오빠한테 인사하자.”
“안녕히 계세요!”
“하하, 그래. 아람이도 잘 가.”
“오빠도 안녕! 내일 봐!”
“그래, 안녕.”
도현이 아람에게 손을 흔들곤, 김경아에게도 인사했다.
두 사람이 멀어졌다.
“우리도 이제 가자.”
“네.”
도현이 이장혁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미리 켜두었는지, 자동차 안은 시원한 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엄마 데리러 가서 밖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자.”
“좋아요.”
그렇게 첫 촬영이 끝났다.
* * *
“네?”
젓가락이 삐끗했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의문이 들었지만, 서혜나의 표정이 진지했다.
“…진심이세요?”
웬만해서는 되묻지 않는 도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응. 이미 회의까지 다 한 내용이야.”
“제, 제가 모델을요? 그것도 엄마 아빠 회사의…?”
도현이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작년부터 키즈 라인을 새로 시작했거든. 이번에 가을에 나올 신상 제품 모델을 고민하다가, 우리 아들이 어떨까 싶어서 프로필 사진 찍었던 걸 보여주니까 다들 만장일치로 좋아하던데?”
“화보를 찍으면 사진이 어디에 쓰이는 건가요?”
“Marine 키즈 카테고리 배너랑 오프라인 매장, 그리고 브랜드 책자에 들어갈 거야.”
“매장은 몇 곳이나 있는데요?”
“판교역점, 강남점, 신사동점, 부산점, 대구점. 일단 따로 가진 오프라인 매장은 이 정도고 신해 백화점 패밀리 라인에 입점된 건….”
도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에 서혜나가 웃으며 말했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번에 프로필 사진 찍은 것처럼 한다고 생각하면 돼.”
부담을 가지지 않기에는 너무 큰일이었다.
그냥 모델이라고 해도 당황스러울 판에, 그 브랜드가 Marine면 더했다.
혹자는 부모님 회사니까 부담 없지 않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도현의 성격에는 더욱 부담이 가중될 뿐인 일이었다.
아.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혹시 제가 엄마 아빠 아들이어서 고른 건 아니에요?”
도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들 수 있는 의문이었다.
“도현아.”
“네.”
“엄마 아빠는 이 일에 평생을 걸었어. 여기까지 오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고. 엄마 아빠가 그런 식으로 일을 해왔으면 이렇게까지 크진 못했을 거야. 엄마는 우리 브랜드를 더 키울 수 있는 모델을 찾은 거야.”
그 말에서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그리고 아들인 것도 숨기고 사진 보여줬거든. 누구냐고, 빨리 잡아 오자고 하던데?”
이장혁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촬영하게 되면 저번에 촬영했던 스튜디오 있지? 거기서 하게 될 거야. 두 번째니까 부담도 덜하지 않을까?”
서혜나가 도현을 살살 꼬드겼다.
확실히 거기서 한다면 부담이 덜 될 것도 같….
‘안 돼!’
도현이 머리를 털었다.
순간 자연스럽게 넘어갈 뻔했다.
도현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차자, 이장혁이 큼, 헛기침했다.
“지금은 일단 미리 말해두는 거야, 도현아. 일단 촬영이 먼저니까, 내일 촬영 마치고 드라마 끝나면 천천히 고민해봐.”
그 말이 맞았다.
지금은 내일 있을 촬영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먼저였다.
결국, 도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그럼 밥 먹자, 이제!”
도현이 제 앞에 놓인 정갈한 반찬들을 보았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외식했던 한정식 집이었다.
옆에 놓인 따뜻한 국화차를 한 모금 삼키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담백한 두부 요리부터 생선 요리까지.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건강한 재료들이 입맛을 자극했다.
도현은 애써 방금 들은 이야기를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어내며, 내일 있을 촬영을 대비해 밥을 꼭꼭 씹었다.
그 와중에 잘 지은 밥이 참 찰지고 맛있었다.
* * *
촬영장에 도착한 도현은 낯선 분위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와 같은데, 달랐다.
도현은 사람들이 의식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임시로 펴놓은 의자에 앉은 남자가 대본을 읽고 있었다.
대본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이 강이든이구나.’
이십 대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던 배우.
앉은 자세는 발랐고 쭉 뻗은 다리는 길었다. 도현은 촬영장의 흐름이 저 남자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금방 깨달았다.
“어, 도현이 왔어?”
누군가 도현을 친근하게 불렀다.
푸근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민호 감독이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그래. 오늘도 훤칠하니 잘생겼네. 촬영장은 이제 익숙해졌고?”
“아직은 낯선 것 같아요.”
“금방 익숙해질 거야. 아, 강 배우한테 인사는 했어?”
“아직 못 했어요.”
“가자, 그럼.”
박민호 감독이 휘적휘적 앞장섰다.
도현은 정가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빠에게 말을 남긴 후, 감독을 따라갔다.
남자는 제 머리 위로 그늘이 졌는데도 태연히 대본을 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던 매니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든아, 감독님. 감독님!”
“아.”
“아, 가 아니라 일어나! 얼른!”
남자가 매니저의 재촉에 대본을 내리고 일어섰다. 키가 무척이나 커서 도현은 한참이나 고개를 위로 올려야 했다.
“박 감독님.”
건방지게 보일 법한데도, 박민호 감독은 허허, 사람 좋게 웃을 따름이었다.
“연습에 아주 집중했나 보네. 덥진 않고? 대기하는 데 힘들면 차 안에 들어가 있어도 되는데 말이야.”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다른 분들도 열심히 일하고 계시는데요.”
“강 배우는 정말 겸손하다니까. 아, 맞지. 여기 오늘 송하 역을 맡은 아역. 인사시켜 주려고 데려왔어.”
그 말에 강이든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가 시선을 내려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도현은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깔끔하다.
그게 도현이 받은 첫인상이었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시원하게 뻗은 얼굴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그러면서도 굵은 눈썹과 날카로운 턱선, 모양이 잘 잡힌 입술이 유약하게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송하 역에 이도현입니다.”
“강이든이야.”
그 한마디로 충분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럼 배우들끼리 얘기도 좀 나누고 그러고 있어!”
박민호 감독이 허허 웃다가 자리를 떴다.
도현은 멀뚱한 표정으로 강이든을 보았고 강이든도 무표정한 얼굴로 도현을 보았다.
매니저만 당황한 표정으로 그 사이에서 눈동자를 굴렸다.
한참의 침묵 후에,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리 비켜 드릴까요?”
자신 때문에 방해받고 있는 건가 싶어서 한 말이었다.
“상관없어.”
강이든이 다시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본을 드는 모양새가 정말 도현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는 것 같아 보였다.
“이든아! 그렇게 말하면 애가 어떻…!”
“그럼 가볼게요.”
“그래.”
도현이 매니저에게도 인사를 하고선 깔끔히 뒤를 돌았다.
매니저만이 허망한 눈으로 도현의 등을 쫓았다.
“강이든이랑 비슷한 놈이 있을 줄이야….”
그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내가 뭐.”
대본을 팔락이며 넘기던 강이든이 대꾸했다. 매니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가 뭐? 내가 뭐어? 아이고, 화상아! 내가 감독님이 오면 재깍재깍 일어나 인사하랬지!”
“했잖아.”
“했겠지. 어? 가만히 있었으면 아주 대본 끝까지 보고 나서 했겠지!”
강이든이 침묵했다.
그 침묵에서 긍정의 의미를 읽은 매니저가 뒷목을 잡았다.
어쩌다 이런 배우의 매니저가 된 건지….
그동안 겪은 고난과 시련을 말하자면 하루가 모자랐다. 누구든 그의 이야길 들으면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매니저가 속으로 제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강이든의 시선이 짧게 도현의 작은 등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 *
“도현아! 강이든 배우랑 무슨 대화를 나눈 거야!”
이장혁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냥 인사했어요.”
“인사?”
“네.”
“그것 말고 다른 말은 안 했고?”
“네, 딱히…. 별말 안 했어요.”
이장혁은 흥분이 조금 식은 기색이었다. 옆에서 정가현이 웃으며 말했다.
“박 감독님이 도현이를 진짜 좋게 봤나 봐. 감독님이 눈이 높기는 한데, 자기 기준치를 채운 사람들한테는 엄청 잘해주셔. 그리고 그중 하나가, 그 배우들을 서로 소개해주는 거거든.”
그냥 인사시켜 준 건 줄 알았는데,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구나.
도현이 박민호 감독에게 조금 감사함을 느꼈다.
그만큼 좋게 봐주었다는 뜻이니까.
정가현이 다시 자리를 뜨고, 도현이 대본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람이 도착했다.
도현이 아람과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낯빛을 확인했다.
아직까진 괜찮아 보였으나… 어제도 시작 전에는 멀쩡해 보였으니 또 모를 일이었다. 도현은 방심하지 않기로 했다.
“오빠, 강이든 배우님이야! 강이든 배우님!”
아람은 강이든의 팬인 것 같았다.
아람의 눈에 존경심과 선망이 깃들었다.
‘대단한 사람이구나.’
도현은 강이든을 다시 보았다.
조금 맹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들이 이리 반응하는 걸 보니 대단한 배우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단한 사람이랑 연기하는 거지, 오늘.’
그리 생각하니 기분 좋은 고조감이 일었다.
맥이나 애버리와 연기하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으나, 이건 또 새로운 기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자. 송하 역이랑 송아 역 준비하자!”
스태프가 도현과 아람을 데리러 왔다.
“도현아, 긴장하지 말고! 연습한 대로만 해!”
이장혁이 도현을 응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태프를 따라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