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96)화 (97/582)

제96화. 한 여름, 폭풍 (5)

강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저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손만 대면 환각이 떠오르는데, 제아무리 용을 쓴다고 해도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리가 있나?

문제는.

“아… 진짜.”

본 내용이, 그의 기억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강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송하와 그런 송하를 붙잡고 자신을 노려보는 송아를 보았다.

무시하자.

못 본 척하면 된다.

그가 이런 괴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걸 그 누가 알겠는가? 그만 아닌 척하면 될 일이었다.

될 일인데….

때마침 눈물 한 방울이 송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아아악!”

강이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아니, 애가 울 거면 소리 내서 엉엉 울든가, 왜 그렇게 얌전하게 울고 난리야!”

괜히 성질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 제풀에 지쳐 축 늘어졌다.

송하를 보는 두 눈이 퀭했다.

“진짜… 이제 진짜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진짜… 하.”

피곤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내가 그럼 그렇지, 뭐.”

얼굴에 해탈의 미소가 올라온 채였다.

“야, 꼬마야.”

강이 송하의 두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송하가 촉촉이 젖은 눈으로 강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아빠 많이 사랑하지?”

뜬금없는 말에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송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아빠도 너랑 네 동생 사랑하시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네?”

“야,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이혼 그거, 진짜 별거 아냐.”

송하의 두 눈이 토끼처럼 댕그랗게 커졌다.

“그, 그걸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나오는 의문을 싹둑 잘라버린 강이었다.

“형이 겪어봐서 아는데, 그냥 엄마 아빠가 따로 사는 것뿐이야. 어차피 너 크면 독립해서 살아야 되잖아. 예행연습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세요!”

“허.”

강이 헛웃음을 쳤다.

“꼬마야. 생각해봐. 만약 네가 엄마 아빠랑 멀리 떨어져서 오랫동안 못 봐. 그럼 너는 엄마 아빠를 안 사랑할 거야? 까맣게 잊고?”

움찔한 송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옆에 있는 껌딱지도 그렇지?”

송하의 팔을 잡고 있던 송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봐봐. 그럼 뭐가 문제야. 엄마 아빠는 너희가 사랑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사랑할 텐데. 좀 따로 사는 게 대수야?”

어느새 송하의 두 눈에 물기가 말라 있었다. 눈물이 그친 송하를 본 강이 씨익 웃었다.

“꼬마 주제에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용돈 두 번 받는다고 생각해.”

“저 용돈 안 받는데요.”

“크흠! 아무튼!”

강이 말을 돌리자 송하랑 송아가 키득키득 작게 웃었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

그리 말하며 두 아이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 흩트렸다. 아이들의 단정한 머리카락이 단숨에 엉망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계속 여기에 서 있을 거야? 부모님이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송하가 송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강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입술을 몇 번 움찔했다.

강은 인내심 있게 송하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집에 갈래요.”

아이의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 * *

“컷! 오케이!”

감독의 사인에 정가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순조로워도 되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촬영은 순조로웠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정가현이 도현과 강이든을 보았다.

리허설을 한 것도 아닐진대, 연기 합이 아주 척척 맞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두 배우 모두 대단하다고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정말 대단한 건 도현이지.’

‘그’ 강이든이다.

십 대부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려 끝내 최고의 남자 배우 타이틀을 거머쥔 배우였다.

그런 배우랑 연기하는데 합이 잘 맞는다는 건, 달리 말해 밀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숙련된 연기자와 미숙한 연기자가 같이 연기를 하면, 미숙한 연기자는 말려들 수밖에 없다. 연기도 결국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 작은 아이가 말려들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정가현이 슬쩍 시선을 돌려, 한구석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이장혁을 보았다.

이장혁은 정가현을 보고 몹시 고마워했지만, 정가현의 생각은 달랐다.

고마워해야 할 쪽은 도리어 이쪽이었다.

단순히 이 드라마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저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도 그랬다.

“저 애, 이 드라마가 처음이죠?”

“어디 나왔으면 이미 얘기가 나왔지 않을까요?”

“그러게요. 아직 어린데 연기력이….”

스태프들이 소곤거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현재 촬영장에서 강이든 다음으로 최고 이슈는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훗날, 아이가 계속 배우의 길을 간다면 이번 인연은 정가현에게 크게 이득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식사하고 합시다!”

밥때가 되자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제는 잠깐 촬영하고 간 거라 밥을 먹지 않아서 몰랐는데, 전문 케이터링 업체가 와서 준비해주는 것 같았다.

“도현아! 이리로 와!”

정가현이 도현을 불렀다.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던 도현이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도현이 그쪽으로 총총 걸어갔다. 아람과 함께 움직이다 보니, 김경아도 옆에 함께했다.

“여기서 밥 받고 저쪽 가서 먹자.”

정가현의 말에 따라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도토리묵, 탕수육, 해물파전, 설렁탕과 같은 밥류뿐만 아니라 과일도 세 종류나 있었다.

“밥 먹고 나면 저기 있지? 저기서 음료수 받아서 마셔. 강이든 배우님 팬클럽이 서포트해준 커피 차야.”

“서포트요?”

“응. 팬클럽에서 종종 자체적으로 모금을 해서 촬영장에 밥 차나 커피 차를 보내주거든.”

도현이 조금 신기한 눈으로 커피 차를 보았다.

이동형 가게처럼 되어 있는 커피 차는 천막에 응원 문구가 쓰여 있었고, 그 옆에 기다란 등신대에 편한 사복을 입은 강이든이 웃고 있었다.

정가현이 소리 낮춰 말했다.

“그리고 강이든 배우님이 워낙 단 걸 좋아해서, 단 음료도 많아.”

이건 참 유용한 정보였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집게로 적당히 먹을 만큼만 담던 도현이 아빠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밥 먹고 장소 이동할 거니까, 든든하게 먹어.”

“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탕수육을 포크로 쿡 찍었다.

소스에 절인 파인애플을 위에 올려 먹자 새콤 달달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도현이는 애가 어쩜 연기를 똑 부러지게 잘한대요?”

그들의 대화 내용은 두 아이였다.

“어제 아람이가 집에 와서 그렇게 도현이 칭찬을 하는 거 있죠?”

김경아의 말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아, 엄마! 그걸 왜 말해!”

아람이 얼굴을 붉히며 엄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머, 얘 왜 이래! 엄마 옷 늘어나!”

도현은 복잡했던 심정도 잠시 잊고, 이들과 어울려 웃음을 터트렸다.

점심을 먹은 후.

도현은 커피 차 앞에 섰다. 옆에는 아람과 함께였다.

“우리 왕자님이랑 공주님은 뭐 드릴까?”

커피 차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여성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복숭아 아이스티로 주세요.”

“저도요!”

도현이 말하자 아람이 냉큼 말을 얹었다.

“네~ 복숭아 아이스티 두 개~”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잔 두 개가 도현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감사합니다.”

도현이 잔을 받아 들고, 하나는 아람에게 쥐여 줄 때였다.

도현의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돌리자, 가장 먼저 긴 다리가 보였고 위로 시선을 옮기자 아까 전까지 내내 마주했던 얼굴이 보였다.

도현이 옆으로 비켜서자, 강이든이 태연한 얼굴로 복숭아 아이스티를 한 잔 시켰다.

시원한 물방울이 맺힌 아이스티를 받아 든 강이든이 도현을 쳐다보았다.

쪼옥.

빨대로 한 입 마신 강이든이 입을 열었다.

“연기 재밌게 하던데.”

“저도 재밌었어요.”

강이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말하는 것도 재밌네.”

도현이 조금 아리송한 표정으로 물었다.

“칭찬인가요?”

“아마도.”

“감사합니다.”

“그래.”

간단히 답한 강이든이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도 조금 긴장한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다른 이들은 도현을 마냥 칭찬하고 추켜세워 주었지만, 도현은 알았다.

자칫하면 잡아먹힐 뻔했다.

상대역에게 잡아먹힌다는 건, 흐름을 빼앗긴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내 배역이 오롯이 나의 뜻이 아니라, 상대의 의도에 의해서 흘러가게 된다.

‘아까 조금만 방심했으면 그렇게 됐을 거야.’

도현은 확신했다.

그만큼 강이든의 연기는 무척이나 자연스러웠고, 자연스러움을 넘어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어쩌면….

‘내가 버틴 게 아니라, 봐준 걸 수도 있고.’

확실히, 촬영 시작 전에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오를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눈빛.

조금 분했다.

사실 충격도 받았다.

그런데 저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묘한 호승심이 들었다.

지금은 그 끝에 미칠 수 없음을 안다.

도현의 얼굴에, 즐거움과 미약한 승부욕이 담긴 미소가 옅게 떠올랐다.

어느 정도까지 나아가면 닿을 수 있을지, 또 거기서 얼마나 더 나아가면 뛰어넘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현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강이든의 눈빛이 묘한 빛을 띠었다.

그때였다.

“배, 배우님!”

도현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아람이 목소리를 냈다.

강이든과 도현의 시선이 아람에게로 쏠렸다.

“저, 저! 사, 사진 하나, 아니, 한 장만 찌, 찍어….”

“아.”

강이든이 제 옆에 서 있는 매니저를 보았다.

매니저가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핸드폰이나 카메라 있니?”

“넷! 여기요!”

아람이 재빠른 동작으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 저기 배우님 옆에 가서 서면 찍어줄게. 이든아, 몸 좀 낮춰줘.”

“굳이.”

간단히 대답한 강이든이 한 팔로 아람을 들어 올렸다. 아람이 헛숨을 삼키는데, 강이든이 도현을 내려 보았다.

‘너도?’라는 시선이 담긴 눈이었다.

“전 괜찮아요.”

도현의 말에 강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메라 쪽을 보았다. 한 손에는 아람을 들고 한 손은 브이 자를 그린 채였다.

“자아, 찍는다. 김치~”

찰칵, 찰칵!

매니저가 열심히 두 사람을 찍어주었다.

다섯 번 정도 셔터음이 울린 후, 강이든이 아람을 보았다.

“더?”

“아, 아니요! 감사합니다!”

“그래.”

강이든이 아람을 내려주었다.

“자, 예쁘게 찍혔어.”

매니저가 아람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람은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강이든은 할 말을 끝냈는지, 별다른 말 없이 휘적휘적 멀어졌다.

그 뒤를 매니저가 빠르게 따라갔다.

아람은 멀어지는 강이든을 보다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다가, 다시 강이든을 보다가…. 아무튼,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사진을, 사진을 찍다니….”

그 반응에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아까부터 했던 생각을 물었다.

“팬인 거야?”

“응! 완전!”

그렇구나.

짐작하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욱 열렬해 보였다.

하긴, 꼬박꼬박 배우님을 붙여 말했을 뿐더러 강이든을 보는 아람의 눈이 심상치 않았더랬다. 도현이 납득했다.

“강이든 배우님이 나온 작품은 거의 다 봤어!”

“거의?”

“응. 두 개 빼고!”

“두 개는 왜 못 본 거야?”

“나이가 걸려서! 19금이었거든!”

아람이 해맑게 말했다.

“엄마가 못 보게 했지만, 몰래라도 꼭 보고 말 거야!”

아람이 의지를 불태우며 앙증맞은 주먹을 쥐었다. 그에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닐까….

말려보고 싶었지만, 워낙 의지에 불타는지라 도현은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주제는 빠르게 넘어갔다.

“학원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잔뜩 신이 난 아람이 눈을 빛내며 외쳤다.

도현은 그 후로, 아람의 팬심 섞인 찬양을 들어주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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