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01)화 (102/582)

제101화. 한 여름, 폭풍 (10)

두 번째 세트장은 깔끔했던 첫 번째 세트장과 달리,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곳곳에 게임기가 놓여 있었고, 체크무늬가 그려진 소파 위에는 인형과 공이 굴러다녔다.

전체적으로 나만의 아지트 같은 느낌이었다.

도현은 촬영 시작 전 소품들을 꼼꼼히 눈여겨보았다. 패션 잡지를 공부한 게 이런 데에서도 도움이 됐다.

각 소품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생각을 마친 도현이 또 한번 새로운 캐릭터 설정을 짰다.

활동적이고, 장난기 많으면서도 쾌활한. 아마도 스포츠를 좋아하는 아이. 짓궂을 때도 있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성격의….

설정을 늘어놓던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이거 그냥 니키 아닌가?’

두어 번 더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시작해도 되겠니?”

“네.”

도현이 웃음기를 띤 목소리로 답했다.

이번 촬영은 아주 재밌을 것 같았다.

초록색 프린팅이 되어 있는 두께감 있는 노란색 후드티에 흑청바지를 입은 도현이 소파 위로 길게 늘어졌다.

제집인 양 편안해 보이는 자세였다.

도현이 주변에 놓인 게임기 중 보라색 게임기를 들어 올렸다. 진짜 게임이라도 하는 듯 집중하는 표정이었다.

‘배우라더니.’

도현을 찍던 정은주가 생각했다.

‘확실히, 표정이 자연스럽네. 콘셉트도 잘 와닿고.’

표정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성격이 드러났다.

어린아이를 모델로 찍은 경험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지도 않았다.

저만한 모델을 찾기 힘들 거란 것 정도는 알았다.

그 어떤 아이가 콘셉트에 맞춰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분위기 변화를 줄 수 있을까?

도현이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어 다른 이들은 감탄만 하고 넘어가지만,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정은주만이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은 아까부터, 거의 겹치는 동작 없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머릿속으로 자세를 떠올리고 있다는 소리였다.

‘카메라 위치 외울 때부터 범상치 않더라니.’

그때는 대표님의 ‘도현이니까’라는 말이 어이없었는데, 이제는 자신도 자연스럽게 ‘도현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현이 소파에 뉘었던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후드 티의 모자를 쓰고선, 다리 한쪽을 접어 올려 운동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금방이라도 밖에 나가 놀기 위해 신발을 신는 모습이었다.

찰칵! 찰칵!

“좋아요! 아, 예쁘다! 이쪽도 한번 볼까요? 옳지!”

도현이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장난스럽게 눈매를 찡그리며 웃었다.

찰칵!

이어서 입은 옷은 여러 색이 배합된 바람막이에 트레이닝 바지였다.

머리에는 살짝 톤 다운된 선홍색 캡 모자를 쓰고 형광 초록색의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바람막이에 적절하게 조화된 색이 그것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만들었다.

이번에 도현은 소품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배드민턴 채를 들어 어깨에 대기도 하고, 바닥에 자유분방하게 앉은 채로 한쪽 발로 공을 밟기도 했다.

“잘한다! 우리 아들!”

엄마 아빠의 응원의 목소리는 이제 익숙했다.

자세를 취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잘한다 소리와 칭찬이 들려오니, 천하의 도현이라도 이쯤 되면 어깨가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막판에 흥이 오른 도현은 온갖 자세를 취하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보는 사람도 신나고, 찍는 사람도 신나고, 찍히는 사람도 신나는 선순환이었다.

촬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정은주와 부모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올라온 걸 보니, 자신이 꽤 나쁘지 않게 한 것 같았다

도현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큰 산 하나를 간신히 넘어간 기분이었다.

“도현아, 많이 힘들었지? 고생했어.”

정은주가 도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아니에요. 재밌었어요.”

도현이 솔직히 답했다.

텐션이 너무 높아져서 문제지… 촬영 자체는 재밌었다. 땀이 난 것도 모르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도현을 보던 정은주가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브랜드 전속 모델 얘기는 안 하셨니?”

주어가 빠졌지만 알아듣는 데는 문제없었다.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요.”

“이번 시즌만 하기엔 너무 아까운데….”

정은주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정은주가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본 도현이 식은땀을 비질 흘렸다.

“도현아! 메이크업 지워야지!”

“아, 네!”

도현이 박하준이 부르는 대로 따라갔다.

지금도 딱히 불편한 줄을 몰랐는데, 메이크업을 지우고 깨끗이 세수를 하고 나자 얼굴이 너무 가볍고 시원했다.

방금까지 부드러운 인상이었던 아이가 다시 차가운 인상으로 변했다.

“이건 다시 봐도 신기하네!”

이장혁이 정말 신기하다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화장실을 나오자, 뒤돌아 있던 서혜나가 웃었다. 그 옆에는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상자가 한가득이었다.

“엄마. 옆에 그건 뭐예요?”

“이거? 우리 도현이 선물!”

“아, 선물… 네?”

도현이 다시 한번 상자들을 보았다.

“…너무 많지 않아요?”

“그러니? 사실 너무 적은 것 같아서 고민했는데….”

서혜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심인 것 같았다.

“원래 모델한테 기념으로 선물을 주거든. 협찬도 많이 하고.”

그게 이렇게까지 많이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서혜나는 뻔뻔했다.

“이거 얼른 차에 싣고 가져가자.”

그 말에 도현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엄마 아빠는 브랜드 대표였다. 그 말인즉슨.

“집으로 보낼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그러면 기분이 안 살잖아!”

“아….”

도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좀 더 놀랍긴 했다.

그렇게 서혜나와 이장혁, 그리고 스태프까지 동원되어서 옷상자를 모두 차로 옮겼다.

“다음에 또 보자.”

박하준이 도현에게 인사했다. 도현은 그를 또 보는 게 언제쯤일지 가늠하다가, 그냥 웃었다.

“다시 미국에 가는 거지?”

“네.”

“그럼 다음에도 한국 오면 스튜디오에 들르렴.”

오늘 촬영으로 도현에게 커다란 호감을 가지게 된 정은주가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네, 다음에 또 뵐게요.”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도현은 차에 올라탔다. 부모님도 몇 번 말을 더 나누다가,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라탔다.

부릉.

엔진에 시동이 걸리고 차가 출발했다.

도현은 화양연화 스튜디오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은 밖에서 먹을까?”

“좋아요.”

차가 도로 위를 경쾌하게 달렸다.

* * *

플래닛 연예부 소속 기자 박상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그가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넓은 NMC 사옥 강당에 취재진들과 카메라맨들, 그리고 제작 발표회를 보러 온 인원들로 바글바글했다.

‘하긴, 강이든 주연의 드라마이니.’

강이든이 누군가.

최근 가장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젊은 배우 중 톱 배우를 꼽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배우였다.

“들어가시기 전에 이거 하나씩 가지고 들어가세요. 강이든 배우님 팬클럽에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스태프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보통 제작 발표회까지 저런 걸 준비해요?”

연예부에 새로 들어온 신입, 이경재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박상철이 봉지 하나를 받아 들며 말했다.

“제작 발표회니까 준비하는 거지.”

“예? 왜요? 촬영장도 아닌데.”

“여기 깔려 있는 사람들이 다 뭐냐?”

“기자… 아, 그럼!”

“자기네 배우님 잘 좀 봐달라는 얘기지. 거, 그건 나중에 보고 빨리 따라와.”

“넵!”

이경재가 박상철의 뒤를 따랐다.

박상철은 간신히 사람들 틈바귀 속에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우후죽순 들어오는 중이었다.

“인기가 정말 장난 아니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얼마나 기대를 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물론, 드라마에 대한 기대 하나만으로 이렇게 관심이 쏠리는 게 아니었다.

<불량경찰>이 들어가는 시간은 황금 시간대라 불리는 주말 9시 50분.

지금 NMC의 경쟁사라고 할 수 있는 KBN에서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극 드라마, <대왕전기>와 시간대가 겹쳤다.

그야말로 왕위 쟁탈전.

과연 <대왕전기>의 아성을 꺾고 새로운 바람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대왕전기>가 계속해서 기세를 타고 흐름을 이어갈지 사람들의 관심이 몰렸다.

그때였다.

정장을 입은 MC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금부터 NMC 주말 드라마, <불량경찰>의 제작 발표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저기서 셔터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MC가 무어라 더 말을 이었다.

박상철은 노트북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말했다.

“이제 곧 배우들 올라온다. 뭐가 되었든 빠지지 말고 적어. 알았어?”

“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럼 <불량경찰>의 피디님과 배우분들을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찰칵, 찰칵, 찰칵!

셔터 소리가 커졌다.

“먼저, <불량경찰>을 맡아주신 감독님부터 모시겠습니다.”

한쪽 문에서 박민호 감독이 나왔다. 보무도 당당하게 거칠 것 없는 걸음걸이로 포토 존에 가서 멈췄다.

이어서 이연솔 작가가 나와서 그 옆에 자리했다.

“선우강 역할을 맡아주신 강이든 배우님 나와 주십시오.”

차차차차차차차찰칵!

사방이 셔터음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긴 다리를 뽐내며 심플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강이든이 걸어 나왔다.

그냥 걷는 것뿐인데도 모양새가 났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쏟아지는데도 여유롭게 걸어간 그가 적당한 자리에 멈춰 섰다.

이후 송승아, 배연진, 고승호, 김우강과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나왔지만, 강이든만큼의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

“네. <불량경찰> 배우분들을 모셨습니다. 잠깐 오른쪽을 봐주세요.”

잠깐의 포토 타임 이후.

단상 위에 마련된 의자에 배우들이 앉았다.

“먼저, 배우분들 소개부터 듣도록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강이든이 자신의 앞에 놓인 마이크를 잡았다.

플래시 세례가 다시 한번 터지고.

흥분한 기자들과 달리 한없이 느긋한 표정의 강이든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불량경찰>의 불량을 맡은, 선우강 역의 강이든입니다.”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선우강은 쓰라린 실패의 경험으로 철없고 책임감 없고 의욕 없는 성격으로 자라난 캐릭터입니다. 경찰이 된 것도 국민의 지팡이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국민의 세금 도둑이 되기 위해서였죠.”

밑에서 강이든의 매니저가 머리를 잡았다.

그렇게 말조심하라고 했는데!

매니저가 눈물을 삼키든 말든 기자의 손가락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벌써부터 기사의 제목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한 능력을 얻은 후로 선우강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신다면, 선우강에게 찾아온 진정한 변화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선우강이라는 인물의 성장임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이어 다른 배우들의 소개와 인사가 이어졌다.

딱딱하지 않고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진행되는 발표회의 분위기에, 간간이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배우들의 순서가 끝나고 박민호 피디가 마이크를 들었다.

“강이든 배우님께서 말하셨다시피, 저희 드라마는 철없는 주인공이 특별한 능력을 얻으면서 생기는 다양한 좌충우돌 사건뿐만 아니라, 이 능력으로 인해 점점 범죄와 얽혀가면서 파헤쳐 가는 진실을 다루는 범죄 수사극입니다. 범죄 수사극이 많이 쓰이는 소재이니만큼, 어떻게 풀어 작품만의 특별한 매력을 만들어 낼지에 대해서 많이 고민한 작품입니다.”

박민호 피디의 말을 이연솔 작가가 받았다.

이연솔 작가의 얼굴에 굳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원 히트 원더.

이 바닥에서 얼마나 흔히 쓰이는 말인가?

바로 전작에서 초대박을 쳐도 다음 작에서 말아먹을 수 있는 게 현실이었다.

이연솔은 이 작품으로 자신이 오래, 그리고 꾸준히 뛰어난 작품을 쓸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기존 범죄 수사극이 진지한 분위기에서 사건 해결에 중심을 주었던 것과 다르게, 이번 작품은 사건 해결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하는 모습을 중점으로 다뤘습니다. 가볍고 통쾌하지만, 동시에 가볍지만은 않은, 뜻깊은 그런 작품이 되도록 노력했으니, 시청자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남는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연솔 작가의 말 이후, MC의 개별 질문 타임이 지나가고 기자들이 질문할 수 있는 문답의 시간이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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