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한 여름, 폭풍 (7)
“도착했다!”
제주도 공항.
그곳에 도착한 서혜나가 신이 나서 외쳤다.
지난날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났다.
그동안 집에만 있어서 얼마나 미안했던가?
휴가를 낼 수 있는데도 아이가 바빠 놀러 가지 못한 게 몇 번이었던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시간이 없다며 공원보다 먼 곳은 조금도 가려 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성실하기도 하지.’
서혜나가 잠깐 삼천포에 빠졌다가 되돌아왔다.
아무튼!
이제야 드디어 그 한을 풀 수 있었다.
서혜나는 가벼운 여름용 홀터넥 드레스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이장혁은 얇은 반팔 셔츠에 기장감 있는 오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은.
하얀 4부 바지에 야자수가 그려진 현란한 반팔을 풀어 헤치고, 흰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쓰고 있었다.
서혜나는 자신의 작품에 몹시 만족해하며, 신상으로 바꾼 카메라를 들어 연사했다. 공항을 배경으로 찍으니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아 찍는 맛이 있었다.
차차차차차차차찰칵!
도현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서혜나가 찍기 편하도록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기까지 했다.
그렇게 서혜나가 만족할 만큼 찍고 나서야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예약한 풀빌라 펜션이었다.
길을 제외하고는 풀과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었는데, 펜션에 도착해서 보니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그런 장관이 또 없었다.
건물의 한쪽 면은 모두 유리로 되어 있었고 바다가 보이는 쪽에는 적당한 크기의 수영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쪽에는 바다를 보며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뷰 되게 예쁘다.”
“그러게.”
이장혁과 서혜나가 감탄했다.
집 구경도 잠시.
“나가자!”
“그래!”
“네!”
할 게 많았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장혁이 렌트한 차의 운전석에 앉아, 뚜껑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곧장 머리 위로 쏟아졌다.
빵빵한 음악까지 트니, 흥이 절로 올랐다.
도현도 이 순간만큼은 걱정을 잊고 즐기기로 했다. ‘그동안 잘 참았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보상 심리도 있었다.
차는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와아….”
도현이 입을 벌렸다.
“협재 해수욕장이 에메랄드빛 바다로 유명하거든. 어때?”
“너무 예뻐요!”
도현은 진심이었다.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치면 라호야코브 해변이 한 수 위였다.
그러나 협재 해수욕장의 바다 빛깔은 도현이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한 달 만에 바다 냄새를 맡으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돗자리 여기에 펼까?”
“조금만 더 앞쪽에 펴자. 바다 잘 보이게.”
서혜나랑 이장혁이 돗자리를 펴고, 햇볕에 따갑지 않도록 그늘막까지 설치했다. 공원을 다닌 경험 덕분인지, 그 과정이 무척이나 신속하고 능숙했다.
짐들을 돗자리에 올려놓은 후, 세 가족은 나란히 해변을 따라 걸었다.
오늘따라 하늘도 선명한 푸른빛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물이 아주 맑아 투명해 보일 지경이었다.
“신기하네. 바다 색깔이 어떻게 초록색이지?”
이장혁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현이 바다를 잠잠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면, 수심이 얕고 아래 모래가 보이는 부분만 초록빛을 띠고 있어요.”
“어? 정말이네?”
얕을수록 초록빛이 돌고, 바다가 깊어질수록 파란색이 진해졌다.
이장혁이 신기해하고 있는데 도현이 말을 이었다.
“바다는 원래 투명한 물이잖아요.”
“응? 응, 그렇지.”
“우리 눈에 파랗게 보이는 이유는 바다가 빛의 색 중에서 파란색을 반사하기 때문이고요. 반대로 깊은 바다가 어두워 보이는 건 빛이 반사되지 못해서죠. 그러면 수심이 얕은 곳만 초록빛을 띤다는 건, 아마 빛이 바닷물뿐만 아니라 바닥에 있는 모래까지 반사해서 색이 섞이는 게 아닐까요?”
“어어… 그래, 마, 맞는 것 같아.”
이장혁이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자, 서혜나가 거 보라는 듯이 말했다.
“도현이가 우리보다 똑똑하다니까.”
“그러게.”
도현이 조금 민망해하며 뺨을 긁었다.
세 사람은 느긋하게 해변가를 거닐었다.
원래는 수영할까 생각도 했는데, 곧바로 밥을 먹으러 가면 불편할 것 같아 눈으로만 구경하기로 했다.
한 바퀴 뱅 돈 후 자리로 돌아와서 잠시 경치를 감상했다.
“벌써 한국에 온 지도 한 달이나 지났네.”
그 말에 도현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루빨리 샌디에고에 돌아가고 싶었던 게 언제냐는 듯이, 하루하루에 집중하며 충실하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남은 시간도 열심히 놀자.”
“일단, 이번 여행부터 뽕을 뽑아야지.”
도현보다 더 신난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점심은 근방에서 유명하다는 전복 전문점으로 갔다. 도현이 먹은 건 전복해물비빔밥이었다.
간단한 음식 같았는데, 소스를 어떻게 만든 것인지 감칠맛이 나 입에 쫙쫙 붙는 맛이었다.
“도현아, 맛있어?”
“네!”
찹찹 잘도 먹는 아들에 두 사람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제 그릇에 있는 전복을 덜어 주었다.
“어, 저 괜찮은데….”
“아빠는 도현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불러. 봐봐. 배 나온 거.”
“당신 살 좀 빼야겠네.”
“…진짜?”
이장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서혜나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거짓말이야! 당신이 뱃살이 어딨어. 매일 운동하는데.”
그 말은 진짜였다.
서혜나와 이장혁은 자기 관리에 아주 철저해서, 매일같이 운동을 통해 몸매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군살이 생길 리가 없었다.
도현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저도 운동할까요?”
샌디에고에 있을 때, 운동이랍시고 달리기를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건 운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가까웠다. 몸을 힘들게 해서 생각을 털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운동? 아직 이르지 않을까?”
서혜나의 염려 섞인 반응에, 이장혁이 입을 열었다.
“괜찮지 않을까?”
“응?”
“운동하면 더 건강해질 거 아니야.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가벼운 운동 정도라면 상관없지 않을까? 병원에서도 그러라고 했고.”
“그래…. 그건 맞지.”
서혜나가 한숨을 쉬었다.
안 그러려고 하는데, 도현이 관련된 일만 되면 자꾸만 과보호하려고 해서 문제였다.
“그럼 무슨 운동을 하지?”
세 사람이 골몰했다.
한 달 후면 미국으로 돌아가니, 학원을 다니기에는 애매했다.
“도현이가 맨날 6시에 일어나지?”
“네.”
“그럼 아침에 조깅하면 되겠네!”
“어, 정말!”
서혜나랑 이장혁은 회사가 가까워서 도현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 시간을 허송세월로 보내지 않고 조깅하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조깅을 시작하기로 약속했다.
점심이라기엔 조금 늦어, 애매한 점심을 먹은 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승마장이었다.
“제주도에 오면 말이지!”
서혜나의 말에 이장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여행은 도현이 최대한 많은 것을 체험하고 접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짰다. 아이에게 못 해준 시간만큼,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신기한 눈으로 초원을 구경했다. 말 몇 마리가 여유롭게 기다란 통에 머리를 대고 무언갈 먹고 있었다.
초원을 자유롭게 거니는 말들도 보였다. 초록빛 들판과 그 너머의 태양, 그리고 한가한 말들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이들이 찾은 승마장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네. 서혜나 이름으로 예약했어요.”
“아, 네. 잘 오셨어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직원이 친절하게 웃으며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전 장비와 승마에 대한 설명, 그리고 코스가 그려진 지도가 보였다.
“체험은 세 분 다 하시는 거죠?”
“네.”
서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한 건, 보호구 착용이었다. 도현은 헬멧을 쓰기 위해 야구 모자를 벗어야 했다.
다시 밖으로 나오자 승마 코치가 말을 타는 방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앞에서 자세를 시범해서 세 사람도 어정쩡하게 그 자세를 따라 하다가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도현의 앞에 윤기가 흐르는 말이 도착했다.
코치가 웃으며 말했다.
“그놈이 우리 승마장에서 제일 잘생긴 놈이야.”
과연. 털 색깔부터 범상치 않다 싶었다.
도현이 홀린 듯이 말을 보았다.
가까이서 본 말은 생각보다 더 위압적이었고, 커다랬으며, 멋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매끄러운 근육이 드러나는 모습은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었다.
“자, 먼저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칭찬해줘. 조랭이가 똑똑해서, 자기 칭찬은 귀신같이 알아들어.”
도현은 그의 말대로 손을 뻗어 목덜미를 쓸었다. 브로콜리를 만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안녕, 조랭아. 잘 부탁해.”
어쩐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허허, 조랭이도 도련님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말 위에 올라타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코치가 도와준 덕도 있었고 조랭이가 생각보다 너무 얌전한 덕도 있었다.
말을 타는 건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말의 튼튼한 근육이 느껴져서 묘하게 불편한 반면, 순하게 제 등을 내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도현이 갈기를 살짝 만질 때였다.
“도현아! 여기 봐!”
찰칵!
어김없이 사진이 찍혔다.
“자, 자. 부모님들도 타셔야죠.”
“아, 맞다. 그랬죠.”
서혜나가 하하, 웃으며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카메라 주시면 이따가 제가 찍어 드릴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서혜나가 확 밝아진 얼굴로 카메라를 냉큼 넘겼다.
그렇게 부부도 말 위에 올라타는 데 성공했다.
코치가 도현의 옆으로 다가와 줄을 잡았다. 그러자 말 위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이장혁이 물었다.
“저…. 저희는 줄 안 잡아 주시나요?”
“아, 성인분들은 따로 에스코트하거나 하지 않아요. 애들이 교육이 잘된 말들이라 얌전하기도 하고, 성인분들은 에스코트하면 답답하다고 싫어하시거든요. 그리고 제가 중간중간 뒤돌아보면서 확인할 거라,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 네. 좋네요.”
이장혁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앞에 아들이 있는데,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었다.
“출발합니다.”
따각. 따각.
멈춰 있던 말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현이 탄 말을 필두로, 서혜나와 이장혁의 말이 따라왔다.
저녁 시간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해가 점점 저무는 게 보였다.
승마 코스는 30분짜리 코스였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점점 붉게 변해갔다.
넓게 펼쳐진 들판과 그 끝에서 저물어가는 노을의 광경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와아….”
도현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저기 좀 보세요, 엄청 예쁘….”
도현이 뒤를 돌아보며 말하다가 멈칫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도현은 부모님이 내내 그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도현이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왠지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정말 예쁘네!”
서혜나가 맞장구치며 활짝 웃었다.
“가족이 참 사이가 좋네요. 여기가 제일 멋진 뷰인데, 사진 한 장 찍어 드릴까요?”
“좋죠!”
코치가 말들의 줄을 이끌어 적당한 자리에 세웠다. 도현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었다.
“셋 둘 하나 하면 찍습니다. 셋, 둘, 하나!”
찰칵!
노을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세 사람이 사진에 담겼다.
“잘 찍혔어요. 이제 다시 출발합니다.”
조랭이가 투레질을 한번 하더니, 줄을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갔다. 도현이 팔을 뻗어 말갈기를 한번 쓰다듬었다.
도착 지점에 다다랐을 때는 멀미가 가라앉은 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