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00)화 (101/582)

제100화. 한 여름, 폭풍 (9)

그 후 며칠이 지났다.

리암과 다시 한번 통화해서 세세한 설명을 들었고, 이에 맞춰 이탈리아에 갈 계획도 세웠다.

“푸흐….”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다시 생각하니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가항력이었다.

‘아냐, 이럴 때가 아니지.’

도현이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는, 파티 날로 되돌아간다.

- 우리 도현이 이제 슈퍼스타 되는 일만 남았네!

- 그러게. 나중에는 너무 유명해져서 모델로 데려오기도 어려워지는 거 아니야?

- 아, 맞다! 모델! 그게 있었지!

그때는 모두 기분에 취한 상태였다.

- 도현아! 모델 건 생각해봤어?

- …아!

도현은 잊고 있었던 것을 그제야 다시 떠올렸다.

-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응?

서혜나와 이장혁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리고 한창 기분이 좋아져 있던 도현은.

- 좋아요! 할게요!

훗날을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렸다.

“하하…. 다시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니었네.”

도현이 태연한 얼굴로 과거의 자신을 깎아내렸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한 말이든 아니든 이미 엎질러진 물.

도현은 제주도에서 돌아온 후부터, 집에 잔뜩 쌓여 있는 패션 잡지를 뒤적거리며 나름의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기분에 밀려 대답했다지만, 패션 브랜드에는 간판이나 다름없는 모델을, 그것도 부모님의 브랜드 모델을 하는데 허술하게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다 보니 재밌기도 하고.’

도현이 생각하기에 모델과 배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상과 사진이라는 점이었다.

영상에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그 변화로 다양한 것을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진에는 정지된 하나의 순간만이 담긴다.

잡지에 실린 모델들은 그 한순간을 몸짓과 눈빛으로 표현하며 보는 이를 사로잡고 있었다.

때로는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패션 잡지를 보는 건 의외로 연기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도현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다시 잡지에 푹 빠져들었다.

* * *

‘여기에 두 번이나 오게 될 줄이야.’

도현은 미묘한 기분으로 스튜디오를 둘러보았다.

사진작가와 스타일리스트만 와서 휑했던 저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힐끔, 힐끔.

스태프들의 시선이 도현을 향했다.

‘그’ 대표님들의 아들인 데다가 어린데 미모가 심상치 않았다. 시선이 안 쏠릴 수가 없었다.

“잠깐 고개 가만히!”

“네.”

톡톡.

도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솜이 두드려졌다.

도현은 지금 한창 메이크업을 받는 중이었다.

“피부는 뽀야니 할 것도 없네. 눈썹 조금만 다듬을게.”

“네.”

이것도 경험이 쌓여 그런가, 저번보다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할 게 없다면서, 얼굴 위를 오가는 손길은 분주하기만 했다.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박하준은 흐뭇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워낙 화려한 인상이라 손을 대도 변하는 게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선이 깔끔하고 단정해서 휙휙 변하는 맛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속눈썹!

인조 속눈썹을 가져와 붙인다고 해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속눈썹이 모든 메이크업의 정점을 찍었다.

오늘 촬영은 두 가지 콘셉트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첫 번째로 심플함과 고급스러움을 중점으로 둔 단색 위주의 촬영을 한 후, 두 번째로 캐주얼함과 비비드함을 담은 컬러풀한 색 위주의 촬영이 이어질 거였다.

헤어 젤을 손에 펴 발라 머리카락을 고정한 박하준이 말했다.

“자, 됐다!”

저번에 했던 헤어스타일과 비슷한 듯 달랐다.

기본적으로 가르마를 넘기는 쉼표 머리였으나, 프로필 촬영 때와 다르게 곱슬거리는 볼륨감을 적게 주고 깔끔함을 강조했다.

왼쪽 눈썹은 살짝 휜 머리카락에 덮이고, 오른쪽 눈썹은 시원하게 드러나는 스타일이었다.

박하준은 자신의 작품에 감탄했다.

어딜 보나, 모로 보나 귀한 집 도련님이었다. 집사가 벤츠라도 끌고 나타날 것 같은 귀티가 좔좔 흐르고 있었다.

여전히 도현의 입술을 톡톡, 하며 색을 더하고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정도면 거의 예술이었다.

도현은 스태프의 인도에 따라 옷을 들고 가 갈아입고 나왔다.

얇은 회색 목 폴라에 톤 다운된 회색 체크무늬 바지 그리고 가을에 입기 적당한 두께감의 검은 코트였다.

도현이 입고 나오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이인데, 이렇게 꾸며놓고 보니 날카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너 따위가 감히 나한테 말을 걸어?’라고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도현이 알았다면 기겁했을 생각이었다.

“옷이 모델 덕을 보네.”

이 모든 과정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고 있던 이장혁이 말했다. 브랜드 대표가 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말이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현의 모습을 확인하던 정은주가, 갑자기 작게 웃더니 말했다.

“또 같이 촬영하자고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에요.”

그 말에 도현은 조금 겸연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당시에는 불타는 기세에 밀려 답했지만, 내심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때는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이곳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다 보니 세상의 진리를 하나 깨우친 도현이었다.

“오늘 촬영할 세트장은 여기야.”

텅 비었던 저번과 달리, 무언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통유리로 된 벽면에는 얇아서 속이 비치는 하얀 커튼이 달려 있었고 그 앞에는 깔끔한 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불규칙적으로 책과 화병이 올라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저번에 해봤으니까 알죠? 오늘은 이거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그때는 도현이 돋보여야 했다면, 이번에는 옷이 돋보여야 한다는 거.”

“네, 기억할게요.”

안 그래도 이와 관련해서 엄마 아빠한테 설명을 들었다.

패션모델은 결국,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해 옷을 사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렇다고 무조건 옷만 돋보이면 안 된다. 런웨이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화보는 아니었다.

모델에 이끌려서이든, 옷에 이끌려서이든 사고 싶은 충동을 들게끔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도현은 세트장에 가서 섰다.

사람들 앞에서 자세를 잡고 사진을 찍는다는 게 부담스러울 법도 했지만… 생각보다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엄마 덕분인가?’

뜬금없이 든 생각에 도현이 작게 웃으며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촬영에 집중할 때였다.

“준비됐어요?”

정은주가 카메라를 잡으며 물었다.

도현이 패션 잡지를 보고 공부하며 느낀 것이 있었다.

애써 이들의 방식을 따라가려고 할 필요 없이 도현은 도현만의 방식으로 연기하면 된다는 것을.

도현은 상황을 설정했다.

여기는 집이었고, 도현은 굉장히 돈 많고 차가운 성격의 도련님이었다. 엄한 집에서 자라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기품이 있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쯤은 거만할지도 몰랐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준비됐어요.”

“좋아.”

찰칵, 찰칵, 찰칵!

곧바로 셔터음이 연신 울리기 시작했다.

도현은 셔터 소리에 놀라지 않고, 카메라 렌즈를 무심히 응시했다.

한쪽으로 기울여 조금 치켜 올라간 턱과 내려 보는 눈동자에서 언뜻 당당함과 오만함을 품고 있었다.

“와… 진짜 잘하네.”

도현의 촬영을 보고 있던 박하준이 감탄했다. 그에 주변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애가 눈빛이 장난 아니네요. 뭔가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아.”

누군가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반 토막이나 올까 싶은 어린아이였는데 막상 앞에서 마주치면 이쪽이 기가 죽을 것 같았다.

그만큼 지금 도현은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도현이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스듬히 자세를 취했다.

“천상 연예인이네, 천상 연예인이야.”

박하준이 혀를 찼다.

자세를 잡는 게 자연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저 당당함이었다.

연예인들도 초짜는 이런 상황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위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어린아이라면 말 끝난 거였다.

애가 위축되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고 칭찬해가며 찍어야 좋은 사진 한 장 간신히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도현은, 분명 모델 일이 처음일 텐데도 조금의 주저함 없이 당당히 자세를 잡고 있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잠깐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도현이 다시 촬영을 진행했다.

아까와 다르게 남색의 오부 바지 안에 흰 반팔을 넣어 입고 그 위에 검은색 재킷을 걸쳤다.

종아리의 반절을 덮는 하얀 양말과 검은 로퍼가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이번에 도현은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아 책을 펼쳤다.

찰칵! 찰칵! 찰칵!

정은주는 신이 나서 셔터를 눌렀다.

도현이 다양하게 자세를 바꾸는데 그 자세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드니, 찍는 게 흥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도현이 책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러고선 커튼을 한 손으로 가볍게 집고는 몸을 비스듬히 돌려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빛이 투과하는 커튼과 그 커튼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도현의 조화는 완벽 그 자체였다.

찰칵!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카메라음이 따라붙었다.

몇 번의 촬영을 더 한 후.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도현아, 많이 힘들어?”

서혜나가 시원한 주스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도현이 주스를 받고 감사하다고 인사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하긴. 우리 아들이 누구야.”

도현은 생략된 뒷말을 알 것 같았다. 대충 ‘슈퍼스타가 될 몸인데’ 정도가 아닐까?

물론, 서혜나와 이장혁이 도현이 정말 슈퍼스타가 되길 바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인데, 그깟 영화제고 스타가 대수인가.

다만, 이렇게 말할 때마다.

푸슬푸슬.

반사적으로 표정이 풀리는 도현이 너무 귀여운 탓이었다.

물론 언제나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었지만, 대체 모자란 부분이 뭔지 침착함까지 갖춘 탓에 다양한 표정을 보기가 어려웠다.

전보다 웃는 횟수가 늘긴 했지만, 그것도 활짝 웃는 얼굴은 드물었다.

그러니, 자꾸만 얘기를 꺼낼 수밖에.

도현이 기분 나빠한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딱 봐도 기뻐하고 있지 않은가.

엄마 좋고 아들 좋은 일이 바로 이런 거였다.

서혜나가 긍정 회로를 돌렸다.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도현은 새로 메이크업을 받았다.

“도현이가 쿨톤이긴 한데, 하얘서 웬만한 색상은 다 잘 받거든. 피부 톤만 조금 보정하고 이번에는 조금 따뜻한 계열로 메이크업을 할 거야.”

박하준의 설명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도현은 눈 감고 얼굴을 맡기는 게 전부였으니, 뭐라 얹을 말도 없었다.

삭삭- 삭삭-

얼굴 위로 붓이 지나가는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눈 뜨면 안 돼!”

“네.”

도현은 감은 눈에 꾹 힘을 주었다.

“힘주지는 말고.”

“네.”

이번에는 느슨하게 힘을 풀었다.

얼굴 이곳저곳을 왔다 갔다 하는 감각에 간지러움을 참으며 얼마나 있었을까.

“눈 떠봐, 도현아.”

박하준의 말에 도현이 눈을 떴다.

“어….”

도현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했던 메이크업은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색조가 사용되었다.

도현이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양 뺨에 복숭앗빛이 감도는 코랄색이 옅게 칠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검고 진했던 눈썹과 속눈썹이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조금 밝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작은 차이처럼 보였지만, 그 차이가 가져온 변화는 굉장히 컸다.

매끄러운 이목구비와 하얀 피부에 평소에도 조금 차가워 보였던 도현의 인상이 한층 누그러져 쾌활하고 생기 넘치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스슥. 슥.

박하준의 손이 도현의 머리카락을 오갔다. 고데기의 따뜻한 열이 머리를 통해 느껴졌다.

잠시 후.

이마를 전부 덮은 앞머리에 굵은 컬이 들어갔다. 머리의 양옆도 컬을 넣어 위로 띄워, 언뜻 부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느낌이 어떻게 이렇게 변하지?”

스태프 한 명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만큼 방금 전의 도현과 지금의 도현은 완전히 달라 보였다.

물론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생각보다 사람의 이미지를 좌지우지하는 데는 분위기가 큰 역할을 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크으. 꾸미는 보람이 있다니까.”

박하준이 만족스러움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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