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한 여름, 폭풍 (6)
“거기, 반사판 조심해!”
“그건 저쪽 버스에다가 실어!”
점심시간이 모두 끝나고, 한차례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
드라마 촬영이란 게 어쩔 수 없이 장소 이동이 빈번한 작업이었다.
특히, <불량경찰>이 사전 제작을 거의 하지 않고 진행하는 드라마이니만큼 몰아서 촬영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어 더욱 이동이 잦았다.
스태프들의 능숙한 움직임으로 정돈이 빠르게 끝났다.
도현은 아람을 보았다.
아람과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람이 뺨을 밀어 올리며 배시시 웃었다.
“재밌게 하자!”
“그래.”
도현도 마주 웃었다.
그렇게,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여기야?”
강의 질문에 송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유, 집도 좋네. 꼬마야. 집에 돌아가면 이제부터 용돈 달라고 해.”
그리 말한 강이 지체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딸칵.
문이 열리고.
“누구세… 송하야! 송아야!”
현관문을 열던 여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디 갔었어! 응? 왜 말도 없이 집을 나가! 눈물 쏙 빠지게 혼날 줄 알아!”
큰 소리로 혼을 내던 여성이 떨리는 손으로 두 아이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어디,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송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송하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가, 울음을 참느라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앙다물며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여성이 두 아이를 양팔로 꽉 껴안았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눈물 젖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송하가 엄마의 오른 어깨에 턱을 기댔다. 얼굴은 울음을 참아내느라 잔뜩 붉어진 채였다.
엄마를 마주 껴안은 팔로 눈을 비비며 눈물을 닦아냈다.
“컷! 오케이!”
명쾌한 컷 사인이 울렸다.
두 아이의 엄마 역할을 맡았던 정은희가 도현을 보며 웃었다.
“아니, 애 얼굴을 딱 보는데, 진짜 집 나간 자식 보는 것처럼 울컥해지더라니까.”
정은희는 도현과 아람이 무척이나 귀여운 눈치였다.
“내 아들도 딱 이렇게만 크면 좋을 텐데.”
“아들이 있으세요?”
“응. 이제 세 살 된 애기야.”
정은희는 몇 번이고 도현처럼만 컸으면 좋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런 유의 칭찬은 또 처음이라, 도현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곧바로 다음 장면 찍습니다!”
그 말에 도현은 스태프가 알려주는 자리에 가서 섰다. 강이든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도현은 빤히 쳐다보는 강이든과 시선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할 건 연기뿐이었으니까.
“레디, 액션!”
신호가 떨어지자, 무덤덤했던 강이든의 낯빛이, 머쓱해하는 그것으로 변했다.
“아, 괜찮아요. 별일 아닌데요.”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정은희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였다. 강은 그에 어쩔 줄 몰라서 뒷목을 벅벅 긁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마주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엄마의 손을 잡은 송하가 보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던 송하가 입을 열었다.
“저… 형.”
허리를 숙이고 있던 강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의 허리가 채 펴지기 전에 송하가 푹,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반질반질한 정수리를 보던 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애가 인사는 무슨.”
강이 송하의 정수리 위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가출하지 말고. 할 수 있지?”
“네!”
“그래, 착하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비빈 손이 떨어졌다.
“어떻게, 먹을 거라도….”
“아아, 괜찮아요. 이제 곧 교대 시간이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 인사를 주고받은 강이, 허리를 한번 숙였다 펴며 문을 열고 나갔다.
송하는 엄마의 손을 잡은 채 그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엄마를 올려 보았다.
울었던 탓에 조금 붉어진 눈가와 뺨을 하고선, 눈꼬리를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컷! 오케이!”
깔끔하게 오케이 사인이 났다.
이로써, 도현의 촬영분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끝난 건 도현과 아람뿐이라, 촬영장은 여전히 바쁘게 굴러갔다.
도현이 조금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촬영장을 보다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였다.
“도현아!”
도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민호 감독이었다.
“감독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딱딱하게 감사는 무슨. 다시 안 볼 것처럼 말하지 말고. 다음에도 또 내 작품에 출연해야지!”
박민호 감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게 예의상 건넨 말이라고 생각한 도현도 마주 웃으며, 기회가 되면 그리하겠다고 말했다.
“촬영이 바빠서 더 얘기를 못 하겠네. 이거 1화 방영되면 아주 난리 날 거야. 여기저기서 노려도, 내가 일 순위다. 알았지?”
“하하…. 네.”
“그래, 그래. 좋아. 그동안 수고했다.”
박민호 감독이 도현의 어깨를 툭툭 치고선, 덕담 몇 마디를 늘어놓은 후, 다시 촬영장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정가현을 비롯하여 많은 스태프들이 도현에게 잘 가라고 인사해 주었다.
아역이고, 단역에 불과한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사람들에 도현은 진심으로 감사해하며 인사했다.
그런 도현의 옆으로 이장혁이 다가왔다.
“이제 집으로 가자.”
“네… 아, 잠시만요.”
도현의 눈이 아람을 찾았다.
아람도 옷을 모두 갈아입고 집에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아람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아람이랑? 그래. 어차피 인사도 해야 했으니까.”
이장혁이 순순히 도현을 따라 아람과 김경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오빠!”
아람이 먼저 도현을 발견했다.
“아. 도현이 아빠. 도현이 아빠랑 도현이도 수고했어요.”
“하하, 네. 이렇게 끝나니 제가 다 시원섭섭하네요. 아, 도현이가 아람이랑 할 말이 있다던데….”
“아람이랑요?”
김경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도현을 보았다.
“네. 잠깐 저기 가서 얘기해도 될까요?”
도현이 가리킨 곳은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그러니?”
도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람이랑 제 비밀이에요.”
“비밀? 호호호!”
김경아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여기서 기다릴 테니 이야기하고 오라고 말했다.
도현이 아람의 손을 붙잡고 자리를 옮겼다.
“무슨 얘긴데?”
아람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이장혁과 김경아를 확인했다. 두 사람은 이쪽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는 중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라면 대화가 들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현이 아람을 보았다.
이제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사이였다. 그러니까 말하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도현은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아람을 불렀다.
“아람아.”
“웅?”
“저번에, 오디션 날 하기 싫다고 했잖아.”
도현의 말에 아람이 멈칫했다.
“지금도 그래?”
“음….”
아람의 표정이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빠졌다.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고?”
“응.”
아람이 고개를 주억였다.
“처음에는 엄청 재밌었어. 카메라로 찍는 것도 즐겁고, 내가 티브이에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 엄마도 칭찬해 주니까.”
도현이 가만히 경청했다.
“근데 갈수록… 같이 학원 다니는 친구랑 경쟁해서 누구는 합격하고 누구는 떨어지고, 주변 사람들도 나랑 다른 애들을 비교하고….”
아람의 얼굴이 의기소침해졌다.
“엄마가 소희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힘들었어. 소희는 친한 친군데…. 근데 카메라 앞에 서려면 원래 그래야 된대.”
도현은 아람의 말뜻을 이해했다.
아람이 카메라를 무서워하게 된 이유도 어렴풋하지만, 알 것 같았다.
아람은 연기가 싫은 게 아니었다. 카메라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 일찍 발을 디뎌야 했던 사회가 벅찬 거였다.
그것을 모르니, 단순히 카메라가 무섭고 연기가 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근데 왜 잘 모르겠다고 말한 거야?”
“그게… 어제랑 오늘은 재밌었거든.”
시무룩해졌던 아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맨날 언제 끝날까 생각밖에 없었는데, 어제는 계속하고 싶을 만큼 재밌었어. 오늘도! 오빠 말대로 정말 소꿉놀이하는 기분이었어!”
아람이 밝은 목소리로 조잘댔다.
도현이 조금 당황한 채로 눈을 깜빡이며 아람이 하는 말을 들었다.
“계속 오늘 같았으면 좋겠어! 그래서 끝나서 너무너무 아쉬워!”
은혜가 떠올라 말한 소꿉놀이가 아람이 느끼고 있던 부담감을 덜어준 것 같았다.
놀이는 누군가랑 비교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니까.
도현은 가만히 아람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람은 연기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즐거워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아람아, 나한테 말한 거 엄마한테 말할 수 있겠어?”
“엄마한테?”
“응.”
아람이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순한 눈매가 아래로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시잖아. 솔직하게 말하면, 네 말처럼 계속 오늘 같아질 수도 있어.”
도현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현이 믿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도현이 믿는 건 김경아의 눈에 어렸던 온기였다. 도저히 거짓으로 치부할 수 없는 확연한 애정이었다.
도현이 아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아람이 솔직하게 말하면 감싸 안고 보듬어줄 거라고 믿는 것이었다.
아람이 말한 문제는 어쩌면 김경아의 말대로 어쩔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물살에 밀려 맨몸으로 받아내는 것과 누군가의 그늘과 보호 아래서 받는 것은 다를 터였다.
“계속 오늘처럼?”
“응.”
“으음….”
아람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동요하는 모습에 도현은 굳이 강요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아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꼭 지금 정할 필요는 없어. 네가 그러고 싶어지면, 그때 해도 돼.”
“…응, 알았어.”
아람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고민의 기색이 차오른 채였다.
이 이상 말을 얹는 건, 또 하나의 강압에 불과했다.
때문에, 도현은 아람이 홀로 생각할 수 있도록 화두만 던지기로 했다.
“이제 돌아가자. 엄마 기다리신다.”
“오빠.”
“응?”
“오빠는 연기가 좋아서 하는 거야?”
“응.”
도현의 대답은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왔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도현의 사정을 모르는 아람이 보았을 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수 있었다. 혹은, 너무 뻔해서 별다른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람은 도현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틀 동안 도현과 함께하며 믿음과 호감이 수직 상승한 탓이었다.
도현과 아람이 돌아와서, 네 사람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인사와 함께 갈라졌다.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람은 엄마를 올려다보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단단한 눈을 했다.
“우리도 돌아가자.”
두 사람을 배웅하던 이장혁이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마지막으로 촬영 중인 강이든을 보았다.
그가 바빠서 마지막 인사는 하지 못했지만….
‘다시 만나겠지.’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얼마가 지난 후든, 저 사람은 계속 저곳에 있을 테니까.
“가요.”
도현이 발걸음을 뗐다.
그렇게, 작은 아이의 발걸음에서부터 여름의 폭풍이 시작될 조짐이 생겨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