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한 여름, 폭풍 (12)
저녁 아홉 시 삼십 분.
“오늘 뭐 볼 거 있지?”
“열 시에 <대왕전기> 하잖아.”
“아, 맞네.”
중년 부부가 평화로이 대화를 나누는 거실.
- 오늘 정부에서 지자체….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은서는 방에서 뭐 한대?”
“몰라. 맨날 방문 닫고 있으니 알 턱이 있나. 놀고 있겠지.”
“은서야! <대왕전기> 한다! 나와!”
“그렇게 부른다고 애가 나오나?”
여성이 혀를 끌끌 찰 때였다.
벌컥!
방문이 시원하게 열리더니,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은 은서가 나왔다.
“봐. 부르니까 나오잖아.”
“아니, 얘가 그럴 리 없는데….”
은서를 신기한 눈으로 보던 때였다.
“NMC! NMC! 빨리!”
“뭔 소리여. <대왕전기>는 KBN인데.”
“그거 말고! 오늘 강이든 나오는 드라마 첫방 한단 말이야!”
중년 남성이 눈살을 찌푸리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아빠가 보는 게 있는데. 저기 안방에 가서 작은 테레비로 보든….”
“강이든이 나와?”
아내가 남편의 말을 싹둑 자르며 말했다. 은서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세상에. 강이든이 드라마를 찍었어?”
그에 불안함을 느낀 남성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여보, 우리는 <대왕전기>를….”
“아, 그건 안방에 들어가서 봐요. 나랑 은서는 강이든 나오는 거 볼 거니까. 같이 볼 거면 얌전히 보든가.”
그러나 단호한 대답에 기세를 잃고 뒤로 빠졌다.
결국, 아빠의 패배로 끝이 나고 세 가족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NMC 채널을 틀었다.
“열 시에 시작하는 거야?”
“응. 오, 강이든 광고 나온다.”
때마침 강이든이 찍은 정수기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거, 비리비리한 게 뭐가 잘생겼다고. 나처럼 풍채 좀 있는 게 낫지. 여보 나랑 쟤 둘 중에서 누가 더 잘생겼….”
“오메나, 뭔 소리를 한대!”
뭘 그런 걸 묻냐는 듯이 기가 차다는 반응이었다. 남성이 뒷말을 기대할 때였다.
“당연히 강이든이지! 남사스러워서 정말.”
“아빠! 솔직히 그건 아니다.”
두 사람의 타박 어린 말이 돌아왔다.
“쩝.”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남성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디 뭐 얼마나 재밌나 보자, 라는 심정도 있었다.
“시작한다!”
은서가 소리쳤다.
오프닝 OST가 흘러나오고, 뒤이어 사람의 눈이 화면에 가득 찼다.
“어! 강이든이다!”
눈만 나왔음에도 곧바로 알아본 은서가 소리쳤다.
이윽고.
화면에 가득 찬 눈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다가, 카메라가 점점 멀어지며 얼굴이 드러났다.
* * *
“안 돼요, 네? 저 이거 아니면 진짜 안 돼요.”
“무리하다가는 발목을 영영 못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운동을 그만두시고 휴식을 취하는 방법밖에….”
“몇 년이 될지도 모른다면서요. 네? 제가 운동선수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재, 재활 치료. 재활 치료 열심히 하면 금방 좋아지지 않을까요?”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몇 년간 천천히 재활 치료 하시면서 차도를 확인해 나가는 방향으로 해야,”
“당신이 의산데 모르면 어떻게 해!”
쾅!
강이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핏발이 서 있었다. 악다구니를 지르는 강에 겁을 먹은 의사가 몸을 뒤로 물렸다.
“가, 강아! 잠깐 진정하고!”
“나는 어떡하라고!”
강과 같이 병원에 왔던 코치가 강을 붙잡고 뜯어말렸다.
“으으… 으아아아악!”
코치를 털어낸 강이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강의 뒷모습을 비추던 카메라가 점점 멀어졌다.
이내 화면이 검게 물들고.
- 그렇게, 내 선수 생활이 막을 내렸다.
정적 속에서 담백한 내레이션이 울렸다.
어느새 세 사람은 완전히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밝고 경쾌한 배경음이 흘러나왔다.
화면이 천천히 밝아지며 경찰차 안에서 김밥을 세로로 세워서 하나씩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강이 나왔다.
“빨리 먹어. 김밥을 무슨 한세월 먹고 있냐.”
허 경위가 타박하자 강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시간인데, 좀 느긋하게 먹으면 안 됩니까?”
“지금이 점심시간이냐? 엉? 시간 안 보여? 벌써 오 분이나 지났잖아. 헛소리 말고 포스터 들고 나와. 오늘 시장 돌면서 홍보 다 해야 해.”
탁.
허 경위가 먼저 차에서 나갔다. 머리를 벅벅 긁은 강이 입에 김밥을 욱여넣고는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포스터를 손에 쥔 채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온 강이 허 경위의 뒤를 따랐다.
시장에 있는 마트에 들어선 허 경위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안녕하세요! 아유, 장사는 잘되고 계세요?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위조지폐 관련해서 홍보 좀 하려고요.”
그런 허 경위를 강이 지루하다는 눈빛으로 보다가 한 대 얻어맞는다.
바쁘게 움직이는 허 경위와 그런 허 경위 뒤를 털레털레 마지못해 따라다니는 선우강.
“에이, 쯧! 저저, 뺀질뺀질한 것 봐. 저게 세금 도둑이지, 세금 도둑이야.”
은서의 아빠가 어느새 드라마에 몰입하여 선우강을 욕하고 있었다.
은서는 강이든의 인터뷰 내용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았다.
순찰은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강과 허 경위가 어딘가로 달려간다. 식당에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중이었다.
식당 앞 골목길.
거나하게 취한 취객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그만하세요!”
허 경위가 달려들어서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취한 중년 남성이 오히려 화를 내며 허 경위를 밀친다.
위험천만해 보이는 상황.
내내 심드렁하던 강의 눈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푼수 같았던 인상이 단숨에 날카롭게 변했다.
타앗.
취객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고, 위기를 감지한 취객이 움츠러든 순간.
척 보기에도 힘이 들어간 손에 허 경위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선우강! 야, 안 돼! 손에 힘 빼!”
삐끗.
강의 몸이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강이 고개를 돌려 불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힘을 빼고 어떻게 제압을 하라는….”
그때였다.
“에이씨!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움츠러들었던 취객이 되레 성을 내며 강의 어깨를 팍 밀쳤다. 허 경위를 보고 있었던 강이 갑작스러운 습격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어어, 어?”
카메라 화면이 강의 시야처럼 놀란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다, 하늘로 올라간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재밌는데?’
은서의 눈이 반짝였다.
물론 강이든이 나오는 작품이니, 재미가 없어도 강이든에 대한 애정으로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었다.
“엄마, 이거 재밌지 않아?”
“조용히 해. 소리 안 들리잖아.”
은서가 입을 다물었다.
병원에서 나온 후.
처음에는 휴가를 받았다는 것에 기뻐하던 강에게 점점 이상한 일들이 생겨났다. 머릿속에서 전파음 같은 소리가 들리고, 눈앞이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검사 결과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기에 다시 복직하게 된 강.
“저 진짜 아프다니까요?”
“그래. 아프겠지.”
“아니, 자꾸 이상한 것도 보이고!”
“그래, 그래. 많이 아픈가 보네. 거기 소견서에 적힌 정상 글씨가 안 보이는 걸 보니! 에라이!”
하소연해 봐도 괜히 꾀병 취급만 받고 타박을 들었다. 강이 꿍시렁대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서에서 거짓말쟁이 취급을 받은 것과 달리, 강의 이상한 현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윽고.
“…거, CCTV 좀 한번 봅시다.”
CCTV를 확인한 강의 얼굴이 사정없이 동요했다.
“미, 미친…. 저 초능력자 됐나 봐요.”
“미친놈.”
허 경위가 혀를 찼다.
이후, 강의 업무 효율은 무시무시하게 증가했다.
접촉 사고는 났는데, 사고를 낸 운전자는 안 보이는 기묘한 상황에서 척척 걸어가더니 건물 뒤에 술 취한 채로 널브러진 운전자를 찾아내거나, 물건을 훔치고 도주하려는 범인을 곧장 찾아내는 등.
신기할 정도로 일을 척척척 해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경찰서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허허!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네! 역시 하면 잘할 놈이라니까!”
팀장님에게 칭찬을 들었지만 선우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일을 빨리 처리하면 쉬는 시간이 늘어야 되는데, 이상하게도 일이 더 늘어났다. 어느새부턴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강이 이를 갈았다.
“못 본 척… 그래, 나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허 경위님. 지금부터 저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선우강의 헛짓거리에 허 경위가 ‘저놈이 그럼 그렇지’라는 뜻을 담아 미소 지었다.
선우강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아무리 답답하고 속 터져도 찬물을 원샷할지언정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속에 쌓이는 답답함으로 화병이 쌓인 선우강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졌다. 못 본 척할수록 이상하게 점점 더 잦아지는 능력이 그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미아 신고 들어왔습니다. 어린애 둘이 보호자 없이 편의점 앞에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고입니다.”
“간식 사러 간 거 아니야?”
“두 시간째 그러고 있답니다.”
혀를 찬 선우강과 허 경위가 곧바로 출동했다. 경찰차가 멈춰 선 건 편의점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이었다.
작은 아이 두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나 여기 서 있을 테니까, 저 애들 좀 데려와.”
“네? 왜요?”
“내 얼굴 안 보이냐?”
강이 잠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 같은 허 경위를 쳐다보았다.
“애들은 나 보면 무서워해, 인마.”
강은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경위님… 힘내십쇼.”
“헛소리 말고 가기나 해, 새끼야! 애들 울리기만 해봐!”
허 경위가 강의 등을 밀었다. 강이 투덜거리다가, 허 경위의 잔소리를 듣고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선우강의 움직임에 따라 아이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이, 거기! 꼬맹이 둘!”
두 아이 중 조금 더 키가 큰 남자아이가 어깨를 움찔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미친….”
은서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떡을 빚어놓은 것 같은 두 뺨, 놀라서 크게 뜨인 검은 눈동자,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그림자를 만드는 속눈썹!
미모가 화면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 옆에 더 조그만 여자애가 고목나무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장면이 은서의 심장에 푹 꽂혔다.
“세상에. 뭔 애가 뽀샤시하게 인형같이 생겼대.”
옆에서 엄마도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엄마 잃어버렸어? 길 잃은 거야?”
선우강이 척 봐도 인위적인 미소로 친절한 척을 했다.
노력은 가상했으나.
주춤.
오히려 한 발짝 물러난 송하가 동생을 뒤로 숨겼다. 바짝 긴장한 햄스터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허억!”
은서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심장 건강에 너무나도 위협적인 귀여움이었다.
선우강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송하의 경계심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강이든 옆에서도 꿀리지 않는, 오히려 제 빛을 반짝이는 외모에 홀려 집중했던 은서는 어느새 드라마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가 아저씨야, 아저씨는? 나 아직 이십 대거든?”
“죄, 죄송해요!”
깡패와 깡패한테 잘못 걸린 어린이 같은 둘의 모습에 은서가 푸웁,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은 어느새 킥킥 웃으며 송하와 선우강의 케미를 보고 있었다.
선우강이 송하의 눈앞에 손가락 세 개를 내밀고 까딱까딱 흔들었다. 강의 강요에 송하의 코가 움찔하더니, 이내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이고, 어쩔까. 내 새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엄마에 은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엄마. 엄마 새끼는 여기 있는데?”
“넌 이제 징그러워, 이 가시나야.”
은서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